제268화. 위기 대피
에스파냐 함대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대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복잡한 기동이나 기교를 부리기엔 양측이 모두 단점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 함대는 수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지만 함선의 우수성과 포의 파괴력에선 뒤쳐졌다. 그에 반해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대는 수적 열세가 너무 두드러졌다.
그것이 양측의 함대가 얕은 기교대신 정통적인 전열포격전을 벌이게 된 연유였다.
비냐델마르에서 남쪽으로 450km정도 떨어진 콘셉시온이란 개척도시 앞바다에서 벌어진 양측의 포격전은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양측 모두 숙달된 선원들로 이루어진 데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무장한 까닭에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에스파냐의 전열함인 산타마리아호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소유의 왕건급 호위함인 블랙샘호는 상호 포격전으로 양측의 배가 동시에 침몰하는 상황에서도 포격을 멈추지 않았을 정도였다.
워낙 격렬한 포격전을 주고받은 까닭에 어느 한쪽이 우세하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투가 몰려갔다.
수는 적어도 파괴력이 큰 포로 공격을 퍼붓는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대와 다소 부족한 파괴력이었지만 대량 포격으로 맞서는 에스파냐 함대는 백중세였다.
특히 월등히 많은 포를 이용해 대량 포격을 가하는 에스파냐의 공격을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함대가 맷집으로 버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수백발의 포탄을 맞고서도 버티는 해모수급 전열함의 맷집엔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에스파냐의 고참 수병들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함대의 장병들은 짧은 시간에 막대한 포격을 퍼붓는 에스파냐 포수들의 능력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잉글랜드의 포수가 세 번 쏠 동안 에스파냐 포수들은 거의 네 번 정도 포를 쏘고 있었다.
더 많은 포로, 더 많이 쏘니 잉글랜드 함선들로써는 수적인 차이 이상의 포탄을 뒤집어 써야만했다. 그 대량 포격으로 다소 부족한 맷집을 가진 왕건급 호위함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해모수급 전열함의 무지막지한 맷집이 아니었다면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대가 패배했을 거라는 말들이 나올 정도로 에스파냐 남부 함대의 포격은 무서울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그것은 오스만 제국의 함대와 수도 없는 전투를 벌여가며 쌓은 실전경험이 만들어내는 실력이었다.
선체의 능력과 선원들의 실력이 맞선 채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는 전투가 지속되었다.
그 와중에 침몰당하는 배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결국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한 잉글랜드 동인도 함대가 뱃머리를 돌렸다.
도주하는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대를 에스파냐 함대가 쫓았다. 함대라고는 했지만 살아남은 배는 해모수급 전열함 2척뿐이었다.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왕건급 호위함 4척은 격침되거나 반파되어 운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당히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격실구조의 해모수급 전열함은 속도조차 잃지 않았다. 바람을 안고 13노트의 최고속도로 도주하는 해모수급 전열함을 쫓기 위해 에스파냐의 함선들이 모든 돛을 펴고 악착같이 따라오고 있었다.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대를 이끌고 있던 것은 에드워드 혼 제독이었다.
잉글랜드 해군 장성 출신으로 그 유명한 드레이크 제독의 휘하에서 항해사를 지냈던 야전지휘관이었다. 그가 잉글랜드 해군에서 은퇴 후 유유자적하던 여가생활을 집어치우고 다시 바다로 나왔던 것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가 제시한 막대한 급료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다 냄새, 출렁이는 파도의 움직임이 그리웠던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바다로 나온 것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콘웰의 저택과 드넓은 밀밭의 밀향이 그리워지는 에드워드 혼 제독이었다.
“이렇게 쫓겨 가다간 비냐델마르마저 위험해 지겠습니다.”
항해장의 말에 에드워드 혼 제독의 시선이 뒤를 쫓고 있는 에스파냐 함대에게로 향했다. 전열함의 수는 줄어서 2척 뿐이었지만 갤리온의 수는 여전히 10여척이 넘었다.
저들을 달고 돌아갔다가는 항해장의 말대로 비냐델마르마저 위험해 질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속도를 믿고 그대로 북상을 계속했다가는 에스파냐 함대가 추격을 중단하고 비냐델마르로 향해도 위험해지는 것은 같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조속히 사방으로 흩어졌던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선들이 집결해서 에스파냐 함대를 격멸하는 것이었지만 너무 멀리 너무 많이 흩어졌다.
에스파냐가 남부 함대를 동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속단한 채 더 이상의 에스파냐 함대의 방해가 없을 것을 상정하여 점령에 속도를 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한참을 고심하던 에드워드 혼 제독의 눈빛이 반짝였다.
“목적지를 바꾼다. 발파라조다. 우린 발파라조로 들어간다.”
제독의 말에 항해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독님 거긴 조선의 영토입니다!”
“그러니 들어간다는 것이다. 에스파냐가 무슨 짓을 해도 조선군이 머물고 있는 발파라조로 들어올 수 없다.”
“하지만 조선군이 우리의 행동을 도발로 받아들일 경우, 에스파냐와의 전투는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 될 겁니다.”
“백기를 단다. 발파라조로 들어가기 전에 메인마스트에 백기를 달면 공격하진 않을 것이다.”
“백기······. 설마 투항 하자는 말씀입니까?”
당황하는 항해장의 물음에 에드워드 혼 제독이 고개를 저었다.
“조선과 전투도 없었는데 무슨 투항. 협정을 이용하자는 거다.”
“협······, 정이요?”
“우리 잉글랜드와 조선이 맺은 동맹 협정 말이다.”
