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칠레 전쟁
조선이 에스파냐로부터 인수한 발파라조는 칠레 지역 최대 도시였던 산티아고의 주요 항구로 사용되던 비냐델마르(Vina del Mar)와 지척에 위치해 있었다.
직선 거리상으로는 채 20리(약7.8km)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병력이 비냐델마르로 상륙하는 것을 발파라조에 주둔해 있던 조선군 해병대 병력은 명확히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발파라조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 병력은 1개 대 1백 명으로, 북미 서부지역 점령 작전에 임해있던 해병원정여단 소속이었다.
이들은 본국에 해당 사실을 보고하고, 그냥 지켜보라는 명령에 따라 별다른 외부조처 없이 발파라조의 경비를 강화하는 선에서 대응수위를 조절했다.
문제는 위기에 처한 산티아고의 에스파냐군이 구원을 청했다는 점이었다.
이 구원요청에 대해 발파라조 주둔군의 보고를 받은 원수부는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그리고 프랑스와 맺은 동맹 협정의 중요 조항을 들어 그 구원요청을 거부하라고 지시했다.
해당 국가들과 맺은 동맹 협정에는 동맹국들 간에 전쟁이 벌어졌을 경우 조선은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해당 조항은 조선이 원해서 채용된 것이 아니라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그리고 프랑스가 삽입하길 원해서 협정문에 기입한 조항이었다.
조선이 그것을 들고 나온 이상, 에스파냐는 더는 조선군에게 구원 요청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병력적열세를 견디지 못하고 산티아고는 그렇게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공격에 무너졌다.
발파라조 전대가 도착한 것은 그렇게 무너진 산티아고를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가 완벽히 장악해서 재빨리 재건하고는, 북쪽의 도시들로 세력을 뻗어나가던 시점이었다.
지척인 비냐델마르에 정박해 있는 해모수급 전열함들을 확인한 발파라조 전대의 장병들은 새삼 감격스러움을 느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모수급 전열함을 타고 다니던 장병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비냐델마르에 정박해 있던 잉글랜드 선원들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발파라조로 들어가는 대형 증기철선들의 모습에 압도당했다.
주몽급 증기철선들이 포르투갈 전쟁동안 에스파냐 함대를 여러 차례 격파한 일로 조선의 증기철선들은 한동안 악마배로 불리며 유럽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때의 악명이 아직도 남아서 유럽의 선원들은 조선의 증기철선을 두려워했다.
그런 발파라조 전대가 앞으로 모항으로 삼게 될 발파라조라는 도시는 크기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항구를 중심으로 건설된 조선군 기지도 상당히 작은 규모였다.
하긴 주둔군의 규모가 1백 명인 대였으니까.
거기다 해군 전대가 증파되었다지만 승무원들은 최소 3분지 2 이상, 상시 배에서 대기하기 때문에 실제로 지상 기지에서 머무는 병력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발파라조의 조선군 기지의 절반 정도는 대량의 물자를 보관하고 있는 전략물자 창고가 차지하고 있었다.
적략물자 창고에는 대량의 석탄과 비행선용 중유, 그리고 각종 화기들과 포탄, 총탄들이 대량으로 적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기지에서 가장 강력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도 바로 그 전략물자 창고였다.
해안가에 접한 산에 굴을 파서 조성한 전략물자 창고는 두께 1자(30cm)의 철문으로 막혀있었다. 굴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 방마다 다른 종류의 보급품이 채워져 있었다.
복잡한 환기기구와 내연기관으로 작동하는 발전기를 장비해서 창고 안에 조명을 킬 수 있는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발파라조 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조선군 기지는 직선거리로는 2만6천6백7십리(약10,474km) 떨어진 벤쿠버였다.
배가 항해할 수 있는 노선을 따른 거리로는 대략 3만8백리(약12,096km)에 달한다.
따라서 발파라조가 적의 공격에 노출될 경우 증파 전력이 도착하는 것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조선군은 발파라조에 두 가지 방어책을 마련해두었다.
첫 번째가 전략물자 창고다. 기지의 크기 상 보급창고 정도면 무난했을 이 작은 기지에 신세계항, 또는 퀘벡이나 리스본 등 몇몇 중요에 지역에 건설되어 있는 전략물자 창고를 건설하여 다량의 보급품을 사전 전개해둔 것이다.
물량으로 보면 1개 전단을 완전 무장시킬 수는 화기와 해당 병력이 최소 6개월은 임무수행이 가능한 식량과 총, 포탄 그리고 군수물자가 집적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방어시설이었다.
기지는 높이 3미터의 이중 콘크리트 방호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해당 방호벽의 12군데엔 대형 콘크리트 망루가 세워졌다.
이 망루들 중 6곳엔 신형 기관총인 기01이 폐쇄식 총좌 형태로 배치되었다. 또한 나머지 6곳의 망루에는 해군 함선에나 장비되는 단장형 일장함포가 역시 폐쇄식 포좌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항구의 접안 시설 양쪽으로는 2연관 일장함포 2문이 폐쇄식 포좌로 배치되어 있어서 강력한 해안포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게 이중의 방호벽과 다수의 포들을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서 버티는 것을 넘어, 아예 분쇄하도록 건설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직 조선 본토의 민간인들에 대한 이주는 이루어지지 않아서 발파라조엔 소수의 원주민과 유럽 이주민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발파라조가 조선의 영토로 선포된 직후부터 조선의 백성으로 조선의 법률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발파라조는 본래 비냐델마르의 보조 항구로 개발된 곳이었기에 조선으로 이양된 후 에스파냐의 교역항으로써는 그 기능을 상실했다.
따라서 발파라조에 기거하는 민간인들은 기존의 일자리들을 상당수 잃게 되었다. 그로인한 실직사태가 벌어지자 조선은 그들의 대부분을 기지의 군무원으로 고용하였다.
