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61화 (261/325)

제261화. 예상외의 결정

대월 정벌군에 소속된 동일본군에 대한 처리 방식에 대해 가장 먼저 이의를 제기했던 것은 조선에 있던 이순신이었다.

대서양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귀환하는 대한제국군의 경우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태왕의 말이 있었기에 불안해도 참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대월 정벌군의 경우엔 그럴 수가 없었다.

원주민인 북미연합국 병사들을 앞세워 원주민들과 협상을 벌여 흡수 통합을 이루어가고 있는 북미 지역과 달리 대월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와중이었기 때문이다.

자칫 전투의 와중에 동일본군이 총구를 조선군으로 돌릴 경우 생각 이상의 피해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지적하는 이순신의 이의 제기에 광해는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심하고 있을 것이오. 나는 그 선택이 적어도 조선에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있소.”

“어찌 그리 생각하시옵니까?”

“동일본 백성들을 특성을 믿어보고자 하는 것이오.”

“동일본 백성들의 특성이라 하오시면······. 강자에게 약한 것 말이옵니까?”

맞는 말이다. 왜인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잔인했다.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강한 억압에 의해 험하게 살아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왜인들은 분명 그런 경향이 강했다.

또한 정복자에 대한 경외심이 높았고, 반항을 잘 하지 않았다.

그것도 존경을 강요하고 작은 반항기만 보여도 죽여 버리는 일본 다이묘들의 처결 방식에 오랜 기간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말하는 이순신에게 광해가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것만 있다면 짐은 대월과 대서양군의 동일본군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을 것이오.”

“하오면······?”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깨어나고 있었듯이 저들도 우리 조선을 따라 개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오.”

광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순신은 뒤늦게나마 알아들었다. 동일본 왕실과 정부는 과거의 방식을 고집했지만 백성들은 조선의 방식을 배우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래서인지 동일본엔 많은 수의 철산 중학당이 진출해 있었다.

비슷한 수준의 기초 공공교육기관인 소학당이 아니라 일종의 사설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는 중학당이 많이 진출했다는 것은 그만큼 동일본 백성들 중에 철산 중학당에 다니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뜻했다.

돈을 내고서라도 조선의 신교육을 배우려 드는 이들이 많았다는 소리다.

그것에는 아무리 옛 방식을 고수하더라도 조선과의 교역과 교류를 동시에 진행하여야 하는 동일본 정부와 왕실의 상황이 영향을 주었다.

조선말을 하고, 조선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을 고용하여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조정의 벼슬아치이거나 막부의 관리였다.

가장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은 이들은 동일본인이면서 조선말을 할 줄 알고 조선과 교역을 벌이던 일부 상인들이었다.

당연히 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런 이들 중 이재가 밝은이들의 경우엔 그 능력을 십분 활용해 이미 막대한 부를 쌓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굳이 박봉의 관리로 나설 리 없었다.

수가 부족하자 동일본이 채용한 이들은 같은 왜인의 피가 흐르면서도 조선의 교육을 받은 이들, 그러니까 가까운 관서도와 서남도 출신 조선인 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을 데려오자면 조선의 높은 급료와 비슷한 정도로 많은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사람을 구하기 힘들었기에 동일본은 상당한 고임금으로 서남도와 관서도 조선인을 고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동일본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출세를 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알게 되었다.

‘조선말과 조선식 사고방식.’

그것을 배우면 누구라도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태생으로 신분이 결정되는 세상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그 신분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이들보다 부모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나는 이리 살지라도 내 자식만큼은.’ 이라는 생각이 없는 살림에 허리띠를 더 졸라매서라도 아이들을 조선식 교육기관에 보내려 애를 쓴 것이다.

한마디로 동일본에 조선식 교육열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조선의 철산 학당에서 문을 연 철산 중학당이 그 모두를 담지 못하자 조선의 철산 학당들을 본 딴 신식 교육기관들이 동일본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죄다 이름에 조선식 무슨, 무슨 학당이란 이름을 달고 생겨난 그 학당들은 모두 훈장들로 조선의 고등학당에서 훈장 자격을 얻은 이들을 고용했다.

대체로 서남도와 관서도 출신 조선인들이었다.

간혹 조선 본토출신 훈장을 고용한 학당의 경우엔 자리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교육생이 몰려들었다.

그런 조선식 교육 열풍이 동일본을 휩쓴 지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조선식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성인으로 성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조선식 신식교육 열기는 과거보다 지금이 더 강해졌다.

실제로 그런 교육을 받고 성장한 동일본인들이 왕실이나 막부, 각 영지의 다이묘들 밑에서 관리를 등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관리가 아니어도 상인을 비롯해 각자의 영역에서 꽤나 성공적인 삶을 일구기 시작했던 것이다.

철산 학당으로 대변되는 조선식 신식 교육은 그저 글자나 가르치고, 산수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식 교육의 특성은 백성들의 사고를 깨우는 것이다.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이해시키고 상리(常理)와 도덕을 강조한다.

준법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도 강하고, 시민의식의 고취에도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다.

그 탓에 고루한 사상에 젖어있는 몇몇 다이묘들은 철산 학당은 물론이고, 조선식 교육방식을 본 딴 신식 교육기관이 아예 자신의 영지에 들어서 있지 못하도록 금지한 곳도 존재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다이묘조차 자신의 아들들은 에도의 철산 중학당에 보내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선진화된 조선의 교육을 배워야 한다는 시대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기는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경향은 생각이 깨어있는 다이묘들의 경우엔 더 강해서 아예 자신의 자손들을 조선 본토로 보내 교육을 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들의 경우엔 무서운 속도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조선을 어떻게든 배워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해는 그렇게 동일본 전반에 걸쳐 퍼진 조선식 교육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듯 했다.

