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비난 하던 이에서 비난 받을 자로
숨결이 없는 황후 곁에 멍하니 앉아있는 광해의 얼굴이 단 사흘 만에 피폐해졌다. 황후의 시신이 상할까 염려한 내관들이 방안에 빙고에서 얼음을 가져다 온도를 낮춘 탓에 방안은 서늘했다.
그런 산실의 문이 열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광해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문 닫으라.”
자신을 설득하려는 대신들이 찾아온 것으로 알았던 광해의 말에 생각지 못한 음성이 답해왔다.
“소자 이옵니다. 아바마마.”
태자 호의 음성에 광해의 고개가 돌아갔다.
“태, 태자······.”
한손에 강포를 안고 산실로 들어선 태자의 시선이하얀면포로 덮여있는 황후를 향하더니 이내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런 태자의 모습에 비척이며 어렵게 일어선 광해가 다가가 눈물 흘리는 태자를 안았다.
“태자······.”
“예서 이러고 계시면 소자는······. 또 이 아이는 어찌 하옵니까?”
태자의 말에 비로소 고개를 내려 본 광해의 눈에 강포에 싸인 갓난아이가 들어왔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방긋방긋 배냇짓을 하는 아기는 승하한 황후를 빼다 박은 듯 닮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산실 여의원이 태어난 아기가 공주마마라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젖 한 번 물지 못한 채 제 어미를 잃은 아이였다. 더구나 그 아이를 안고 찾아온 것은 이제 겨우 11살인 아들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이었지만 광해는 지금 막 어미를 잃은 어린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것을 자각한 광해의 눈빛에 초점이 잡혔다.
두 아이를 부둥켜안은 광해가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이를 악문 가운데 속으로 흐느껴 우는 광해의 눈가로 눈물이 방울져 흘렀다.
‘이제 더는 울지 않겠소. 황후, 그대와 내 아이들을 위해서······.’
그런 광해의 품안에서 황태자와 잠에서 깬 갓 난 공주가 함께 울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가에 서 있던 안 도트리슈 황태자비가 눈물을 흘렸다.
황후의 장례 절차가 개시되었다.
광해가 황실의 관례를 간소화한 이래로 황제의 장례는 9일, 그 외 황후를 포함한 모든 황실의 장례는 5일간 치르도록 되어있었다.
그 관례에 따라 장례가 진행되었다.
대소신료들의 조문이 황급히 달려온 명왕의 구슬픈 울음소리 속에 이루어졌다. 제후국의 군왕들을 대신해 제국의회 의원들과 대사들이 조문을 했다.
전국방방곡곡에 차려진 조문소에 백성들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전쟁 중인 동일본과 나고야를 제외한 10개 제후국과 남포르투갈도에도 조문소가 차려지고,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특히 1차 원정군으로 참여했다가 자국으로 돌아간 대한제국군 장병들이 조문을 위해 먼 곳에서도 찾아와 조문을 했다.
전사하거나 큰 부상을 당한 채 돌아온 병사들의 유가족이나 그 가족이 대신 조문을 오는 경우도 많았다. 군인연금을 주어 자신들의 삶을 돌봐주는 은혜를 베푼 조선 황실의 장례였기 때문이다.
아시아 전체가 큰 슬픔에 잠겼다.
자국의 공주 출신 황후였기 때문인지 명나라의 슬픔이 조선 다음으로 컸다.
장례가 마무리 된 후 황후는 압록강 건너 진흥(振兴, 전싱) 땅에 안장하고 화릉(花陵)이라 칭했다. 압록강을 건넜다 하나 황도인 신의주 권역 안이었기에 황도 안에 황후의 릉이 존재하게 된 셈이었다.
도성 안에 릉을 짓지 않는다는 조선의 오래된 관례가 깨어진 셈이었지만 대소신료들 중 그 누구도 나서서 아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황후를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태왕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건만 도성 백성들이 화릉 인근에 꽃을 심기 시작했다. 봄이 되면 말 그대로 꽃으로 물든 릉, 화릉이 될 터였다.
광해가 백성들의 마음을 받아 릉 일대를 공원으로 지정하여 가꾸도록 명했다.
