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55화 (255/325)

제255화. 예비군 투입

신형 지향뢰의 경우 구형 후기형과 마찬가지로 폭발선을 잡아당기는 것으로 폭발이 가능했다.

초기형처럼 발화 심지에 불을 붙일 필요는 없었지만 폭파병을 매설지 인근에 배치할 필요는 여전히 있다는 뜻이었다.

원하는 시간과 상황에 터트리기 위해서는 사람이 제때에 폭발선을 잡아당겨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백 개를 터트릴 것이면 백 개의 폭발선을 다 잡아당길 필요는 없었다. 인접해서 터져야할 지향뢰끼리 선을 연결해 두면 먼저 하나가 터지면서 연결된 것들이 거의 동시에 터져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발 간 시간차가 아주 미세하게 존재하긴 한다. 그것을 줄이기 위해 폭발선을 당겨서 폭발시키는 지향뢰를 중간 중간 설정했다.

당연히 그것을 당겨야할 폭파병들도 해당 지향뢰 인근에 배치된다. 그들이 3여단 지휘부에서 하늘로 쏘아 올린 폭죽신호에 맞춰 일제히 두 번째 폭파선을 잡아당겼다.

콰과과광!

그와 같은 일이 2번 더 일어났다.

해병 3여단이 매설한 지향뢰의 폭발횟수는 5번이었다. 마지막 한번을 남겨두고 폭발이 중단된 것이다.

이유는 혼다 노부다케를 비롯한 나고야 군관들이 황급히 머리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군 병사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반란군이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나머지는······.

“애들 전진시켜서 제거하라.”

아원의 명령에 해병 3여단 병력이 적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침묵비상이 걸려있던 55병단도 함께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나고야군 숙영지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고야 대한제국군 병력과 도쿠가와 토시츠네가 지휘하는 병혁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시작은 나고야 대한제국군 병력이었다.

그들이 갑자기 도쿠가와 토시츠네가 지휘하는 병력을 뒤를 급습한 것이다.

생각지 못한 지향뢰의 폭발로 정신이 없던 도쿠가와 토시츠네와 그 병사들은 내부에서 가해진 공격에 빠르게 무너졌다.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병력과 수많은 훈련으로 다져진 부대 간의 전투였지만 승리는 오히려 훈련량이 극히 미비한 나고야 대한제국군이 거뒀다.

그만큼 도쿠가와 토시츠네가 지휘하는 병력이 당황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조선군까지 접근하면서 도쿠가와 토시츠네와 그 휘하 병사들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나고야 대한제국군에서 발생한 피해는 크지 않았다.

해병 3여단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55병단도 나고야 대한제국군을 아군으로 대했기 때문에 혼란을 벌어지지 않았다.

3만5천에 가까운 나고야군 병사들이 폭살 당하거나 나고야 대한제국군의 공격에 사살 당했고, 5천 정도의 병사들이 포로가 되었다.

조선군 숙영지 쪽에서 폭발음과 총소리가 들리자 약속한 대로 동일본군이 함성을 지르며 아라카와강으로 돌진해 나왔다.

그들은 야밤임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뗏목들을 띄우며 도강을 시도했다. 나고야군이 숙영지 내부에서 벌이는 분란으로 조선군이 정신없을 시기를 노린 도강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여전히 아라카와강을 순찰하고 있던 총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순식간에 13척이나 되는 총선들이 몰려들어 강변에 기01 총탄세례를 퍼부었던 것이다. 자그마치 분당 1만3천발의 총탄이 강가로 몰려나온 동일본군 병사들에게로 쏟아졌다.

산 그림자를 벗어나는 순간, 동일본군이 무더기로 쓰러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전이라면 물러났을 상황인데 동일본군은 전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대규모 학살에 가까운 피해가 동일본군에게 일어났다.

강가가 온통 기01 총탄에 맞아 죽은 시체로 뒤덮였지만 동일본군은 도강을 위한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총선들이 보유한 총탄이 바닥을 드러냈다.

13척의 총선이 총탄보급을 위해 도쿄만의 모함으로 돌아가기 위해 뱃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비어버린 강으로 뒤늦게 도착한 5척의 총선이 도착해 기01 총탄세례를 퍼부었다.

