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북부 대홍수
이순신이 설명한 조선군의 대양군 체제는 사실상 태평양 함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함대로 재탄생한 태평양 함대는 모두 54척의 함선들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조선 해군의 정규 함대가 신형 증기철선 17척으로 이루어진 일명 일칠함대로 구성된 것에 비하자면 3배가 넘는 규모였다.
소속 함선들은 모두 5차분 신형 증기철선 생산 계획에 의해 건조된 함선들로 태조급 전함 2척, 유리급 순양함 12척, 온조급 구축함 24척에다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14척이 규합되어 1개의 본대와 5개의 전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5개의 전대는 모두 태평양 각지로 분산 배치되도록 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기존에 조선함대가 주둔 중이던 대판(오사카)과 포라중(싱가포르)뿐만 아니라 북미에 새로 조성된 벤쿠버와 에스파냐로부터 인수한 남미의 발파라조가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에 본대와 전대 하나는 하와이에 주둔할 예정이었다.
이 태평양 함대에 태평양 일대에 흩어진 조선의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는 지상군들을 통합하고, 추후 서미도에 주둔하게 되는 지상군까지 통할하여 태평양군을 구성하도록 되어있었다.
원수부는 태평양군의 사령관을 태평양 함대 제독이 겸하도록 주청했다.
인도양 함대와 인도양에 존재하는 조선 점령지 주둔군으로 구성되는 인도양군의 경우엔 마드라스에 주둔하고 있는 해병대 지휘관의 직급을 올려 지휘를 맡도록 계획되었다.
대서양군의 경우엔 대서양 지역에 존재하는 점령지의 주둔군 및 남포르투갈도의 조선군과 제후국령 북포르투갈 주둔 대한제국군, 그리고 북미도 전역의 조선군과 북미에 세워질 제후국령 영토에 주둔하게 될 대한제국군의 지휘권을 모두 몰아주었다.
거기다 대서양 함대까지 통할하여 지휘하기 때문에 병력면에서는 오히려 태평양군보다 더 대규모였다. 이 광대한 전력의 지휘권은 북미도 주둔군 사령관인 육군 장수가 겸하도록 계획되었다.
원수부는 이 3개의 대양군 지휘관의 계급을 각 군 총사와 동급인 2품 상호군, 다시 말해 상장군으로 하길 원했다.
이것은 조선군에 만연한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조선군의 현 직제 상 최고위 장군들의 정원은 1품인 원수 1명, 2품인 상호군(상장군)이 3명, 3품인 대호군(대장군)이 24명이다.
각 군 총사에게만 제수되는 상장군에 비해 대장군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은 이유는 그들이 육군의 경우 각 전단장을 맡고, 해군의 경우엔 함대의 제독을 맡기 때문이다.
그 외 내금위장과 조선군 최고사령부 통합지휘소 부장, 원수부 삼부장, 군수사령관. 그리고 각 군 부총사도 대장군의 직책이다.
하지만 현재 조선군엔 그 24명 외에도 대장군이 17명이나 몰려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전공을 세워 승진한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해병대에선 아원의 경우처럼 대장군이 여단장을 맡고 있는 경우까지 있었다.
상장군의 경우도 정원보다 1명이 더 많은 4명이었는데 해군 총사에서 대서양 함대 제독 겸 대서양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억기가 상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이순신과 원수부는 그 전례를 따라 대양군 사령관의 계급을 상장군으로 주청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조선군의 고질적인 문제로 대두되어있는 인사적체를 일부 해소할 수 있게 되길 희망했던 것이다.
의정부와 원수부의 설명을 모두 들은 광해가 몇 가지를 묻고 다시 답을 들은 후, 만족한 표정으로 해당 사안들을 승인했다.
태왕의 승인이 떨어지자 이순신은 곧바로 하와이 점령 작전계획을 태왕에게 제출했다.
이순신이 제출한 계획은 대월 전선에서 정기룡이 지휘하는 대한제국군만을 남겨둔 채 지세창이 지휘하는 산악전단을 빼내 하와이로 투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2개의 해병여단과 2개의 산악병단을 보유한 지세창의 산악전단이라면 상륙전은 물론이고, 상륙 후 지상전 모두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었기에 광해는 이순신이 제출한 하와이 점령 작전을 승인했다.