전쟁 중인 나고야와 동일본을 제외한 10개 제후국 중 북미연합국을 뺀 1차 원정군에 참여했던 9개 제후국 참전용사들이 각자 자국의 꽃을 화릉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 꽃들이 도착하면 수천종의 각국 꽃이 화릉으로 이동하여 식재되는 셈이었다.
황후의 장례가 끝이 나자 멈추었던 전쟁들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월과 북미 대륙 각 전선은 물론이고, 나고야와 동일본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태왕이 동일본의 전투를 중지시켰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대소신료들에게 광해가 명했다.
“동일본에 내려진 말살 명령을 거둔다.”
태왕의 명이 바뀐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대소신료들은 아무도 없었다.
황후의 죽음 때문이다.
광해는 무고한 인명이 너무 많이 죽은 동일본 전쟁의 화가 황후에게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지만 감히 그것을 입에 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들이 태왕의 입장이라도 같은 생각을 할 것 같았던 까닭이다.
그런 연유로 광해의 명에 대신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답을 했다.
“황은이 망극하여이다. 폐하.”
“무고하게 죽은 이들의 시신을 추려 온전히 묻어주고 장례를 치르라. 그들 속에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가족이 있거든 특별히 별도의 묘역을 만들어 후히 장례하라.”
사실 이 부분은 조선 조정에서도 상당히 큰 문제로 다루지고 있었다.
말살 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죽어나간 동일본 백성들 중에는 귀환한 1차 원정군 소속 병사들과 그 가족들도 있었지만 아직 귀환하지 않은 2차 원정군에 소속된 병사들의 가족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귀환했을 경우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다.
제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돌아왔더니 자신의 가족들은 모두 제국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면 어떤 누가, 그 배신감을 참을 수 있을까.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동일본 대한제국군 병사들을 별도로 추려 조선에 당도하자마자 전원 총살 시키자는 날카로운 의견까지 나왔던 상황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현재 제후국령 북포르투갈에는 동일본과 나고야의 분할 점령지가 존재했고, 해당 지역엔 행정관을 비롯해 소수의 관리들과 각 1천 명씩의 병력이 주둔 중이었다.
거기다 대서양 함대에 소속된 포르투갈 주둔 함대에는 나고야와 동일본 수군 소속의 함선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평소 포르투갈 총독부 전신소와 자국에 주재하는 조선사무국 전신소를 통해 각기 자국의 왕실과 연결해왔다.
전생이 시작된 이래로 해당 제후국 조선 사무국의 전신소가 고장 나서 수리중이라고 둘러대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존재할 터였다.
따라서 원수부는 남포르투갈도 주둔 조선군 병력을 동원하여 양 제후국 관할지를 점령, 두 제후국 점령군 병력과 함선, 그리고 관리들을 포살(捕殺)하는 계획을 수립해 두었다.
다만 그것이 아직 태왕에게 보고되지 않았을 뿐으로 승인을 득하면 곧바로 시행 할 계획이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태왕의 명으로 모두 중단되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2차 원정군 병력은 11월에 퀘벡을 출발해 이르면 12월 말, 늦어도 내년 1월 초에는 조선의 부산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동일본과 나고야 점령전이 벌어지면서 원정군의 귀환을 위해 투입되어야 할 11, 12 수송함대가 동원된 탓에 그 시일이 뒤로 미뤄지고 있었다.
일단 광해는 동일본의 사상자들 숫자와 그 중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가족이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해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왕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명을 수행하여야 하는 현장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여전히 동일본 영지들의 반항은 격렬했고, 살아남아 도주하고 있는 영지군 병력 10만과의 전투도 첨예하게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10만의 예비군 2군단 병력이 밀고, 아래에서 해병 3여단과 7전단 예하 2개 병단, 거기다 나고야 대한제국군 병력을 통합한 2만 가량의 병력으로 구성된 임무부대 4개 여단이 치고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혼다 마사즈미가 지휘하는 10만의 동일본 영지군 생존병력을 추적하며 산발적인 전투를 지속하고 있는 7전단 예하 3개 병단도 정신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태왕의 명이 바뀌면서 전투 방식도 이전처럼 민간인의 피해를 최대한 자제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탓에 전투는 복잡하고 지난했다.