여전히 동일본군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지만 이전처럼 모든 강가가 완전히 막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총선의 수가 적어서 빈틈이 생긴 것이다.

더구나 나중에 도착한 총선도 10분정도의 사격을 마치고는 뱃머리를 돌려 도쿄만의 모함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총선이 보유한 총탄은 모두 1만발로 2정의 기01이 10분간 사격할 수 있는 분량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총선들이 돌아가자 비어버린 강을 향해 동일본군이 6만에 가까운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뛰어들었다.

강가의 조선군이 다총과 현식총으로 사격을 가하고 있었지만 총선들이 퍼붓던 밀집사격의 효과는 거둘 수 없었다.

조선군측 강가의 지형은 물론이고, 맞닿아있는 산속의 상황도 조선군이 대량의 병력을 배치하기 어려운 데다, 다수의 현식총을 배치하기에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동일본군이 노출된 도강지점을 고집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강을 건너려는 대규모 동일본군과 막으려는 소규모 조선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정충신은 동일본군이 도강을 성공할 가능성에 대비해 7전단 예하 2개 병단을 도강지점 좌우로 긴급히 전개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아울러 강가에 접한 산속으로 1개 병단을 추가로 투입해서 혹시라도 산을 타고 서부지역 안으로 침투하려는 동일본군의 시도를 차단하도록 했다.

7전단 예하 병단들은 모두 6할 가량의 편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1만이 정원인 부대가 6천 가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병단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여단급 규모였던 것이다.

물론 포병대만큼은 병단급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충신은 7전단 예하 병단들을 화력이 강화된 여단급 병력 정도로 상정하여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조선군 숙영지를 완전히 정리한 동일본 정벌군 사령부는 해병 3여단과 7전단 예하 2개 병단에 나고야 대한제국군을 통합하여 본격적인 정벌을 위한 임무부대를 편성했다.

많은 수의 조선군 지휘관들이 제후국병력이 뒤섞여 있던 대한제국군 해병대를 지휘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국적과 병종이 뒤섞인 부대를 지휘함에도 큰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해병대와 육군, 거기다 나고야 대한제국군까지 뒤섞어 임무부대를 만든 것은 화력의 편중을 해소하고, 전투력이 약한 나고야 대한제국군 병력을 정벌전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2만을 살짝 넘는 병력이 4개의 여단급 임무부대로 나뉘어 숙영지를 떠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동일본 점령 작전의 개시였다.

남겨진 55병단은 에도에 대한 방어를 공고히 했고, 강가에 배치된 7전단 예하 3개 병단에겐 도강을 위해 몸부림을 치는 동일본군을 묶어두는 임무가 할당되었다.

그리고 해당 사실이 조선군 원수부로 보고되었다.

*****

조선 예비군은 모두 50만 규모로 5개 군단, 25개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사단은 2만 병력으로 구성되고, 그런 사단 5개를 묶어 군단으로 편성했다.

그렇게 편성된 예비군 1개 사단의 전투력은 육군 1개 병단의 전투력과 대등한 것으로 원수부는 판단하고 있었다.

최근 그 예비군들이 조용히 소집되기 시작했다. 전체가 소집된 것은 아니었고, 20만의 병력이 소집되어 각자 사전에 지정되어 있었던 사단으로 입영했다.

이번엔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은 병력순으로 소집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예비군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소집 소식이 대대적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라 조용히 이장들을 통해 이루어진 까닭에 20만이나 하는 대병이 소집된 것임에도 티가 잘 나지 않아서 소집된 예비군의 가족과 지인들은 가끔 벌어지는 긴급 소집 훈련 정도로 인식했다.

그렇게 소집된 이들은 모두가 산업 현장이나 농업 등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빈자리만큼 노동력이 부족해진다.

그간 조선 정부는 그렇게 비게 된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 일꾼을 고용할 비용을 선지급해왔다.

하지만 완전고용을 넘어서 노동력 부족현상을 빚고 있는 조선의 상황에서는 정작 일꾼을 고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농업에 종사하던 이가 소집될 경우 해당 예비군이 거주하는 마을 단위에서 품앗이처럼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며 일을 대신 해주고 정부에서 지급된 비용은 마을 공동자금으로 사용한다.

만에 하나 소집된 예비군이 산업현장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일 경우엔 그렇게 지급된 비용으로 다른 직원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근무시간을 늘여 채웠다.

