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황제 실책의 보고서
알현을 청해 마주 앉은 광해를 이순신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이구려.”
“어찌 그리 하셨나이까?”
“보고서를 말하는 것이겠구려.”
“대서양군과 북포르투갈에서 혼란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그것을 모르실 폐하도 아니시고······. 왜 이옵니까?”
“하면 감추어야 했겠소?”
“감출 일을 하셨나이까? 소신의 기억엔 폐하께오서 그럴만한 일을 하신 적이 없으시옵니다.”
“동일본에서······.”
“동일본은 그리 당할 만한 일을 하였나이다.”
단호한 이순신의 말에 광해가 미소를 그렸다.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겐 당연한 일일지도. 하지만 자신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알면서 벌인 것이다.
그래.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되갚아 주겠다는 복수심이 다른 것들을 알면서도 눈을 감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정도 했으면 나름 많은 노력을 한 것이라고, 많이 참은 것이라고 스스로 면죄부를 주었던 것이다.
죄 없는 이들이 무수히 많이 죽을 것도, 황제인 자신과 대한제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먼 타국 땅에 나가 전쟁을 치르는 이들의 가족들도 잘못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벌인 일이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벌였던 일들에 비하면 그 정도는 당해도 된다고······.
그 ‘저들이 벌였던 일들’이라는 것이 아직 이곳에서는 벌어지지 않았거나 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했던 것이다.
저들을 향해 비열하다 손가락질 하던 짓을 광해, 자신이 벌인 것이다.
그렇게 그릇되게 시작된 일을 바로잡는 것이다.
치부를 숨기지 않을 생각이었다. 현대시대의 저들이 그랬던 것처럼 눈에 뻔히 보이는 것들을 감추고 부정하며 아니라고 고개를 젓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비슷한 실수를 했더라도 그걸 바로잡는 길은 달리 갈 것이라 다짐했다.
그래서 그리하였다.
그 마음을 이순신에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일본이 조선에 벌인 수많은 악행들을 열거하여 믿게 만들기 전에는.
하지만 그것은 현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광해는 다른 방법을 취하기로 했다.
“다른 모든 일을 떠나 짐의 명을 받아 먼 타국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를 벌이고 있는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가족들에 대한 일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소.”
“그들의 가족과 동일본을 분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나이다.”
“변명이오. 할 수 있었소. 원수도 알지 않소?”
광해의 반문에 이순신은 차마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이순신에게 씁쓸한 미소를 그려 보인 광해가 말을 이었다.
“황제도 잘 못을 하오.”
“폐하······.”
“그 잘못을 바로잡는 일까지 잘못된 길로 가라 말하지 마시구려.”
“폐하······.”
연신 ‘폐하’만 불러대는 이순신의 복잡한 심정을 광해는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바른 길을 가려는 군왕을 아니 된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눈앞에서 벌어질 혼란을 모른 척 할 수도 없으니 이순신도 답답할 것이었다.
그런 이순신에게 광해가 말했다.
“이 원수의 말대로 대서양군과 북포르투갈에서 분란이 생길게요. 사실대로 적은 보고서는 그들의 분노를 살 테니까.”
“하온데 어찌 하시어.....?”
“바로 잡기로 했다면서 저들을 죽여 없앨 수는 없는 노릇. 그들은 곧 귀국하게 될 것이오. 돌아와 알게 되어 벌어지는 혼란보다 먼 타국에서의 혼란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소. 적어도 그곳엔 대규모 무장 병력이 주둔 중이니까 말이오.”
“진압에 뜻을 두시옵니까?”
“억제를 원하는 것이오. 눈앞에 대규모 군대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분란에 나서는 이들의 수가 적기를 바라는 것이라오.”
“하나 그들의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럴 것이오. 큰 분노를 안고 돌아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돌아보는 이들도 생기지 않겠소.”
“폐하. 소신이라면 그 원한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입니다. 저들도 그럴 것이라 감히 장담할 수 있나이다.”
