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혜안(慧眼)
마에다 토시츠네가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는 갑주와 무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긴 풀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고야 왕국군 전체가 무장상태였다. 그것은 중립을 지키겠노라 약조한 2만의 병력도 다를 것이 없었다.
마에다 토시츠네는 알고 있었다.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했지만 이미 조선군 군영 안에 들어와 칼을 거꾸로 드는 밤이다.
중립? 지킬 수 없다.
만에 하나 자신들이 패한다면 나중에 조선군에게 ‘우린 중립을 지켰소’라고 말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테니까.
이미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조차 무장을 풀지 못한 채 대기하고 있는 것일 터이니.
곧바로 마에다 토시츠네의 곁으로 그 만큼이나 중무장을 갖춘 무장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예상처럼 그렇게 모인 장수들 속에는 중립을 지키겠노라 말했던 병력의 지휘관들도 섞여 있었다.
심지어 국왕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고 말했던 병력의 지휘관들도 보였다. 그런 이들과 눈빛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여준 마에다 토시츠네가 말했다.
“오늘의 성패가 우리의 목숨은 물론이고, 왕국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최대한 조용히 그리고 최대한 신속히. 양 옆에 주둔한 조선군을 도륙하고 그 곁에 주둔한 조선군을 덮쳐야 하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지휘관들을 바라보며 마에다 토시츠네가 명령했다.
“싹 다 쓸어버립시다!”
아무런 답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나고야 왕국 지휘관들이 흩어졌다.
*****
조선군에 있어 나고야 왕국군의 변절에 대비한 작전은 오로지 해병 3여단에만 맡겨져 있었다. 괜히 다른 병력에게도 알려서 부대 전체의 분위기가 적대적으로 변하는 것을 방치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확인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나고야 왕국군에게 적개심을 보였다가 괜히 자극만 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여하간 제후국군은 아군이었고, 믿어야할 동지였으니까. 실제로 유사시에 대비해 전투태세로 대기 중인 해병 3여단 병사들조차 나고야 왕국군이 칼을 거꾸로 들 수도 있다는 경고는 받지 못했다.
그저 동일본군의 내습에 즉각 대응하기 위한 위기대응 부대로 오늘 밤에 지정됐다는 것이 공식적인 전투대기 상태 유지의 명분이었으니까.
그런 해병 3여단 장병들 중에 상황을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은 대장급 이상의 지휘관들뿐이었다. 물론 지향뢰를 매설하면서 눈치를 챈 병사들의 수가 꽤 많았지만 그것을 티를 낼 정도로 어수룩한 해병들은 아니었다.
때문인지 경비를 서기 위해 나가는 병사들에게 사실을 공개했을 때 놀라는 병사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랬기 때문인지 나고야 왕국군에서 조선군 군영으로 향하던 군관 서넛을 추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추포된 나고야 군관들이 경비를 서던 조선군 병사들에게 끌려와 아원 앞에 꿇어 앉혀졌다.
그들은 나고야 왕국군의 배신행위를 고변하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라 주장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배신할 것이다?”
아원의 물음에 자신을 혼다 노부다케라 소개한 나고야의 무장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장군. 아무리 설득해도 저희의 말은 먹히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신분을 몰랐던 혼다 노부다케였기에 아원의 어깨 위 계급장에 수놓아진 삼태극 2개를 보고 ‘대장군’이라 부른 것이다.
그런 혼다 노부다케의 어눌하긴 했지만 제법 또박또박 떨어지는 조선말에 아원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래서 너희만 살겠다고 동료전우들을 배신했다는 소린가?”
“아닙니다. 그런 거!”
제법 강하게 반발하는 혼다 노부다케에게 아원이 빈정거리듯 물었다.
“그럼?”
“저희 병사들을 살려주십시오.”
“네 말 대로면 거꾸로 칼을 든 놈들을 살려달라는 것인데 가당치 않은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나?”
“전부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대한제국군으로 소집된 병사들만이라도 살려주십시오. 그들은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지?”
아원의 물음에 혼다 노부다케가 답했다.
“지금 소집된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대부분이 소집해제된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형제이거나 친척입니다. 호가(戶家)소집의 군령으로 인해 소집이 해제된 병사들의 집안에서 차출된 이들로 구성된 부대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한집안의 병사가 소집해제 되었으니 다른 병사를 그 집안에서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 한나라시절 중국에서 시행했던 방법으로 이후 여러 나라에서 차용해 사용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고야 왕국에선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혼다 노부다케의 말에 부장을 돌아본 아원이 물었다.
“닌 어터케 생각하니?”
아원의 물음을 받은 부장이 나서서 혼다 노부다케에게 물었다.
“대한제국군에서 근무한 적이 있니?”
“해병 109여단 3단을 지휘했었습니다.”
혼다 노부다케의 답에 물음을 던졌던 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지만 아원은 놀란 눈을 감추지 못했다.
“없다며?”
“아새끼들이 속인 모양입니다.”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조선군 장수들과 나고야군 장수들의 접촉을 줄여서 만에 하나 벌어질 수 있는 실수를 차단한 것이다.
문제는 그러면 지향뢰를 알아볼 수 있는 놈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당장 혼다 노부다케가 ‘살려달라’했던 말이 다르게 다가왔다.
“니, 왜 살려달라했니?”
유창한 한성식 조선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된 뒤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면 남간도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았던 아원이었는데 마음이 급해서였는지 대번에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그런 아원의 물음에 혼다 노부다케가 답했다.
“지향뢰. 매설 된 거 알고 있습니다.”
순간 부장을 비롯한 배석해 있던 3여단 고위 지휘관들의 눈매가 가라앉았고, 아원의 입에선 침음이 새어나왔다.
“흐음······. 대한제국군 군관 출신들이 많니?”
