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고개 숙인 황제
대월 전선에서 비행선들을 이용한 폭격이 진행된 지 한 달이 넘었다. 대공세 기간 지상군을 통한 농경지의 파괴도 병행 된 까닭에 대월은 농토를 대부분 상실했다.
그것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입은 타격도 적지 않았지만 정작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정글로 피신시켜두었던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는 것이었다.
결국 남진 국왕의 죽음으로 발발한 조선과 대월간의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5개월 만에 대월의 사신이 할롱의 조선군 주둔지로 찾아왔다.
항복 조선을 협의하기 위한 사신이었다.
대월은 항복하는 조건으로 왕실과 대월의 독립을 보장해주길 원했다. 대신 대월은 조선을 상국으로 섬기겠다는 것이 항복 조건이었다.
그 내용을 보고 받은 광해는 대월의 항복조건을 거절하고 대신 역제안을 내놨다.
그 역제안은 세 가지 조건을 담고 있었다.
첫 번째는 대월 말로 탕롱(昇龍, 승룡, 현재의 하노이)이라 부르는 도시를 기준으로 북부의 영토는 모두 남진에게 할애할 것.
두 번째는 조선군이 주둔 중인 할롱을 기점으로 사방 1백리(약39km)를 조선에 영구 할애할 것.
세 번째는 조선을 상국으로 삼아 사대(事大)의 예를 취할 것.
그 세 조건을 수락하기 전에는 전쟁을 멈추지 않겠노라고 공언했다.
또한 이 조건들을 수락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할 경우 파괴한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갈아엎어 오랜 시간 농사를 지을 수 없도록 만들 것이란 위협도 잊지 않았다.
해당 조건을 전해들은 대월의 사신은 굳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사실 광해가 요구한 조건들 중 두 가지는 대월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로 내세운 북부의 영토를 남진에 할애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일단 대대로 수도로 삼아왔던 탕롱(하노이)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점은 대월의 왕실과 백성들에게 커다란 치욕이었다.
거기다 할애하라는 영토의 넓이가 너무 넓었다.
탕롱 북부의 땅은 남북으로 550리(216km), 동서로 1,170리(460km)에 달하는 넓이로 조선의 삼남지방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큰 땅이었다.
그런 연유로 조선 조정의 대소신료들과 원수부, 나아가 할롱에 주둔하고 있는 대월 정벌군 사령부의 장수들도 태왕의 조건을 대월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
대월의 사신이 돌아간 지 며칠 후, 할롱에 주둔하고 있던 동일본 대한제국군 병력이 무장 해제된 상태로 부산포로 돌아왔다.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으로 함대를 재정비한 13수송함대가 그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부산포에 도착한 동일본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사전에 준비된 동래 지역의 숙영지로 이동해 잠시 대기하라는 명을 받았다.
무장은 해제되었지만 군대로써 대우 받았고, 식량과 군수품 등을 대한제국군과 동일하게 공급받았다. 그렇게 그들이 동래의 한 숙영지에 머물기 시작한지 사흘째 되던 2월 말. 2차 원정군이 부산포로 귀환했다.
1차 원정군 때와 같이 성대한 환영식과 승전행사가 열렸다. 부산포에서 동래로 향하는 개선 행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백성들이 길가에 나와 그렇게 행진하는 병사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며 환호했다.
동래의 조선군 훈련장에 도착한 12만의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앞으로 조선군 원수이자 대한제국군 원수인 이순신이 나섰다.
그가 태왕의 교지를 대신 읽었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1차 원정군 때와 같은 군인연금을 베풀겠노라 천명한 태왕의 교지가 읽혀지는 순간 천지가 떠나갈 것 같은 함성 소리가 훈련장을 채웠다.
그 함성소리는 이내 ‘황제 폐하 만세’소리로 바뀌었다.
환호성이 가라앉고 병사들은 이내 훈련장으로 들어선 황실 내시부 환관들에게 1차 원정군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신상명세를 확인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병사들은 각국으로 돌아가는 귀환 길에 올랐다. 무장이 나총과 이포에서 일총으로 바뀌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모든 나라, 심지어 조선의 영토로 바뀐 나고야 출신 병사들까지 귀환 길에 올라 훈련장을 떠났지만 동일본 출신 병사들은 남겨졌다.