이순신의 말에 광해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마도······. 그럼에도 저들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태왕의 마음을 이순신은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황후의 죽음이 무고한 이들의 살상에서 비롯된 화를 입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태왕으로써는 그 화가 이제 막 태어난 공주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뻔히 분란이 생길 것을 알면서도 과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짐작은 맞았다. 하지만 그것은 광해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한 이유의 절반에 불과했다.
광해는 황명을 받아 대한제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들을 단지 분란을 벌일 것이란 이유로 죽여 없앴을 경우, 그것을 지켜본 다른 제후국 출신인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혼란과 분노를 생각해야만 했다.
더구나 그 이유도 사실상 광해의 잘못된 판단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연유로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목숨을 빼앗는다면 앞으로 제후국의 누가 황제를, 대한제국을, 종주국인 조선을 위해 다시 나설까 두려웠다.
그래서 광해는 모든 과오를 자신에게로 돌리기로 했다. 단순히 황제의 판단착오였음을 만천하에 고백함으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 기능이 아직은 황실에, 종주국인 조선에, 대한제국에 있음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예문관은 태왕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던지 보고서에 조선 조정 내에서 일었던 반대청원을 꽤나 소상히 다루었다.
사간원이 줄기차게 올렸던 반대 상소들을 그 내용을 실어가며 꽤나 소상히 다룬 것이다.
또한 보고서는 그 반대를 무릅쓰고 명을 내렸던 것이 동일본의 배신에 격노한 황제의 분노에 기인했음도 명확히 했다.
그렇게 내려졌던 황명이 거두어진 배경도 예문관은 솔직히 썼다.
황후의 죽음에서 무고한 인명의 살상에 대한 죄업을 황제가 뒤늦게나마 무겁게 받아들여 황명을 철회했노라고.
사실대로 기록된 보고서는 명령의 정점에 황제가 서있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든 비난과 분노가 황제를 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뜻했다.
그렇게 광해는 자신이 모든 것을 짊어짐으로써 황실과 조선, 나아가 대한제국에 대한 제후국 백성들의 신뢰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 고뇌와 선택까지는 알지 못했던 이순신은 갓 태어난 아이의 아비로써 갖는 광해의 두려움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다.
그런 이순신에게 광해가 말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경은, 경만은 나를 이해해 주시구려.”
그 말을 하는 광해의 눈가에서 글썽이는 눈물을 보았던 이순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러나와야만 했다.
그날 밤, 조선군 원수 이순신의 이름으로 남포르투갈 주둔 조선군 지휘관들과 대서양군 사령부 고위 지휘관들에게 경계령이 떨어졌다.
병사들의 행동에서 눈을 떼지 말고, 주의를 기울이라는 명령이었다. 이순신의 명을 받은 지휘관들은 그 명령이 뜻하는 바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동일본 사태에 대한 소식을 접한 이들은 고위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다른 장병들의 경우엔 보고서가 도착한 연후, 그것을 통해 알려지길 원수부가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동일본과 나고야에 대한 점령전이 진행되었다.
많은 수의 다이묘들이 항복한 나고야 왕국은 가시와자키에 조선 예비군 1군단이 상륙한지 보름만인 10월 초, 항복했다.
나고야 왕국의 국왕인 마에다 토시나가가 조선 황제를 대리한 예비군 1군단장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항복문서를 올리는 것으로써 나고야 왕국은 공식적으로 패망했다.
조선군은 마에다 토시나가를 비롯한 나고야 왕가의 가솔들을 모조리 조선으로 압송했다.
아울러 반란에 가담했던 영지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어 가담이 확실히 확인된 이들도 추포해서 조선으로 압송했다.
그들은 황제가 친히 여는 국문장에서 조사를 거친 후, 처결이 내려질 예정이었다.
