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남미 진출
하와이에서 조선군의 점령 작전이 시작된 시점에 유럽에서는 에스파냐가 네덜란드에서 철군했다. 1612년 4월에 시작된 전쟁이었으니까 딱 만으로 2년만의 철군인 셈이었다.
1612년부터 1614년 까지 이어진 전쟁이라 해서 에스파냐에서는 3년 전쟁이라 불렀고, 북부 네덜란드에서는 2차 독립전쟁이라 불렀다.
에스파냐는 네덜란드 전역을 장악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남부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 지역은 회복하데 성공했다.
물론 일정한 자치권을 인정하긴 했지만 남부 네덜란드는 독립을 포기하고 에스파냐의 영토로 남았다.
절반의 성공인 셈이었지만 에스파냐는 대대적으로 전승행사를 개최하는 등, 승리로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막대한 전비와 대규모 병력을 소모해 놓고 절반만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에스파냐의 펠리페 3세 국왕도 그것에 동의했다. 전쟁 지휘를 하비에르 후작이 맡았다고는 해도 책임까지 그에게 모두 뒤집어씌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병력 동원을 위해 명령장을 발부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왕 자신이었던 까닭이다.
네덜란드에서 철군하면서 모처럼 에스파냐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평화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남미의 에스파냐 개척도시에서 벌어진 소요가 에스파냐를 또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고 들어갔다.
그간 조선과 에스파냐의 혼인동맹으로 인해 잠시 관망세를 유지하고 있던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가 미뤄두었던 칠레 공략을 지난 2월에 개시한 것이다.
수많은 은광과 금광, 그리고 동광을 보유해 에스파냐의 금고로 불리는 칠레의 도시들을 잉글랜드의 함대가 공격한 것이다.
동원된 함대는 해모수급 전열함 10척과 왕건급 호위함 20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는 음흉하게도 이 함대에 우정함대란 이름을 붙여두었다.
사실 칠레에 존재하는 수많은 에스파냐의 개척도시들은 바닷가에 건설된 경우가 많았고, 작더라도 주둔 함선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당한 이유는 조선의 선진 함선들인데다 일포로 무장한 덕도 있었지만 ‘우정함대’라는 명칭 때문에 이들이 전투력 만방의 침략 함대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뜻이다.
더구나 일포의 성능은 기존에 유럽이 가지고 있던 초선포보다 확실히 뛰어난 포였다. 거기다 잉글랜드는 이미 폭발탄을 개발(사실은 복제였지만)해 두고 있었기 때문에 치명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이 몇 가지 조건들이 합쳐지며 잉글랜드 도인도 회사의 우정함대는 칠레 연안에 늘어서 있던 다수의 에스파냐 개척도시들이 보유한 함선들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칠레에 주둔하는 에스파냐 해군 전력을 그렇게 일소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지상군이 칠레 해변에 등장했다.
왕건급 호위함 10척의 호위 하에 나타난 20척의 조선무역선에는 6천명의 잉글랜드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라는 민간 회사 소속 병사들이었지만 이들은 수많은 실전을 거친 일급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종도 잉글랜드인,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이 뒤섞여 있었던 데다가 독일인, 스위스인, 네덜란드인까지 망라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종상으로는 다국적군에 가까웠다.
이들은 그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다수의 전투에 참여한 경험을 가진 이들로 상당히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특히 칠레 지역에서 에스파냐의 개척도시들 중 가장 컸던 산티아고 공방전에서 이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병사들은 자신들이 역량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3천명에 달하는 에스파냐 수비군을 완전히 격파했던 것이다.
너무나 빠르고 전격적인 공격이었다. 남부에서 시작해서 산티아고까지 무너트리는데 겨우 3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에스파냐는 산티아고가 무너진 5월 초에야 잉글랜드의 공격 사실을 전달받았다.
거리상의 제약이 그렇게 큰 시간차이를 준 것이다.
물론 산티아고가 무너졌다는 것도 몰랐다. 에스파냐가 받은 첫 보고는 ‘잉글랜드 함대가 칠레 연안의 에스파냐 도시들을 공격하고 있다’가 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에스파냐의 행동도 처음엔 함대를 파견해 잉글랜드의 장난질을 방어하는 선에서 멈추었다.
이당시 에스파냐가 동원할 수 있는 함대는 한창 재건의 와중에 있던 북부의 함대뿐이었다. 남부의 함대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과의 경쟁에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열함 2척과 중갤리온 8척으로 이루어진 북부 함대는 펠리페 3세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모항인 산탄데르를 출발하여 대서양 횡단을 위한 항해에 들어갔다.
이때는 파나마 운하가 없을 때이기 때문에 에스파냐의 함대가 칠레 연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미 대륙 남부를 통과하는 고된 항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이 함대는 그런 고된 항해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전에 산탄데르에 스파이를 심어두었던 데다가 산탄데르 인근 바다에 정찰선까지 띄워두고 기다리던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함대가 이들을 덮쳤기 때문이다.
조선이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에 판매한 선박은 20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30척의 왕건급 호위함, 그리고 50척의 조선무역선이었다.
그중 10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20척의 왕건급 호위함, 그리고 20척의 조선무역선이 칠레 공방전에 투입되었으니 10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10척의 왕건급 호위함, 그리고 30척의 조선무역선이 아직 잉글랜드에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그 선박들 중에서 10척의 해모수급 전열함이 에스파냐 북부 함대를 덮치는 것에 동원되었다. 척당 화포수와 선박의 방어력, 거기다 일포의 파괴력 우위가 에스파냐군 함대를 처절하게 유린했다.
조선과의 전쟁에서 이순신 함대와 교전으로 격멸 당했다가 간신히 일부가 복구되었던 에스파냐 북부함대는 다시금 조선에서 건조된 함선들의 공격에 만시창이가 되어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에스파냐 북부함대의 완전한 종말이었다.
