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웅크리고 기다리는 두 맹수
동일본 영지군의 수장은 겨우 10살의 다케치요라는 아이였다.
일왕궁에서 부딪친 조선 해병대 3여단과 막부군의 전투에서 전사한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장남이었기에 가신들에 의해 추대된 것이다.
성인식을 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쇼군의 자리에 오른 까닭에 실제역사보다 이르게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 덕천가광)로 개명했다.
물론 어린 나이 때문에 영지군을 직접 지휘를 하지는 못했고,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의 존재로 인해 동일본 영지군은 나름대로 정통성을 확보한 셈이었다.
실제로 동일본 영지군을 이끌고 있던 이들은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 본다정순)을 비롯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던 다이묘들이었다.
흔히 전대 쇼군을 따르던 다이묘들이라 하여 구시대 다이묘라 불렸던 이들이 뒷방으로 물러나 앉아 있다가 위기 상황에 전면으로 나선 것이다.
그들이 동원한 20만의 대병이 아라카와강을 도강하는 중 총선과 맞닥트렸다.
에도강에서 이미 맛본 총선의 위력은 가히 무적에 가까웠다. 철제 선체와 폐쇄식 총좌는 동일본 영지군이 가지고 있는 그 어떤 화포에도 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이들의 사격은 무서울 정도로 집중적이어서 배다리 위를 달리던 수천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도륙 당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강가에 몰려있던 병사들에게도 기01 총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도강을 위해 강가로 밀집되어 있던 영지군 속으로 퍼부어진 기01 총탄 세례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순식간에 수천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각명령이 없었음에도 병사들이 총탄 세례를 피해 강가에서 도주하는 바람에 돌격명령에 따라 후방에서 강가로 밀어닥치는 이들과 뒤엉켜 군열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런 동일본 영지군을 향해 총선들이 가지고 있던 총탄을 모조리 퍼부었다. 무연화약으로 제조된 신형 총탄을 사용하는데다 구경이 크고 장약이 많아서 사거리가 1천보(약1.8km)에 달하는 기01에 의한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분의 2치(약20mm) 총탄은 한발만으로도 사람을 목불인견의 참상으로 만들어놓았다. 관통력도 커서 한발이 서너 명을 관통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쏟아진 총탄 세례로 인해 강가를 기점으로 기01의 사거리에 해당하는 1천보가 죽음의 대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현식총과 마찬가지로 분당 5백발의 발사속도를 가진 기01 20문의 사격이었다. 5분간 자그마치 5만발의 총탄이 좁은 도강지역에 쏟아진 셈이었다.
5분이라는 이 짧은 교전으로 동일본 영지군이 잃은 병력은 자그마치 8천에 달했다. 이중 1천 가량은 도주하는 병력과 도강을 위해 밀어닥친 병력이 충돌해서 뒤엉키며 덧없이 아군의 발에 밟혀죽은 숫자였다.
결국 동일본 영지군은 썰물 빠져나가듯 강가에서 물러나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모된 총탄을 보급받기 위해 총선들이 모선으로 돌아가는 것과 거의 동시에 8척의 총선이 아라카와강으로 올라왔다.
에도강에서 뒤늦게 총탄을 보급받기 위해 모선으로 돌아왔다가 임무지역 변경을 통보받고 달려온 총선들이었다.
총선들이 아라카와강에 들어와 경계 임무를 수행하자 동일본 영지군은 아라카와강을 감히 다시 도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조선군은 동일본 영지군을 아라카와강 동편에 묶어두는 것에 성공했다.
아라카와강 전투가 벌어진 다음 날, 에도 항구로 3만의 7전단 병력을 태운 11수송함대가 도착했다. 흔히 기동전단이라 불리는 7전단의 당대 전단장은 정충신이 맡고 있었다.
초대 전단장이었던 신립에 이어 자타공인 그의 제자라 불리던 정기룡이 2대 전단장을 맡아 오랜 기간 지휘를 했기 때문에 신립의 추종세력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립의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7전단이었다.
그런 7전단에 신립과는 연이 없는 정충신이 3대 전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던 것은 그가 광해의 총애를 받았던 이항복의 제자라는 점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지금은 포르투갈 총독으로 있으며 일으켰던 소위 ‘작위사태(作爲事態)’로 불리는 대 에스파냐 왕실제거 모의로 사건으로 이항복이 정계에서 물러난 상태라 뒷배가 사라진 셈이었지만 그에 대한 광해의 신임은 여전히 두터웠다.