아울러 하와이 점령 작전의 지휘를 원수부에 일임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사안이 보고되고 결정되던 대전 조회의 말미에 외교부 대신이 북원과 후금의 대홍수로 인한 기근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했다.
이미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소빙하기에 대한 방비로 식량을 대량으로 쌓아두도록 하였는데 홍수가 발생하면서 그렇게 쌓아두고 있던 대량의 곡물들이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본격적인 소빙하기가 발생하기도 전에 백성들에게 공급할 곡물의 양이 현격하게 줄어들면서 두 제후국이 기근 상황에 직면했다.
따라서 외교부는 북원과 후금에 대한 긴급 지원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것이다.
“북원과 후금의 정식 지원 요청이 있었는가?”
광해의 물음에 외교부 대신이 답했다.
“아니옵니다. 아직은 정식 요청은 없었나이다. 하오나 북원과 후금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이 이미 재난의 수준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선제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사료되었나이다.”
외교부 대신의 답에 광해가 잠시 고심하다 고개를 저었다.
“외교부 대신의 뜻은 알겠으나 잠시 보류하는 것이 낫겠소. 필요한 이가 필요하다 말도 하기 전에 지원하는 것은 자칫 해당 제후국들에게 위기 대응에 안이함을 심어줄 수 있을 수도 있는 바, 저들의 정식 요청이 올 때까지 기다리시오. 대신, 국토부와 농업부는 해당 요청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미리 갖춰두시오.”
광해의 말에 외교부대신은 물론이고 국토부와 농업부 대신들이 허리를 굽혔다.
“황명을 받잡나이다. 폐하.”
세 대신의 답을 들으며 광해가 총리대신을 돌아봤다.
“북부에 비가 오래 내려 홍수 피해가 났다는데 우리는 문제가 없는 것이오?”
“하북도가 다소의 피해를 입긴 하였으나 하북도 감영을 국토부가 지원하면서 복구 작업에 만전을 기하고 있나이다.”
이후 이어진 총리대신의 보고대로라면 조선의 서부3도 중 하북도도 오랜 시간 비가 오면서 대홍수에 휘말리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들을 모두 지대가 높은 곳에 지은 데다 만약에 대비해 일층을 비우고 이층부터 곡물을 쌓도록 만든 까닭에 저장하고 있던 곡물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이러한 곡물창고의 저장 형태는 광해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곡물저장 업무를 맡은 국토부 관리들의 자체 검토에서 홍수에도 방비하자는 의견이 나온 끝에 만들어진 대비책이었다.
광해가 세심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젠 관리체계가 스스로 여러 가지 상황을 예견하고 대비책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고받은 광해가 상당히 흡족해 하며 말했다.
“저장 창고를 그리 짓도록 한 국토부 관리들에게 짐이 상훈을 내릴 것이오. 또한 그것을 만천하에 고해 그들의 일처리를 모든 관리들이 본받도록 해야 할 것이오.”
광해의 말에 총리대신을 포함한 대소신료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런 대신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광해가 다시 총리대신에게 말했다.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구휼에도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나이까. 모든 일에 앞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구휼을 우선하고 있나이다.”
“하북도 관찰사가 잘 하고 있겠으나 총리대신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잘 챙겨주시오.”
“소신, 폐하의 명을 받아 성심껏 챙겨 부족함이 없게 하겠나이다.”
“부탁하겠소.”
“소신, 온 힘을 다하겠나이다.”
총리대신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광해에게 더 이상의 안건이 없음을 도승지 허균이 아뢰자 조회를 파했다.
그렇게 대전 조회가 끝이 나자 이순신은 곧바로 원수부로 향했다.
하와이 점령 작전의 준비를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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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하와이 점령 작전은 4월 초순, 대월에서 지세창이 지휘하는 산악전단이 철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산악전단을 탑승시킨 제13수송함대는 할롱을 출발해 유구(오키나와)를 거쳐 하와이로 직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구와 하와이간의 거리는 1만9천리(약7,500km)정도로 13수송함대가 보유한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의 순항거리인 5천 해리(약9,260km) 안에 있었기에 무보급 항해가 가능했다.