이른바 깨어있는 사고를 말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신식 교육을 받아 의식이 깨어있더라도 자국의 안위가 걸린 일이었다. 그런 일에서까지 깨어난 사고를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기 때문이다.

막상 신식 사고방식에 상당히 접근했다고 믿는 이순신, 자신조차 미래를 위해 더 나은 일일지라도 나라가 망하는 상황에서는 결단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려하는 이순신에게 광해가 말했다.

“우리 기다려 보십시다.”

광해의 거듭된 말에 이순신은 주저하다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안 된다는 일도 홀로 가능하다 말하면 진짜 이루어졌던 태왕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어쩌면 신식 사고방식에 접근했다 믿는 자신이 아직은 과거의 사고방식에 잡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이순신과 원수부가 방치에 가깝게 대월 정벌군에 소속된 동일본군 병사들을 광해가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을 그냥 지켜보게 된 연유였다.

이 당시 대월 전선에 파병된 동일본 대한제국군을 이끌고 있던 이는 도호쿠 지역의 다이묘들 중 한명이었던 이자키 가문의 차남인 이자키 후지하루였다.

동일본이 할롱에 파병한 부대는 여단급인 5천의 병력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식 계급체계를 따르는 대한제국군의 지휘를 맡은 이자키 후지하루(井﨑藤春, 정기등춘)의 계급은 여단장급인 상령이었다.

그에게 휘하 단장급 지휘관들이 모여들었다.

“어찌 결정하실 생각이십니까?”

“병사들의 결정은 받아보았나?”

이자키 후지하루의 물음에 1천명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단을 지휘하는 단장을 뜻하는 장령 계급장을 단 다테 요시무라(伊達吉村, 이달길촌)가 답했다.

“저희 단 병사들은······. 반란에 반대입니다.”

다테 요시무라가 속한 다테(伊達, 이달) 가문도 도호쿠 지방의 다이묘 가문들 중 하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할롱에 파병된 모든 동일본군 장병들은 도호쿠 지방 사람들이었다.

동일본을 이루는 2개의 지역 중 하나인 도호쿠 지방은 에도가 속한 간토 지방에 비해 외지로 여겨져 상대적 차별을 받아왔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쇼군의 가문인 도쿠가와 가문을 비롯해 그의 주요지지 다이묘들이 모조리 간토 지방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할롱에 대한 파병이 필요해지자 동일본 막부가 도호쿠 지방의 병력으로만 파병병력을 구성하게 된 연유였다.

쇼군의 병력이나 자신의 충신들의 병력을 줄이지 않은 상태에서 대한제국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생각에서 발생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일본군 답지 않게 할롱에 파병된 동일본군 장병들은 상당히 단합이 잘 되었다. 일단 지휘관들 자체가 어릴 때부터 교류가 잦았던 이들인지라 유대감이 깊었다.

병사들도 형제나 사촌도 적지 않았고, 멀어도 이웃마을 사람들이었기에 동질감이 강했던 것이다.

다테 가문의 영지 사람들로 구성된 탓에 다테단(伊達團, 이달단)이라 불리는 다테 요시무라의 단은 할롱에 파병된 동일본군 중에서도 상당히 정예 병력으로 취급되는 부대였다.

다테 가문이 전통적으로 무를 숭앙하는 무인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다테 가문은 영지의 백성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시키는 몇 안 되는 가문 중 하나였다.

오죽하면 동일본 내에선 큐슈에 시마즈가 있다면 도호쿠엔 다테가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다테 가문은 특이하게 영지의 백성들과 사이가 좋은 다이묘 가문 중 하나였다.

백성들에게 잘 베풀어 인기도 높아서 지지도 많이 받는 다이묘로 유명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동일본 막부의 반란군에서도 지휘관과 병사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다테군은 상당히 강군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테 가문의 병사들은 무조건 찬성할 것이라는 예상이 높았다.

한데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와 버린 것이다. 그것에 놀라는 이자키 후지하루에게 다테 요시무라가 말을 이었다.

“우리 다테단의 지휘관들도 대체로 반대의견이 높았습니다.”

“이유는?”

“다테 지방을 위해서도 그것이 좋다는 생각이 많아서······.”

“다테 지방을 위해서도 그것이 좋다?”

의아하게 묻는 이자키 후지하루에게 다테 요시무라가 답했다.

“우리 도호쿠 지방은 개화가 늦지요. 발전 속도가 느리다보니 일자리를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일자리가 부족하니 벌이가 시원치 않고 굶주리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저와 우리 다테단 장병들의 대부분은 그런 도호쿠 지방의 발전을 위해서도 조선과 척을 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조선은 강대국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일본과 거래하던 구라파의 강국, 화란(네덜란드)조차 조선에 밉보여 탈탈 털렸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이후 화란은 오랜 시간 전쟁에 휘말려 있습니다. 나와 다테단의 장병들은 도호쿠가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다테 요시무라의 입에서 화란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른 이들의 표정도 무거워졌다. 화란 사태는 지금의 세상에서 조선에 밉보인 나라가 어찌 되는지 모두가 알게 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이자키 후지하루가 물었다.

“말로 미루어보면 다테 요시무라 장령도 마찬가지 생각이라는 듯이 들리네만.”

“맞습니다. 저도 반대입니다.”

“부친이 전쟁에 나서 있다고 들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저희 단 장병들의 대부분의 아버지가 또는 형제나 사촌이 동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나서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반대란 것인가?”

이자키 후지하루의 확인에 다테 요시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와 우리 다테단 장병들은 반대입니다.”

그 답에 고개를 주억거린 이자키 후지하루가 다른 네 명의 단장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귀관들은?”

물음을 받은 단장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