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융단 폭격
다행히 시험비행이 잡힌 날은 하늘이 맑고 바람도 강하지 않았다. 추력기관이 달려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비행선은 기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바람에 약해서 강한 바람이 부는 날엔 조종에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아직 사고는 없었지만 사고 직전까지 간 상황은 벌써 10여 차례가 넘는다.
대월 전선에서 날틀02 1대, 시험 및 훈련 비행선으로 날틀03 4대, 총 5대의 비행선을 운용하는 것임에도 그랬다.
그만큼 비행선은 위험한 운송체였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비행대원들은 비행선에 탑승하기 전에 유서와 유품을 남긴다.
오늘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임무에 나서는 것이다.
생산 후 첫 비행에 나서는 비행선들에 오르는 비행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서와 유품을 남긴 채 비행선에 오른 비행대원들이 절차에 따라 비행 준비를 시작했다.
첫 시험비행은 정식명칭 ‘날틀04-2’, 흔히 날틀042라 부르는 지상포격용 중형 비행선이었다.
이 날틀042로 불리는 공중포격용 비행선의 경우 수송부에 신형 기관총인 기01 총좌가 3개나 장비되어 있었다.
탑승부 2층 우측면에 총구를 내밀도록 설계된 비행선용 기01총좌는 아래로 35도나 총구를 내릴 수 있는 형태로 개발되었다.
이것을 위해 총좌 자체가 경사지도록 뒤가 들리는 장치를 달고 있었다. 비행선을 우측으로 선회시키면서 총탄을 지상으로 퍼붓도록 설계된 것이다.
기01의 사거리가 1천보(약1.8km)였기 때문에 같은 기01이나 그보다 사거리가 긴 포를 보유한 조선군이 아니라면 지상으로부터 가해지는 모든 총격과 포격에서 안전을 확보한 채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 날틀042는 모두 5대가 제작되었다. 함께 제작된 20대의 날틀03과 더불어 모든 비행선은 여전히 내금위 특수비행대 소속이었다.
현재 대월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1대의 날틀02는 물론이고, 훈련용으로 사용 중인 날틀03 4대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광해는 이 시대의 전략무기로 분류되는 비행선들을 고왕급 비행선 모함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황제의 친위군인 내금위에 묶어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확대 문무백관 회의가 끝난 직후인 1월 16일부터 대월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가 예정되어 있었고, 그 대공세엔 새로 생산된 비행선들이 모두 참여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16일 이전에 대월 전선에 도착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비행선들을 싣고 갈 비행선 모함이 아직 없다는 점이었다. 착함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시험용 항공모함은 개조되어 지증급 헬륨 기체 수송선으로 전환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금위 특수비행대 지휘부는 비행선들을 몇 곳의 중간 기착지를 거쳐 대월 전선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무 곳이나 거칠 수는 없었다. 우선은 지상 계류 시 연료공급이 가능한 곳이어야 했고, 그렇게 연료를 공급받는 동안 보안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만큼의 시설을 갖춘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어야만 했다.
다양한 검토를 거쳐 내금위 특수비행대 지휘부가 결정한 경로는 거제에서 출발해 상해를 거쳐 대만도의 감영이 있는 태북(台北, 타이베이), 홍콩, 해남섬의 해구, 그리고 대월의 할롱을 잇는 노선이었다.
이 경로를 연결한 총 거리는 약 8천리(3,141km)에 달해서 거제와 할롱의 직선거리인 6천6백리(약 2천6백km)에 비해 더 길었다.
그럼에도 이런 경로를 그려야 했던 이유는 날틀03의 순항거리 때문이었다.
순항 비행거리가 1만 리(3,927km)인 날틀042라면 중간 급유 없이 거제와 할롱 간 비행이 가능하겠지만 순항비행 거리가 3천리(약1,178km)인 날틀03로는 한 번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앞에서 거론한 조건들이 부합하는 곳을 찾다보니 그렇게 직선거리보다 길어지는 경로가 만들어 진 것이다.
사실 비행선의 경우 부력을 헬륨에 대부분 의존하기 때문에 실제 소용되는 연료의 양은 극히 적었다. 그것이 비행기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항속거리를 보여주는 이유였다.
사실 체공시간에 있어서는 큰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 비행선이었기 때문이다. 실제역사에서 독일의 힌덴부르크 비행선이 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 조선의 비행선 25대가 신의주 황궁에서 확대 문무백관 회의가 한창 진행되던 1월 10일 할롱을 향해 거제를 출발했다.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 항공세력이 동원된 일대 사건이었다.
편제상 내금위 특수비행대 예하 11전투 비행선대와 91지상지원 비행선대라 명명 된 이 두 비행선대는 11전투 비행선대를 이루는 날틀03의 순항속도에 맞춰 하늘을 날았다.
바람의 영향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시간당 150리(약58km)의 속도였다.
이것은 중간 급유시간을 제외하고서도 거제에서 할롱에 도착하는데 5일이 넘게 걸린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비행선들은 중간 급유에 큰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기착해서 곧바로 중간급유가 시작되고, 중간 급유가 끝나면 지체 없이 다시 이륙해서 비행을 이어가야 했다.
따라서 비행대원들이 지상에 내려 몸을 푸는 따위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비행선대가 준비되는 동안 십여 일 가까이 급유 훈련을 받아왔던 지상 요원들이 각 중간 기착지에서 별다른 실수 없이 급유를 진행했다.
그 덕에 두 비행선대가 할롱에 도착한 것은 춘계 대공세라 명명된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6일 오전 7시였다.