그 덕에 발파라조 주둔군 병력은 기지 시설물 유지와 같은 잡무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온전히 경계 임무에 전력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기지에서 근무하게 된 군무원들은 조선의 고임금 정책에 따라 상당한 급료를 받았기 때문에 에스파냐의 보조 교역항으로 기능할 때보다 훨씬 많은 소득을 올리는 셈이었다.
그렇게 경제력이 올라가자 상점이 활성화되는 등 작은 발파라조의 경제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열배는 더 큰 규모의 비냐델마르의 경제력을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그것에는 조선에서 들어오는 물자들이 남미에 풀리는 창구로 발파라조가 활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미로 기항하는 조선무역선단이 발파라조 기지가 완공된 후부터는 이곳을 중요 기착지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기조는 에스파냐로부터 잉글랜드가 산티아고를 빼앗은 후에도 마찬가지로 유지되었다.
산티아고를 확보한 곳이 국가인 잉글랜드가 아니라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였기 때문인지 그들은 신속하게 도시를 안정화시키고, 복구를 서둘러 상업이 번창하도록 유도했다.
특히 대량의 금광과 은광을 확보한 이래로 금은 제련과 동시에 발파라조를 통해 조선으로 보내졌다. 남미에 풀리는 조선 물건 값과 외상으로 구입한 함선들의 값을 치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 반해 은은 모조리 잉글랜드 본국으로 보내졌다. 조선이 금 본위제를 시행한 이래로 더 이상 조선은 물건 갑으로 은을 받지 않았다.
조선과 거래를 위해서는 조선이 발행한 화폐나 금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세상의 금은 모두 조선으로 모이고 있었다.
대신 은 본위제에서 탈피한 조선은 과거처럼 은을 대량으로 쌓아두지 않았다. 오히려 쌓아두고 있던 은을 유럽 등 외국으로 수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에 따라 유럽은 은 본위제를 유지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은이 흔해지기는 했지만 과거 실제 역사에서처럼 은 가격의 폭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외교관계를 넘어 동맹 협정을 체결한 조선의 조언에 따라 잉글랜드와 프랑스, 에스파냐가 대량의 은을 자신들이 설립한 중앙은행에 쌓아두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이것으로 삼국이 발행한 화폐의 가치를 보존하고, 은의 가치를 지키는 두 가지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프랑스의 중앙은행들은 은만이 아니라 또 다른 것을 보관함으로써 자신들의 화폐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보관하는 다른 하나는 바로 조선의 화폐였다.
최근 들어 국제통화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조선의 원화는 그 특유의 배합비와 선진 주조 기술로 인해 이 당시 유럽의 기술로는 위폐 제작이 불가능한 유일한 화폐였다.
그렇다보니 중앙은행들만이 아니라 상인들을 중심으로도 상당히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 경향이 얼마나 활발했던지 아직 조선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은 신성로마제국에서조차 조선의 원화가 거래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로인해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이 대체로 조선의 원화를 중심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황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 경향이 발파라조를 중심으로 한 남미에서도 확대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칠레 지역에 존재하는 에스파냐의 도시들을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가 장악한 이래로 조선 물품의 거래량이 늘면서 그런 성향은 더 빨리, 더 광범위 하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칠레 지역을 침공했다는 잉글랜드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6월 중순 에스파냐의 남부 항구도시인 발렌시아를 떠난 에스파냐 남부함대가 남미 최남단을 돌아 칠레 연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7월 말이었다.
이 함대가 북부함대와 달리 잉글랜드의 조기경보 체계를 벗어나 남미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지휘부가 에스파냐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방치한 채 남부 함대를 일명 ‘칠레 전쟁’으로 불리는 이번 전쟁에 파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한마디로 에스파냐가 남부 함대를 파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속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남미 연안에 출몰한 에스파냐 남부함대와 조우한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함선들은 상당히 놀랐다.
그래서인지 초기에 접촉한 2척의 왕건급 호위함은 접전을 벌여 격침되기도 했다. 뛰어난 함체의 성능과 함포의 파괴력 우위를 믿고 에스파냐 남부함대에 정면 도전한 결과였다.
그러한 결과가 나온 가장 주된 이유는 에스파냐도 이제 네덜란드 전쟁 중 조선이 제공했던 폭발탄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남부함대는 발렌시아를 출항하기 직전 폭발탄을 보급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수는 그다지 충분치 않아서 보유 포탄의 절반에 불과하긴 했지만 파괴력은 잉글랜드가 사용하는 폭발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잉글랜드는 2척의 왕건급 호위함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전격적으로 움직인 에스파냐 남부 함대의 공략에 의해 남부 지역의 도시 2곳을 다시 점령당한 것이다.
칠레의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함대는 곧바로 전력을 집중시켜 에스파냐 남부함대와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함선들을 급한 대로 비냐델마르로 모았지만 제시간에 당도한 함선은 해모수급 전열함 2척과 왕건급 호위함 4척뿐이었다.
나머지가 도착하려면 며칠의 시간은 더 필요해보였다. 문제는 에스파냐 남부함대의 북상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는 점이었다.
잉글랜드가 빼앗았던 도시들을 하나하나 되찾으며 북상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처음 두 개의 도시를 회복한 이후로는 곧장 북상을 택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에스파냐 남부함대는 비냐델마르를 확보한 후 곧바로 산티아고의 수복을 노리는 모양이었다.
결국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는 급한 대로 먼저 모인 함선들로 구성된 함대를 내보냈다.
수에서는 밀렸지만 전력치에서는 해볼만 하다는 것이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간부들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출동하는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비냐델마르를 출항하는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함선의 장병들의 표정엔 자신감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