모두가 기쁜 표정으로 떠났지만 그렇게 남겨진 동일본 출신 병사들의 얼굴엔 긴장과 불안감, 그리고 분노가 가득했다.
그런 병사들이 서있던 훈련장으로 그간 숙영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할롱지역에서 철군한 병력이 합류했다.
그들까지 모이자 수가 1만3천에 달했다. 2차 원정군에서 거의 2천에 가까운 전사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할롱 전선에 파병되었던 병력에서도 전사자가 나오긴 했지만 그 수는 십여 명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 무장해제가 된 상태였다.
나총과 이포를 포함한 기존의 무장이 일괄 회수된 후, 다른 제후국 병사들에겐 일총이 보급되었지만 동일본 병사들에겐 무장이 지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중무장한 일단의 조선군이 전개되어 주변을 둘러싸자 동일본 병사들의 긴장도가 높아졌다. 귀국하면 모두 몰아서 죽일 거라는 소문이 잠시 돌았었기 때문에 그 긴장도는 굉장히 높았다.
그런 긴장어린 상황에서 일부 조선군 군열이 벌어지더니 생각지 못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몰랐지만 일부 고위 지휘관들이 그 사람을 알아봤다.
“화, 황제!”
고위 지휘관의 놀란 음성에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동일본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그런 병사들 앞으로 나선 광해가 말했다.
“고생했다. 그럼에도 기분 좋게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미안하다.”
황제의 사과에 병사들의 표정에 당황과 경악이 들어섰다. 동일본에 살면서 지배자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하급 관리들 조차 명백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그것을 항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동일본 이전의 과거부터 그래왔다. 백성들은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지배자들은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그마치 황제가 일개 병사들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그것에 놀라는 병사들의 눈이 그 다음에 벌어진 일로 찢어질까 걱정일 정도로 커졌다.
황제가 고개를 숙였던 것이다.
“짐의 사과가 그대들의 상처에, 가족을 잃은 울분에 어떤 보상이 되지 못함을 알지만······. 사과한다. 미안합니다.”
제국의 황제가 고개를 숙이고 존대까지.
망연자실한 병사들 속에서 일부 병사들에게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그 울음이 번져나갔다.
분하고 원통해도 어쩔 수 없음을 알기에, 또한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 말하는 황제의 말에 자신의 분노가 수그러드는 것에 당황스러웠던 병사들의 눈물이었다.
그 울음을 들으며 광해는 오랜 시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병사들을 쉬게 한 후, 광해가 동일본 대한제국군 고위 지휘관들을 불러 마주 앉았다. 그 속에는 할롱에서 철군한 이자키 후지하루도 끼어있었다.
“그대들은 귀국하게 될 것이다. 무장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일총만 허락될 것이다.”
광해의 말에 동일본 대한제국군 고위 지휘관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광해가 말을 이었다.
“귀국 후의 행보는 귀관들의 자율에 맡겨질 것이다. 막부의 세력이 웅크리고 있는 동부지역으로 이동해 가겠다면 조선군은 그대들의 발길을 막지 않을 것이다.”
태왕의 말이 끝났을 때 고위 지휘관들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그런 이들 속에서 이자키 후지하루가 입을 열었다.
“소관이 감히 여쭙고자 하옵니다.”
“말하라.”
광해의 허락에 이자키 후자하루가 물었다.
“굳이 그리 하시는 이유가 있으시옵니까?”
“그대들의 나라이고, 그대들의 미래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선택은 귀관들의 몫이라 믿는 까닭이며, 짐을 위해 싸웠던 그대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광해의 답에 이자키 후지하루를 포함한 동일본 대한제국군 고위지휘부는 무거운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태왕과 동일본 대한제국군 지휘부의 만남이 끝났다.
태왕은 왔을 때만큼이나 조용히 신의주 황궁으로 돌아갔고, 동일본 대한제국군 병사들에겐 일총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동래에서 부산포로 이동한 동일본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13수송함대에 탑승해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본국, 동일본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부산포를 떠나는 배에 탑승한 동일본 장병들의 표정은 복잡했다.