태왕의 신임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도 상당해서 이미 포르투갈 전선에서 벌어졌던 오우렌세 전투에서 대한제국 해병대 117여단을 이끌고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텃새가 만연했던 7전단을 제대로 수습해서 잘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런 정충신이 이끌고 온 제7전단은 5개 병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제 병력은 이미 말한 대로 2만이나 부족한 3만에 불과했다.
편성률이 겨우 6할에 불과한 수준이었던 셈이다. 사실 6할의 편성률이면 후방으로 물러나 재편을 권고 받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7전단은 제대로 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채 정왜전쟁에서부터 수도 없는 실전을 치러온 역전의 용사들이 많아서 그런지 부족한 숫자에도 불구하고 부대의 군기가 엄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충신은 상륙과 동시에 동일본 정벌군의 지휘권을 확보하여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쿄만에 잔뜩 들어와 있는 이순신 함대에 구축한 2척을 남겨두고 도쿄만 외곽으로 물러나도록 명령했다.
괜히 도쿄만에 머물다가 이전처럼 자살공격조를 동원한 적의 유격전술에 함대 전체가 말려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정충신의 명령을 받은 손일원이 온조급 구축함 2척만을 남겨두고 다시 도쿄만 밖으로 물러났다.
아라카와강을 따라 배치된 55병단과 해병 3여단 병력 대부분을 뒤로 물리고, 강가 요소요서에 망루를 세워 55병단에서 1개 단을 차출해 경계 병력으로 투입했다.
그렇게 강가에서 물러난 병력과 7전단 병력을 합해 정충신은 오히려 이쪽에서 도강하여 아라카와강 동편에 대한 진공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가 받은 명령은 에도를 안정화시키라는 것이 아니라 동일본을 정벌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일본 지상 작전 지휘소의 이름도 동일본 점령군 사령부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 상태에서 정충신은 뒤로 물러난 해병 3여단에 재정비를 명했다. 일왕궁 전투에서 2천의 병력을 잃고 다수의 부상자로 가득했던 3여단의 상황을 배려한 조처였다.
전문전투 부대인 해병대가 육군의 보호아래 재정비를 해야 한다는 것에 해병 3여단의 장병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분통은 일왕궁 대치에서 막부군의 화포보유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 가깝게 부대를 배치해 두었던 여단장에게로 향했다.
장병들의 불만 이전에 전투의 과실을 알고 있었던 여단장이 해군 총사부로 전역서를 제출했다. 위기를 넘긴데다 증원군도 도착한 상태라 이젠 지휘관의 교체가 이루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에 의한 결정이었다.
해병대 총사부는 3여단장의 의견을 수렴하되 전역은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3여단장을 해병 총사부로 전출시키고 새 지휘관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와 동시에 3여단의 결원을 충원하기 위한 증강을 결정하여 실행했다.
유럽원정에서 돌아온 1차 원정군엔 해병대 훈련을 수료한 조선군 장병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 중 상당수가 군에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충원 병력구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병력을 전용할 수 있도록 태왕의 허가를 득한 해병대 총사부는 해군 근거리 교역단의 지원을 받아 10척의 조선무역선을 동원해서 3천명의 충원병력과 신임 여단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을 에도로 파견했다.
해당 수송함대를 일본 전 해역을 담당하는 3함대에서 유리급 순양함 1척과 온조급 구축함 1척을 보내 호위했다.
3일 만에 에도에 도착한 수송함대는 충원병력을 내려놓고 부상의 정도가 심한 3여단 병력 일부와 아라카와강 전투에서 중상을 당한 55병단 병력 일부를 싣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 배엔 해병총사부로 전출명령을 받은 전임 3여단장이 탑승하고 있었다. 패장의 씁쓸한 퇴장이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 새로 3여단장으로 부임한 이는 과거 대한제국군 해병대 111여단장을 역임한 아원이었다.
동일본 정벌군 사령관을 맡은 정충신과는 1차 유럽 원정군시절 대한제국 해병대 여단장으로 참여하면서 안면을 트고 있었다.
실제로 정왜전쟁에서부터 시작해 지난 전쟁에서의 전과로 인해 승진을 거듭한 아원은 계급이 이미 3품 대호군으로 대장군의 칭호를 받는 전단장급 고위 지휘관이었다.
정충신과 같은 품계의 무관이라는 뜻이다. 그런 이가 여단장으로 참전하게 된 것은 해병대의 고질적인 승진적채현상 때문이었다.