그러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기에 20만의 대규모 인원이 빠졌음에도 노동력의 빈곤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예비군이 소집된 후에도 전혀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은 연유였다.

조선군 원수부는 그렇게 소집된 예비군의 훈련을 강화했다. 이전과 달리 숨 쉴 여유도 없이 밀어붙이는 훈련의 양과 질에 예비군들도 무언가 사달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전투에 투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훈련에 임하는 예비군들의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미 실전을 모두 겪어본 병력이었기 때문인지 병사들의 마음이 바뀌자 적응은 상상이상으로 빨랐다.

훈련이 시작 된지 사흘째 되던 날 벌어진 전투력 측정결과 병단급 전투력을 훌쩍 넘는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 파악되어 원수부 고위 지휘관들을 놀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더구나 예비군은 현역이 사용하는 다총과 삼포가 아닌 나총과 이포로 무장한 상태였음에도 그러했다. 예비군들의 전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것에 자극을 받은 원수부가 예비군의 무장을 현역과 동일한 다총과 삼포로 바꿀 것을 건의한 것도 그와 같은 능력에 고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태왕의 승인이 난다고 해도 즉각적으로 무장을 교체할 수는 없었다. 생산과 비축의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 예비군이 사용하고 있는 나총과 이포는 이전에 현역들이 사용하다가 다총과 삼포로 교체되며 전략물자 창고로 비축된 물량이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렇게 놀라운 전투력을 보여준 예비군 사단들에게 일제히 동래로 이동하도록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예비군 병사들의 긴장도가 올라갔다.

예비군도 현역과 마찬가지로 모두 기동화 되어 있었다. 자그마치 20만의 병력이 소집되면서 현역부대에 군마를 보급하기 위해 말을 키우는 30곳의 군마목장에서 보유하고 있던 예비마의 7할이 동원되었다.

그 수가 자그마치 20만 마리였다.

예비군 절반이 기마대고, 나머지 절반은 6두마차로 이루어진 기동마차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포를 끄는 포마와 군수품을 실은 보급마차를 끄는 말들까지 배치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비군 사단들이 동래로 소집되는 동안 대월과 도쿄만으로 나가있던 수송함대들이 일제히 부산포로 향했다.

여기에 아직 조선무역선을 보유한 13수송함대와 근거리무역을 담당하는 조선무역선들 중 일부도 동원되었다.

원수부가 그 수송선들을 동원하여 단 한차례의 수송 작전으로 20만에 달하는 조선 예비군 병력을 나고야와 동일본에 일거에 쏟아놓기로 결정한 까닭이었다.

이 일련의 작전은 제후국들이 유사시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아직 30만에 달하는 예비군을 추가로 소집할 수 있다는 정보에 놀라지 않는 제후국이 없었다.

다시 말해 조선은 유사시 20만에 달하는 현역에 50만에 달하는 예비군까지, 훈련된 병력을 단시간에 70만이나 보유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에 놀라는 제후국들의 시선을 받으며 조선 예비군 2개 군단, 10개 사단, 총 20만 병력이 부산포를 떠나 일본열도로 향했다.

원수부는 예비군 1군단을 나고야에, 예비군 2군단을 동일본 북부에 투입하기로 했다.

상륙거점은 각기 나고야 왕국의 동북부에 위치한 가시와자키(柏崎 백기)와 동일본의 서북부인 니이가타(新潟, 신석)였다.

두 상륙지점간 거리는 대략 185리(약73km)정도로 시간차가 거의 없이 상륙이 가능했던 데다 조선이 점령하여 금광을 개발하고 있는 사도가섬이 지척이라 주둔 함대에 의한 지원이 가능했다.

당장 3함대 소속 사도가섬 주둔 함대를 이루고 있는 유리급 순양한 1척과 온조급 구축함 2척이 상륙거점에 대한 제압작전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3함대 소속 유리급 순양함 1척이 가세했다. 따라서 각 상륙거점 마다 유리급 순양함 1척과 온조급 구축함 1척이 배치되어 사전 상륙포격을 실시해서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던 방어시설들을 파괴했다.

직후 접근한 수송선들이 병력을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조선 본토병력에 의한 나고야 왕국과 동일본에 대한 점령 작전이 개시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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