*****
동일본 출신 병사들을 포함한 2차 원정군 병력이 모두 자국으로 돌아간 직후인 3월 초, 대월의 사신이 할롱의 조선군 주둔지로 다시 찾아왔다.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대월이 광해가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태왕의 특명을 받은 조선과 대한제국, 양 대월 정벌군이 남북에서 몇몇 농토에 소금을 대량으로 뿌리고 갈아엎은 직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놀랐지만 광해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대월 사람들에게 쌀이 갖는 의미를 알기 때문이었다. 대월 사람들만이 아니다. 당장 조선 사람들에게 앞으로 영원히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대월 왕실과 조정의 저항 정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불안으로 인한 백성들의 민심 이반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광무 12년, 서기로는 1614년 3월 7일 대월의 정식 항복절차가 진행 되었다.
정글에서 나온 대월의 국왕이 조선의 태왕을 대리한 조선 정벌군 사령관 지세창 앞에서 항복문서에 대월의 옥새를 찍고, 조선의 황궁이 위치한 동북부를 향해 구배를 올리는 것으로 대월은 조선에 정식 항복했다.
이후, 대월의 백성들과 병사들이 정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북부에 주둔 중이던 대한제국군과 할롱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이 그런 대월의 백성들을 따라 승전군의 입장으로 대월의 영토로 들어왔다.
가뜩이나 왜소한 대월인들의 체구가 잘 먹지 못해 비쩍 말라있기까지 했다.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이 가지고 있던 군량을 풀어 그런 대월의 백성을 먹였다.
두려움에 물든 시선으로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을 바라보던 대월인들의 놀람은 상당했다.
전쟁에서 이긴 군대가 패한 나라의 백성에게 식량을 풀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더 빼앗아 가면 모를까 식량을 베풀다니.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하고 놀라는 것은 잠시였다.
먹을 것을 주고, 군의들이 다치거나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었다. 논바닥 중간, 중간 박혀있는 불발탄을 제거해 주는 등 망가졌던 농토의 복구를 돕기까지 했다.
뿐인가, 농사를 지을 종자를 공급해 준 것도 조선군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인식이 바뀌어 버렸다. 무자비한 침략군에서 일약 대월 백성들을 구한 구원군 같은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다 조선군이 참전하게 된 원인을 곁에서 함께 농토를 복구하는 조선군에게 이야기 듣게 된 대월의 백성들은 대월 왕실을 탓했다.
조선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일을 만든 것이 대월의 왕실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광해가 특별히 지시했던 일이었다. 대월의 백성들과 접촉하게 되는 병사들이 해야 할 말을 사전에 정훈 군관들을 통해 교육까지 시켰던 것이다.
물론 거짓을 말하라고 교육하진 않았다.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교육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월 정벌군에 참여한 조선군과 대한제국군 병사들이 이번 대월 전쟁의 당위성을 인식하길 바라기도 했다.
여하간 그런 광해의 조처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겨우 며칠 만에 대월 백성들은 조선군 병사들과 대한제국군 병사들을 적대감 없이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항복 조건으로 조선이 할양받은 할롱 지역에 조선의 도시를 건설하면서 대량의 일꾼들을 고용하자 막대한 재화가 대월에 풀리면서 조선에 대한 대월 백성들의 자세가 더 부드러워 졌다.
더구나 할롱을 조선의 도시로 건설하면서 보이는 모습은 그간 대월의 백성들이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문물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게 선보인 신문물들은 단숨에 대월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선이 하늘을 날고 불벼락을 쏟는 기상천외한 무기를 가진 군사 강대국에서 선망의 나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선망이 최고조에 오른 것은 조선이 할롱지역에 거주할 대월 백성들의 이주를 환영한다는 발표가 나온 때였다.
백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앉자 대월의 지방 관리들이 이주를 금했다. 물론 조선의 눈치를 보느라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금지령은 아니었다.
대신 대월의 지방관들은 병사들을 부려 백성들의 이동을 엄히 단속했다.
하지만 발전한 신문물과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있는 할롱에 대한 대월 백성들의 선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지방 관리들의 조처를 피해 거의 탈출하다 시피 할롱으로 이주하려는 대월 백성들이 몰리는 통에 한동안 할롱 인근 지방은 몸살을 알아야만 했다.
그렇게 대월이 변해가고 있던 시기 동일본으로 귀환한 대한제국군 병력이 조선군 숙영지를 떠나 막부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동부 산악지대로 향했다.
그렇게 떠나가는 이들을 동일본 정벌군에 소속된 조선군 장병들이 그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