계급은 올라가는데 고위 지휘관들이 맡을 직책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2품이 맡는 총사 밑에 정식 3품 무관이 맡을 자리는 부총사와 해병원정여단과 해병강습함대를 모두 지휘하는 해병강습함대 제독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단장뿐이다.
따라서 상령으로 불리는 5품 사직의 무관들이 맡아야 할 여단장 자리 7개 중 4개를 3품 대호군들이 맡고 있을 정도로 해병대의 인사적채가 심각했다.
이순신이 해병대의 그 인사적채를 해소하기 위해 고위 지휘관들을 육군으로 전보하는 안을 제시했지만 해당 지휘관들이 강경하게 거부했다.
차라리 강등을 당하면 당했지 해병대를 떠날 수 없다고 버틴 것이다.
그렇다보니 5천으로 이루어진 여단을 지휘하는 아원이 1만의 병력을 지휘하는 55병단장이나 7전단 소속 병단장들보다 높은 직급이 되어버렸다.
그 상황에 쓰게 웃으며 아원을 맞은 정충신이 하오체를 사용했다.
“어서 오시오. 아 대장군.”
“말씀 낮추십시오. 사령관은 대장군 이십니다.”
기마병단에서 시작해 산악전단으로 다시 해병대로 군기가 강하기로 소문난 부대에서만 근무해서 그런지 아원은 대장군이라는 높은 직책에도 불구하고 군기가 칼날 같았다.
그런 아원에게 정충신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감사하오이다. 내 대장군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충심으로 받들겠습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지휘권이 확립되자 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드세기로 소문난 해병대, 그중에서도 3품의 무관이 여단장으로 온다기에 지휘권 충돌을 우려했던 것이다.
걱정했던 부분이 해소되자 동일본 정벌군 지휘부는 공략 계획을 세우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세워진 공략 계획은 조금 어정쩡했다. 확실한 공략을 주장하는 55병단이나 7전단 소속 병단장들과 달리 정충신과 아원은 느슨한 압박 전술을 택했기 때문이다.
3품 대호군 둘이 똑같은 생각이니 불만이 있어도 병단장들은 속으로 애써 삭히며 각자의 부대로 돌아갔다.
다만 아원만이 정충신의 요청으로 남았다.
그런 아원에게 정충신이 자신의 짐 속에 감춰뒀던 술병을 꺼내 보였다.
“한잔 하시겠소?”
“좋지요. 전장에서의 한찬은 투지를 불러일으키니.”
수하들이 들었으면 기겁을 했을 이야기였다. 실제로 이 두 사람도 전장에서 음주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는 이들이기도 했고.
그런데 웬일로 정충신이 술을 권했고, 아원은 두말없이 받았다.
그렇게 받은 잔을 단숨에 들이켠 아원이 소리를 냈다.
“크······. 역시 술은 철관음이지요.”
뜻하지 않게 녹차의 한 종류가 거론되자 정충신이 히죽 웃었다.
“암요. 술이다 생각하면 차도 술과 같으니, 으하하하.”
1차 원정군에 속했던 대한제국 해병대 지휘관들의 놀이이자 향수병을 달래주는 한 가지 방편이 바로 조선에서 보급품으로 보내진 하질의 철관음으로 우려낸 녹차를 술병에 담아 먹는 것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술을 먹을 수는 없고, 기분을 내며 조선에서 마시던 차로 향수를 달래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서로 그렇게 차 한 잔씩을 마시며 웃은 정충신이 아원에게 물었다.
“이번 전쟁,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번 작전에 동의하신 것을 보면 대장군도 제 생각과 비슷해 보입니다만은······.”
“뭐, 뻔한 거 아니겠습니까? 전투라면 귀신도 울고 간다는 이순신 원수가 별다른 작전지휘도 없이 동일본을 정벌하라 명령했다는 것과 그것을 전쟁이라면 어지간한 장수들보다 더 훤히 꿰뚫고 있는 태왕 폐하께서 그대로 수용하셨다는 것은 다른 패가 준비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전 며칠 전 참전한 나고야 왕국을 유심히 지켜보는 중입니다.”
“저 역시 문제의 열쇠는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서로의 생각을 확인한 두 대장군들이 씨익 웃으며 찻잔을 부딪쳤다.
“제대로 된 전투를 위해!”
“위해!”
단숨에 찻잔을 비운 두 대장군의 눈빛들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고 웅크리고 있는 맹수들의 눈빛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