이 패전소식을 접한 것은 전투가 벌어진지 10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펠리페 3세를 비롯한 에스파냐 정부는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졌다. 이번 패전으로 북부 연안의 해상방어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까닭이었다.
그것은 잉글랜드가 마음만 먹는다면 에스파냐 북부 연안으로 아무런 해상 방해 없이 지상군을 상륙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1558년 칼레를 잃은 이후 영국은 유럽대륙의 거점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후 끊임없이 유럽 대륙에 다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프랑스가 강성해진 이후엔 그 노력을 그만 두긴 했지만 에스파냐가 약세를 보인 지금, 잉글랜드가 도버해협을 두고 마주한 가까운 프랑스가 아니라 에스파냐 북부에 거점도시를 확보하려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한 펠리페 3세와 귀족원은 합의를 통해 다시 병력을 동원하기로 했다.
네덜란드에서 귀국해 간신히 휴식을 얻었던 병사들이 가장 먼저 동원되어 북부로 이동했다. 수로는 4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그렇게 북부지역의 방어를 강화하는 와중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6월이 되었다.
그제야 남부의 여러 도시들이 함락당하고 산티아고가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이 에스파냐에 도착했다. 거리로 인한 시간차이 때문에 훨씬 이전의 소식이 이때야 도착한 것이었다.
에스파냐는 잉글랜드가 에스파냐 북부가 아니라 남미의 에스파냐 도시들을 노린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간 막대한 양의 금과 은, 그리고 동이 칠레에서 생산되어 에스파냐로 이송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음에도 에스파냐가 버텨나갈 수 있는 근간이었다.
그 에스파냐의 금고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가장 놀란 것은 국왕인 펠리페 3세였다. 자칫 칠레에서 나오는 소득이 사라지면 당장 부채를 갚을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원의 귀족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칠레는 귀족들이 가장 많은 투자를 행한 지역이기도 했던 까닭이다.
그런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에스파냐는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던 남부의 함대를 동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남부의 함대를 동원할 경우 지중해의 패권이 오스만 제국으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국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6척의 전열함과 30척의 크고 작은 갤리온으로 무장된 남부함대가 6월 중순 발렌시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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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조선군의 하와이 점령 작전이 마무리 되었다. 하와이 제도를 따라 흩어진 섬들에 나누어 할거하던 몇 개의 소왕국들은 모두 조선군의 위력시위 또는 막강한 전투력에 눌려 항복했다.
실제 전투는 몇 차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달 보름이나 시간이 걸린 것은 조선군이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왕은 가능한 원주민들의 살상을 최소화한 점령 작전을 요구했고,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덕분에 하와이 원주민들 중 이번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의 수는 겨우 1천명 안쪽이었다.
물론 하와이 원주민들의 수를 생각하면 그것도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막강한 조선군의 화력과 그 화력을 십분 활용하는 조선군의 전투방식을 생각하면 상상이상으로 적은 숫자였다.
하와이를 점령한 조선군은 곧바로 안쪽으로 파고든 진주만에 태평양 함대의 주둔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위해 12수송함대가 대규모의 보급품을 싣고서 조선을 출발했다. 이 수송함대는 서미도 관할 지역의 벤쿠버로 향하는 벤쿠버 전대와 발파라조로 향하는 발파라조 전대의 호위를 받았다.
태평양 함대의 각 전대는 유리급 순양함 2척과 온조급 구축함 4척, 그리고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2척으로 이루어져 총 8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2일 간의 항해로 진주만에 도착한 이 전대들은 하루의 휴식과 보급을 행한 후 곧바로 각자의 주둔지로 출발했다.
진주만에서 발파라조까지의 거리는 2만7천8백리(약10,918km)에 달한다. 이것은 태평양 함대에 배치된 신형 증기철선들의 순항거리인 5천 해리(약9,260km)를 넘어서는 거리였다.
따라서 발파라조 전대는 페루 연안에 있는 그 이름도 유명한 갈라파고스 군도의 주도인 이사벨라 섬을 중간기착지로 삼아 발파라조로 향하기로 했다.
진주만과 이사벨라 섬까지의 거리만도 1만9천5백리(약7,658km)에 달했지만 항속거리 안제 들어오기 때문에 이곳까지는 무보급 항해가 가능했다.
물론 이사벨라 섬엔 보급을 위한 기지가 건설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갈라파고스 군도는 유럽의 해도에는 아직 기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 섬이었다.
1535년에 파나마의 주교였던 프라이 토마스 데 베를랑가란 사람이 폭풍우를 피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하긴 했지만 여전이 사람의 발길은 잘 닿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런 섬을 조선이 알고 있었던 것은 해병대의 도움을 받으며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만들고 있는 지리원의 관리들 덕이었다.
그런 그들의 노고 덕에 조선의 해도에는 유럽의 해도에는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많은 섬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발파라조 전대는 이참에 갈라파고스 군도를 조선의 영토로 선포할 예정이었다.
아울러 이사벨라 섬에 일단의 주둔군을 보내 보급기지를 건설할 계획도 상신한 상태였다.
아직 태왕이 지휘하는 최고 사령부는 물론이고, 원수부와 해군 총사부의 허가도 나오지 않은 태평양 함대 자체의 계획에 지나지 않기는 했지만 발파라조 전대는 그 첫발을 떼기로 했다.
기항한 이사벨라섬에 한글과 한자, 영어와 에스파냐어로 ‘조선령’이란 글이 병기된 비석을 세운 발파라조 전대는 배속된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이 보유한 석탄으로 자체 보급을 실시하고는 곧바로 모항이 될 발파라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