조선 태자의 국혼이 거행되던 시기 조선은 잉글랜드의 요청에 의해 동맹 협정을 맺었다. 거의 상호방위조약에 근접한 군사 조약 성격을 가진 협정이었다.
서로를 군사적으로 적극적으로 돕는 협정이었기에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위기의식을 느꼈던지 두 나라도 조선에 요청해 비슷한 형식의 동맹 협정을 맺었다.
잉글랜드로써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적어도 에스파냐나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때 조선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가능성이 한층 낮아졌다는 것만으로도 잉글랜드 의회는 만족해했다.
에드워드 혼 제독은 그 동맹 협정을 거론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저들은 중립 조항을 들어 에스파냐의 도움을 거절했었다는 걸아시지 않습니까?”
“우릴 도와 에스파냐와 싸워 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위기 대피 조항을 써먹자는 뜻이다.”
“위기 대피요?”
“우리가 맺은 동맹 조약엔 생명이 위험한 경우 양 당사국은 상대국 함선의 피항(避港)을 거부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지. 그것을 위기 대피라 부른다.”
“하면······?”
“우린 발파라조로 위기 대피한다.”
에드워드 혼 제독의 명령에 따라 2척의 해모수급 전열함은 전속력으로 달려 발파라조로 향했다.
에드워드 혼 제독이 이끄는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함대 소속 해모수급 전열함 2척이 커다란 백기를 걸로 입항하는 것을 조선군은 당황스러운 눈길로 지켜보았다.
발파라조 인근해역에 정지한 에스파냐 함대도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하간 전쟁 당사자가 조선의 영토로 진입했으니 중립의무를 준수하라는 항의를 하러 에스파냐 함대에서 고위 지휘관이 발파라조를 찾았다.
전투를 벌이던 양국의 함선들이 발파라조 항구의 접안시설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현재 발파라조의 지휘관은 이순신의 제자들로 불리는 이들 중 한명인 하상훈이었다.
지난 도쿄만 해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장령에서 상령으로 진급한 그는 태평양 함대가 확대되면서 이순신 함대에서 태평양 함대로 배속 변경됨과 동시에 발파라조 전대장에 임명되었다.
승진에 배속 변경까지 거쳤지만 그의 직접지휘 하에 있는 함선이 유리급 순양함이라는 것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하상훈 상령의 앞엔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함대의 지휘관인 에드워드 혼 제독과 에스파냐 남부 함대의 부제독인 알레한드로 장군이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주장을 통역을 통해 전달 받은 하상훈 상령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잉글랜드 함대는 위기 대피를 요청하는 것이고, 에스파냐 함대는 그 요청을 거부하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두 사람이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답하자 하상훈 상령이 어이없이 웃었다.
“하, 아! 미안합니다. 제가 지금의 상황이 조금 어이가 없다보니······. 두 분의 요청은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갖추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해당 요청에 대해 본국에 정식 판단을 요청하겠습니다. 전문을 통하기 때문에 긴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니 잠시 각자의 배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하상훈 상령의 제의에 두 사람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각자의 함선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렇게 돌아가는 두 사람에게 하상훈 상령은 항구에 머무는 동안 일체의 분란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두 나라의 장군들이 돌아가자 하상훈 상령이 곧바로 통신실로 향했다. 본국에 상신하여 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발파라조 통신실을 통해 전신을 받은 곳은 하와이의 태평양 함대 지휘소였다. 아직 자체결정권을 가진 태평양군은 구성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태평양 함대 지휘소는 곧바로 해군 총사부로 해당 사안을 보고했다.
해군 총사인 우치적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인 내용이었던지라 그는 곧바로 원수부와 최고사령부로 해당 사안을 보고했다.
최고사령부의 보고를 받은 광해는 이순신과 총리대신, 그리고 외교부 대신을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는 승정원 도제조로 복귀한 이항복도 함께 있었다.
“이 사안을 어찌 처리하였으면 좋겠소?”
광해의 물음에 외교부 대신이 나서서 답했다.
“양국과 체결된 협정대로라면 우선순위는 위기 대피 쪽에 실리옵니다. 조문에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라는 문장이 실려 있기 때문이옵니다.”
전체 문장을 거론하자면 <협정 당사국 양국은 상대국의 함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떠한 경우에도 피항을 거부할 수 없다>였다.
외교부 대신의 말에 총리대신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엔 이순신도 반론이 없었는지 아무소리도 없었다.
광해가 생각하기에도 해당 사안은 외교부 대신의 판단이 무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결정을 보려는 순간 이항복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나섰다.
“폐하. 이 사안을 누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오라 어느 것이 조선의 이익에 부합되는지 살펴보시는 것이 어떠하겠나이까?”
“조선의 이익에 부합되는가를 살펴라?”
“예.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이 조선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겠는가 하는 점을 살펴주소서.”
이항복의 말에 광해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물었다.
“도제조의 생각은 어떠한가?”
“과거가 어찌 되었든 에스파냐는 혼인동맹으로 맺어진 나라이옵니다. 태자비 전하의 고향 이옵고, 차후 태어나게 될 황손 아기씨의 외가가 되옵니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그 점을 간과 할 수 없음이옵니다.”
이항복의 말에 총리대신을 비롯해 외교부 대신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들이 에스파냐에 불리한 결정을 주청했다는 것이 태자비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것에 태자비가 마음을 상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차후 태어날 황손에게 이어진다면······.
섬뜩함을 느낀 두 사람의 당황한 시선이 살짝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그런 두 사람을 일별한 광해가 이항복에게 시선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