나고야가 그렇게 정리되어 가고 있는 것에 반해 동일본의 상황은 여전히 전투의 와중에 있었다. 반란의 기치를 건 동일본의 다이묘들은 여전히 무고한 백성들을 방패막이 삼아 버티고 있었다.
민간인의 피해를 최대한 방지해야 하는 본래의 군율이 엄격하게 다시 시행되고 있던 조선군은 그 탓에 애를 먹고 있었다.
전투는 길어졌고, 사상자는 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상황이 흘러가던 10월 중순, 무슨 생각인지 광해가 동일본 전투를 소강상태로 유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황명을 받은 11, 12수송함대가 퀘벡으로 출발했다. 미뤄지고 있던 2차 원정군의 귀환을 위해서였다.
보고서가 도착한 연후 분노가 극에 달해있을 그들을 귀환시키는 것이었기에 대소신료들의 걱정이 나왔지만 광해는 요지부동이었다.
많은 대신들과 무관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황명에 조선 무관들의 최고 정점에 서있던 이순신은 아무런 반대 없이 복명했다.
이후 조선군 원수부의 특명으로 조선군 전체에 1급 경계태세가 발령되었다. 원수가 황제의 윤허 없이 내릴 수 있는 최고수위의 경계령이 내려진 셈이었다.
동일본 점령전이 조선군이 물러서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든 시기, 나고야는 전후 처리에 속도를 내고 있었다.
황명으로 나고야 왕국이 조선의 직할 영토로 편입되었기에 그 후속조처들을 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이지역이 주부(中部, 중부) 지방이라 불렸지만 그대로 쓸 경우 조선에서의 위치에 맞지 않았기에 광해는 이 지역을 이전의 국명인 나고야를 인용해 나고야도라 칭하기로 하였다.
얼마 전까지 왕궁이었던 곳을 나고야도 감영으로 삼은 나고야도는 이제 조선의 강토가 된 까닭에 모든 행정기관과 법률에 있어 조선의 것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다이묘들의 권리가 박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에 대한 반발이 일부 있었지만 즉각적으로 출동한 조선군 예비군들에 의해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소요에 가담한 다이묘들은 지체 없이 그 일가 전체가 추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죄목이 반란이니 그들도 추후 황제가 여는 국문장에서 죄의 유무를 판단 받게 될 터였다.
그렇게 신속하게 움직인 덕인지 나고야는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특히 조선의 법률이 적용되면서 조선 백성들에 준하는 혜택이 베풀어지기 시작하자 나고야 백성들의 마음이 곧바로 조선과 황실을 향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곡간이 풍족하면 마음은 절로 얻게 된다는 옛말이 그대로 나고야에서 증명된 셈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접어든 12월, 건제 건선단지에서 건조된 30척의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이 13수송함대로 배속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3개의 수송함대 모두를 신형 증기철선으로 교체를 완료하였다.
아울러 조선무역선단에 50척의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이 배치됨으로써 조선무역선단의 수송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향후 조선은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10척에다 유리급 순양함 1척, 온조급 구축한 2척으로 이루어진 호위함들을 엮어 조선무역선단을 구성할 예정이었다.
그것을 위해 5개 조선무역선단을 구성할 5척의 유리급 순양함과 10척의 온조급 구축함의 건조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애초의 계획은 탈해급 수송선들과 함께 진수하는 것이었지만 5차분으로 불리는 태평양 함대 확대분 함선들의 건조로 2달 정도 밀렸다.
대신 52척에 달하는 5차분은 계획대로 12월 말에 진수가 완료되었다.
이로써 조선 해군은 대서양 함대와 인도양 함대에 이어 태평양 함대까지 완비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동일본, 나고야 사태로 인해 아직 하와이에 대한 점령 작전이 마무리 되지 못했지만 조선 해군 최대 함대인 태평양 함대는 제 진용을 갖추고 적응훈련에 돌입했다.
그렇게 수많은 일들과 전쟁, 그리고 황후 승하의 비보로 물들었던 광해 11년이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