원활한 합동 임무 수행을 위해 5천 해리로 항속거리를 통일한 신형 증기철선들은 모두 동일한 항속거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호송함대로 참여한 태평양 함대 본대와 하와이 전대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수송 후 작전이나 귀환을 위해서는 보급이 필요했기에 13수송함대는 30척의 수송선들 중 10척에 20만 톤의 석탄을 나누어 싣고 있었다.
이것은 13수송함대는 물론이고, 태평양 함대 본대와 하와이 전대로 이루어진 호송함대를 재보급하고서도 절반 이상이 남는 대량으로 나머지는 하와이에 보관될 것이었다.
그 석탄들은 하와이 점령 후 주둔하며 작전을 전개하게 될 태평양 함대 본대와 하와이 전대의 초기 보급물량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물론 점령이 완료되면 즉시 제12수송함대가 대량의 보급품과 함께 다시 20만 톤의 석탄을 실어 나르기로 계획 되어 있었다.
아직 함선용 대출력 내연기관은 개발이 완료되지 못했다. 현재까지 개발된 최대출력의 내연기관은 지난해 말 개발된 5백 마력이었다.
날틀04와 파생형인 날틀042, 그리고 총선들에 장착된 2백 마력에서 발전한 것이긴 했지만 여전히 대형 함선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출력이었다.
광해는 현재 함선들에서 주로 사용 중인 5천 마력 이상의 대출력 엔진이 만들어 질 때까지는 다수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증기기관을 고수하기로 했다.
그에 따라 하와이에도 선박 연료용 석탄이 대량 보급도록 계획이 세워진 것이다.
물론 일부 내연기관용 연료가 공급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비행선의 기항에 대비한 예비연료로 소량이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하와이 점령 작전에 투입되는 비행선은 이순신 함대에서 태평양 함대로 소속이 변경된 온달급 구축함 한척에 실려 있는 평강 1대 뿐이었다.
모함이 없는 비행선들을 하와이에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초기엔 하와이까지 다수의 섬들을 연결하는 보급거점을 만들어 비행선들을 투입하는 방안이 검토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위해 너무 많은 비용과 인력,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어 비행선은 온달급 구축함에 배치된 평강 한 대만 투입하기로 결정된 것이었다.
이미 비행선을 통한 전력의 투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대월 전쟁에서 여실히 느꼈던 지세창을 비롯한 산악전단 지휘관들이 그 점을 대단히 안타까워했다.
현재 지난해 6월 건조를 시작한 고왕급 비행선 모함은 초기 생산분 2척이 올 12월 말 진수를 목표로 건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대량 생산을 염두에 둔 조선 해군 설계 사상을 따랐음에도 워낙 거함이었던 데다 내부 장비들이 복잡해서 건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건조된 2척의 고왕급 비행선 모함은 이순신 함대와 태평양 함대 본대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비행선 모함에 배치되는 비행선인 날틀03은 이미 대월 전선에서 활약했던 20대 외에 20대가 추가로 제작되어 헬륨기체 2차분이 휴스턴에서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헬륨 기체의 소요량이 많아지고, 휴스턴 일대에 조성된 헬륨 광산의 채굴량도 늘어나고 있었기에 조선은 지증급 헬륨 기체 수송선 2척의 추가 건조를 지난 2월부터 시작했다.
해당 지증급 헬륨 기체 수송선은 내년 5월 진수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태평양의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항진한 13수송함대가 태평양 함대 본대와 하와이 전대의 호송 속에 하와이 근해에 도착한 것은 4월 말경이었다.
대월 정벌군에서 하와이 정벌군으로 명칭을 바꾼 산악전단은 태평양 함대로 배속된 온달급 구축함에 평강의 출동을 명령했다.
정찰을 위한 비행이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평강이 신속히 준비를 마치고 비행에 나섰다.
이번 비행순번은 2조였기에 조종사는 신만수 장령이 맡고 현식총 사수는 이치원 위관이 담당했다.
천천히 온달을 떠나 하와이로 향하는 평강이 고도를 점점 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