영악하게도 조선군의 전투 방식이 예전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아차린 혼다 마사즈미와 동일본 다이묘들이 백성들을 방패막이로 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조선군이 가장 강력한 화력을 자랑하는 포병대가 전투에 나설 수 없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었다.
그런 혼란함 속에서 후방 정비는 온전히 55병단에게 맡겨졌다.
당연히 사망자들 속에서 대한제국군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유해를 찾고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것도 그들이 맡았다.
에도를 넘어서는 광대한 지역에 대한 경비, 순찰 임무에다가 유해 분석과 분류, 거기다 장례 임무까지 맡겨진 55병단은 과로사 직전이었다.
동일본 백성들이 유해를 묻어주다 자신들이 죽어 묻히게 생겼다는 볼멘소리가 원수부에 도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죽하면 55병단장이 ‘차라리 우릴 죽여 묻어주십시오.’라는 전문은 원수부로 보냈을 정도였다.
임무의 범위와 양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던 원수부는 태왕의 윤허를 얻어 10만의 예비군을 추가로 소집해 동일본으로 파견했다.
예비군 3군단으로 편제된 이 5개의 사단 병력은 예비군 2군단과 달리 동일본 북부가 아니라 에도로 상륙해 55병단을 지원하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11, 12 수송함대를 통해 예비군 3군단이 투입되자 동일본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어 갔다.
사망자의 유해 발굴과 분류, 장례의 처리가 이전에 비할 바 없이 빨라진 것이다.
며칠 후, 광해에게 보고된 동일본 사태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15만 8천명을 넘고 있었다. 대량의 백성들이 몰려 살던 에도와 그 인근 영지들이 전쟁의 화마에 가장 먼저 휘말려 들었던 까닭이었다.
그 수를 보고받은 광해가 눈을 감고 참담한 마음을 수습하려 애를 썼다.
실제역사에서 일본을 향해 파렴치한 학살자라 비난하던 일을 광해가 자신의 손으로, 조선이 벌이게 만들었다는 자괴감이 뒤늦게 밀어닥친 까닭이었다.
그 중에 귀환한 1차 원정군 소속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모두 막부와의 전투 와중에 전사했고, 그 유족들은 2천 가량이 이번 사태에 죽임을 당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2차 원정군 소속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가족의 경우엔 3천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그나마 수가 적었던 것은 원정군에 소속된 병사들의 대부분이 지방의 힘없는 백성들이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후국령 북포르투갈에 파견되어 있는 관리들이나 병사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의 가족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는 대략 1천 가량으로 조사되었다.
작다지만 그 수를 합해놓고 보면 4천이 넘는다. 거기다 1차 원정군 소속 병사들의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자그마치 6천에 달하는 인원이 조선군의 총칼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자신들의 종주국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조선에 의해 그 많은 가족들을 잃어버린 병사들의 명단이 곧바로 대한제국 군사부를 겸하는 조선군 원수부에서 집계되기 시작했다.
이미 모두 전사해버린 1차 원정군을 제외하더라도 2차 원정군에서 3,754명의 병사들이 이번 조선과 동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한명 이상의 가족을 잃었다.
제후국령 북포르투갈에 근무하는 이들의 경우엔 최고위직인 행정관을 포함해 17명의 관리와 215명의 병사들이 그 가족을 잃었다.
특히 행정관의 경우엔 직계 가족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거주지가 에도였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원수부는 조용히 소집하여 일거에 총살해서 위험요소를 제거하자는 의견을 내었지만 광해가 거부했다.
그는 지난 동일본 및 나고야 전쟁의 전 과정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여 보고서 하나를 만들어내도록 지시했다.
이 임무는 예문관(藝文館)에 배당되었다.
설사 황제에게 나쁜 일일지라도 온전히 사실대로 기록해야 하는 사관들이 속해 있는 예문관에 일을 맡겼다는 것은 그 기록이 완전히 사실에 부합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작성된 보고서를 확인한 광해가 그것을 승인해 발간하도록 했다.
인쇄소들이 정신없이 찍어낸 10만부의 보고서가 각 제후국과 포르투갈, 그리고 대서양군으로 나뉘어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