“모두 서른두 명입니다.”
끌려온 이들이 3명이니 스물아홉이나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입을 열기라도 하는 날엔······.
아원의 불안감을 알아차렸는지 혼다 노부다케가 재빨리 말했다.
“죽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폐하의 군관들입니다. 죽은 이들과 부상이 커서 생계가 막막했던 저희 동료, 전우들에게 조선군과 다름없이 연금을 베풀어주신 폐하를 배신할 이들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혼다 노부다케의 답에 아원의 눈빛에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솔직히 아원은 원정군에서 귀환한 제후국 병사들에게 연금을 지급한다고 했을 때 쓸데없는 낭비라고 생각했다.
제후국 병사들의 급여와 사후 보장은 각 제후국 담당이었다. 그런 이들에게까지 한정적인 재원을 풀어 위문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폐하의 혜안이었던 건가······.’
먼 곳을 내다보는 태왕 폐하의 지혜가 새삼 높이 느껴지는 아원이었다.
“좋다. 너흴 믿는다 치자. 하지만 알겠지만 지향뢰엔 눈이 없다. 골라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그들을 살펴주십시오. 대장군.”
가장 안쪽에 모여 있을 것이라니, 1차 원정군에 소속되어 있던 지휘관들이 포함되어 있다더니 지향뢰의 단점을 최대한 이용한 배치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그 말에 부장을 돌아보자 아원과 같은 생각이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애들을 보면서 지향뢰 폭발을 제어하면 아니 될 일은 아임니다만은 그러케 되면 구포는 아예 쓰지 못함다.”
당연했다. 구포가 쏘아내는 비격진천뢰는 하늘에서 아랫방향으로 쏟아지는 무기니까.
“그야 글치.”
“어카 하시겠슴까?”
부장의 물음에 자신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혼다 노부다케를 비롯한 3명의 나고야 왕국군 군관들을 지그시 바라보던 아원이 답했다.
“뭘 어째, 우리 편 죽이지 말아야지. 아군 죽였다간 폐하 손에 우리가 뒈진다. 알지 않니”
아원의 답에 부장을 비롯한 3여단 고위 지휘관들이 빙긋이 웃었고, 혼다 노부다케를 비롯한 3명의 나고야군 군관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합니다’를 현발했다.
그때였다. 경비를 서던 병사들로부터 나고야군의 이상 상황이 보고된 것이.
눈을 차갑게 빛낸 아원이 부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에게 명령했다.
“사전 작전대로.”
“충!”
군례를 올리고 흩어지는 수하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원이 잔뜩 긴장한 표정의 나고야 군관들에게 말했다.
“내 옆에 서서 적진을 똑바로 보고 말하라. 아군이 보이면 지체 없이 폭발을 중단할 것이니까. 알았나?”
다시금 한성식 말투로 돌아온 아원의 말에 혼다 노부다케를 비롯한 3명의 나고야 군관들이 힘차게 답했다.
“예. 대장군!”
“여단장이라 불러. 내 해병 3여단장이니까.”
대장군이 겨우 여단장이라는 것에 놀라는 혼다 노부다케를 비롯한 3명의 나고야 군관들의 눈빛에 피식 웃은 아원이 막사를 벗어났다.
그런 그를 3명의 나고야 군관들이 황급히 따라나섰다.
나고야 왕국군 병력이 움직인다는 보고는 3여단을 통해 동일본 정벌군 사령관이 정충신에게도 정식 보고가 되었다.
그는 곧바로 휘하 전 병력에 침묵비상을 걸었다.
‘침묵비상’은 적에게 아군이 비상상황을 인지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경계병들을 통해 조용히 전파되는 비상을 뜻했다.
이 경우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병사들도 호들갑을 떨지 않고 조용히 무장을 갖추고, 별도의 명령이 떨어지길 대기한다.
지금 같은 야간에는 모두가 잠을 자던 막사 안에서 완전 무장상태로 대기하게 된다.
그렇게 조선군 전체가 깨어나 준비를 갖추던 상황에서 나고야군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일총과 일포로 무장된 대한제국군은 가장 안쪽에 두고, 전통적인 살수무장을 갖춘 이들을 맨 앞에 세웠다.
대한제국군과 마찬가지로 일총과 일포로 무장한 1만의 병력은 도쿠가와 토시츠네의 직접 지휘 하에 그런 살수무장 부대와 대한제국군 사이에 배치되었다.
원형으로 배치했던 만큼 이동도 원형이 퍼져나가는 식이었다.
가장 선두에 섰던 전통무장 부대가 신속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살수 무장의 경우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無聲)무기 이기 때문에 초기에 자신들의 공격을 숨겨야 했던 나고야군이 선두에 세웠던 것이다.
그런 이들이 지향뢰가 매설되어 있던 지역의 한계점에 도달하자 외곽 경계를 서던 경비대원들의 호각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그 순간.
콰과과과과광.
천지를 진동시키는 폭음과 함께 지향뢰의 1차 폭발이 일어났다.
발당 1백 개의 작은 쇠구슬을 자탄으로 내장하고 있는 신형 지향뢰는 무연화약으로 구동된다. 이전처럼 폭발 후 대량의 연기로 시야가 마비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었다.
구형 지향뢰의 경우 폭발 후 발생한 연기가 빠질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점을 생각하면 확실한 변화였다.
그 덕에 시야가 명확해서 남아있는 적군들 속에서 대한제국군 병사들을 구별해 내는 것이 용이했다. 아원의 지원으로 쌍안경을 손에 쥔 혼다 노부다케를 포함한 3명의 나고야 군관이 황급히 살아남은 병사들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 고갯짓에 아원의 눈짓이 부장에게 향했고, 곧바로 부장의 명을 받은 병사들에 의해 2차 폭발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