밤낮 없는 이 비행을 위해 항법사들은 비행선의 조종을 배워야만 했다. 조종사에게 일정한 휴식 시간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조종사들도 항법을 배워야 했다. 자신들을 대신해 조종임무를 수행한 항법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들의 임무를 대신 수행해야 했던 것은 조종사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관사의 임무를 대신 수행해야 했던 3명의 기총 사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이들은 돌아가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피로도가 조종사나 항법사 보다는 낮았다.
당연히 항법사도 비행선용 기01 총좌의 운용방법과 사격술도 익히고 있었다.
작전의 시작은 오전 8시였다.
온달급 구축함에서 이륙한 평강, 그러니까 날틀02의 선도에 따라 25대의 신형 비행선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장관을 바라보는 대월 정벌군 장병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평강의 조종은 신만수 장령이 맡고 있었다. 그와 한조를 이루는 이치원 위관이 현식총 사수를 맡고 있었다.
이치원은 자신들이 비행선을 따라오는 신형 비행선들의 하부에 부착된 기01 총좌를 바라보며 부러운 듯 말했다.
“총좌가 훨씬 탄탄하고 좋아 보이네요.”
고함에 가까운 이치원의 음성에 신만수 장령이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핀잔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도 신형 비행선들, 특히 날틀03을 몰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신 차리자 곧, 폭격지점이다.”
“예. 기장님!”
씩씩한 이치원의 답을 들으며 신만수 장령이 내려다본 것은 제법 큰 농경지가 존재하는 지역이었다.
대월은 조선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도시를 버리고 정글 안으로 백성들을 대피시켰다. 그렇다고 농경지까지 정글 속으로 이동시킬 수는 없는 노릇.
대월의 백성들은 정글 속 마을에서 생활하며 농사를 지을 때는 농경지로 나와야 했다.
그간은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에다 민간인 피해를 우려해서 농경지에 대한 공중 공격을 가하지 않았지만 이번 춘계 대공세에선 주요 목표가 바로 농경지였다.
아무리 농경을 영위한다고는 해도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수월한 농사는 아니었다.
공중 폭격까지는 아니었어도 지상군에 의한 공격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대월의 농부들도 밤에만 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일의 능률은 바닥을 기었고, 당연히 소출도 줄어들었다. 전쟁이 짧은 기간 벌어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대월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선과의 전쟁은 벌써 1년을 훌쩍 넘어 2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식량사정이 나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대월은 상당량의 식량을 정글 속에서 얻어지는 각종 과실들로 대체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백성들과 병사들의 건강상태는 계속 나빠지고 있었다.
소비해야할 식량의 절대량이 너무 오랜 기간 부족한 상태로 지내오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와 같은 정보를 포로들의 심문에서 확인한 조선군 대월 정벌군 사령부는 농경지를 본격적으로 폭격해서 아예 곡물 생산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신형 전투비행선인 날틀03의 폭탄 적재량은 가급 공투탄(공중투하폭탄) 20발로 평강의 2배에 달했다. 그런 날틀03이 20대나 동원된 폭격이었다.
이전처럼 평강 혼자 10발의 가급 공투탄을 뜨문뜨문 투하하는 것이 아니라 20대의 날틀03이 편대비행을 하면서 모두 4백발의 달하는 가급 공투탄을 쏟아내는 이른바 융단폭격이었다.
평강까지 합류한 첫 폭격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임에도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말이 4백발이지 공투탄 4백발이 비행선의 비행경로를 따라 차례차례 떨어지며 폭발하는 파괴력은 드넓은 농경지 전역을 완전히 화염지옥으로 만들어 버렸을 정도였다.
사실 광해가 비행선을 대월 전선으로 보내면서 기대했던 것도 대병력 폭격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많은 비행전력을 동원했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던 것은 항공 전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금위 특수비행대 지휘부도 그렇고, 대월 정벌군 사령부 지휘관들도 모두 광해의 지시에 따라 이번 작전을 계획했다.
광해의 지시는 명확했다.
<식량을 끊어라. 필요하다면 논바닥에 폭탄을 퍼부어도 좋다.>
그런 광해의 지시로 수립된 조선군의 춘계 대공세가 대월 전선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사실 춘계 대공세는 공중 폭격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북부에서는 대한제국군이, 남부에서는 조선군이 밀고 들어갔다.
이들의 주요 작전 목표도 적군의 괴멸이 아니라 농경지의 파괴였다.
농경지만 파괴한 채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은 미련 없이 이탈해서 주둔지로 돌아왔다. 내륙 깊은 곳의 농경지는 비행선들이 연일 폭격을 가해 완전히 날려버렸다.
그로인해 대한제국군과 조선군 주둔지역 인근만이 아니라 대월 전역의 농경지가 완전히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가뜩이나 심각했던 대월의 식량부족사태가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전에서 조선군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아이러니 하게도 주적인 대월군이 아니었다. 조선군과 함께 할롱에 주둔 중이던 동일본군이었다.
함께 주둔해 있던 나고야 왕국군은 나고야 왕국의 패망과 함께 조선군으로 흡수 편입되었다. 나고야 왕국 자체가 조선의 영토인 나고야도로 변경되어 흡수된 것과 동일한 과정을 밟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고야군의 반발은 터져 나오지 않았다. 이미 끝나버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본군은 상황이 달랐다.
동일본은 아직 버티고 있었고, 대한제국군으로 대월 전선에 참여한 동일본군은 선택할 수 있었다. 조선과 전쟁 중인 본국의 막부를 따라 총칼을 조선군으로 돌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임에도 태왕은 아무런 명이 없었다.
단지 원수부에서 고도의 주의를 요한다는 명령만 내려와 있을 뿐이었다.
그 점을 대월 정벌군의 고위 지휘관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