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뿌리 깊은 분노
조선 정부는 동일본에 대한 향후 대응 수위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외교부조차 한성 조약을 다각도로 검토했지만 마땅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조회에서 광해는 이외로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해 대신들을 놀라게 했다.
“반란이다. 대역죄는 그에 따른 죄과를 치르는 법. 반란의 본보기로 동일본을 무너트려 조선의 강토로 삼는다.”
“폐하의 결정이 지당하시옵니다.”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광해의 의견에 동조했다. 제후국의 보존에 크게 신경 쓰던 광해였기에 걱정했던 것일 뿐, 이처럼 과감한 결정이라면 대신들은 반대할 생각이 일말도 없었다.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면 모를까.
대전 조회의 결정에 따라 원수부에 명령이 떨어졌다. 대한제국의 종주국인 조선에 대한 반란이 어떤 결과를 얻게 되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라는 태왕의 지엄한 황명이 내려진 것이다.
그 황명과 함께 광해의 특명으로 동일본 정벌 작전의 지휘권이 최고 사령부에서 원수부로 이관 되었다.
그에 따라 조회에서 물러나온 이순신이 곧바로 원수부의 고위 지휘관들과 참모들을 소집했다.
원수부 참모들은 물론이고, 각 군 총사부의 부총사들이 모두 원수부 통합지휘소로 출석했다. 그렇게 모인 원수부 인원들과 함께 본격적인 동일본 정벌 작전의 골격을 세우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격렬한 토의가 벌어졌지만 마땅히 동원할 만한 전력이 없었다.
제후국 하나를 도모하면서 본토의 방어력을 적정선 이하로 낮출 수는 없었다. 자칫 그것이 생각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만주 4도에 주둔하며 북원과 할하를 경계하는 2전단도, 서부 3도에 주둔해서 후금과 명, 남진을 경계하고 있는 3전단도 빼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유사시 증파전력이자 본토 방어병력인 1전단을 빼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뜩이나 주둔 지역이 많아서 항상 병력이 부족하다고 호소하던 5전단을 빼내서 동일본으로 보낼 수는 더더욱 없었다.
결국 남는 건 7전단뿐인데 완편에서 2만이나 부족한 그들은 이미 동일본으로 투입한 상태였다.
거기다 해병대는 동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병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조리 북미 대륙 서부 점령 작전에 투입되었거나 대월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대규모 전투를 위해 동원 가능한 병력이 없다는 동일본 지휘부의 판단이 맞았던 것이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러다 자칫 유럽이나 인도양의 한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구원할 병력 자체를 보낼 수 없을 지경에 처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원수부를 덮쳤다.
그간 조선군은 두 개의 전장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를 수 있는 편재를 유지했다. 실제로 지금 북미와 대월, 두 군데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니 여유가 없는 것이 타당한 것인데 선뜻 그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원수부는 조선 본토의 방어력 약화를 감수하고서 1전단에 속한 5개 병단 중 2개 병단을 빼내 동일본으로 투입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렇게 되면 1전단은 이미 대월전선에 파병한 15산악병단을 위시해 3개 병단을 외부로 돌리게 되는 셈이었다.
그 계획안을 가지고 이순신이 광해에게 알현을 청했다. 본토 병력의 이동은 아무리 지휘권이 원수부로 넘어왔다고 해도 태왕인 광해의 승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광해는 조선군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설명 받고, 그로인해 어쩔 수 없이 본토의 병력으로 마련한 원수부의 계획안을 보고 받았다.
그 보고를 모두 들은 광해가 이순신에게 물었다.
“이 원수.”
“예. 폐하.”
“나고야를 신뢰하시오?”
생각지 못한 물음이었던지 이순신은 얼른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광해가 물었다.
“믿음이 가지 않았던 모양이구려.”
광해의 물음에 이순신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남진만큼이나 장군(다이묘)들의 입김이 강한 나라인데다 아직 왕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곳이라서······. 송구하옵니다.”
“경이 송구할 것이 무엇이겠소. 그들의 실상이 그러한 것은 이미 아는 것을.”
“하온데 어이 하여 나고야에 대해 물으시옵니까?”
“가장 가까우니 병력을 동원하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질 않나 싶어서 말이오.”
실제로 이번 사태가 터지자마자 나고야 왕국은 황명이 떨어진다면 자신들의 병력을 직접 동일본으로 투입할 수 있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었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광해가 지금처럼 묻는다면······.
“나고야가 병력 파병을 핑계 삼아 동일본을 흡수고자 나설까 걱정이 되시는 것이옵니까?”
“그것도 문제겠지만 짐은 나고야가 동일본의 세력과 손을 잡고 사태를 더 키울까 걱정이 되는구려.”
“하면 이번 반란 사건에 나고야가 발을 담근다는 것이 온데, 그들이 그렇게 까지 위험을 감수하리라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욕심은 가끔 눈을 흐리는 것이니······.”
하긴 조선이 동원할 병력이 부족해서 손을 내민다는 것을 알게 될 나고야가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을 터였다.
태왕의 걱정이 그냥 기우만으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던 이순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수 있다는 우려는 소신도 드옵니다. 하오나 폐하. 소신이 감히 여쭙건대 그리 되었을 때, 무엇을 걱정하시는 것이옵니까?”
“무엇을 걱정하냐라······?”
전쟁이 커지면 그 와중에 죽어나갈 병사들이 걱정이고, 무고하게 생명을 잃어야 하는 백성들이 또한 걱정이었다. 광해의 그런 걱정을 모를 이순신도 아니었으니 질문의 의도가 그 방향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이순신은 아마도 광해에게 다른 방향에서 사태를 바라보길 원해서 그와 같은 질문을 던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곰곰이 사태를 되짚어보던 광해의 눈이 커졌다.
“이참에 명분을 세운다?”
눈을 크게 뜬 광해의 물음에 이순신이 담담히 답했다.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조선은 북부와 서부, 또한 남부까지 제후국으로 둘러싸인 형국이었나이다. 거기다 북미 대륙에 북미연합국 마저 제자리를 잡으면 완전히 제후국들에게 둘러싸이는 형국이 될 것이옵니다. 그러니 이참에 차라리 명분을 세우시어 남부를 장악하여 제후국과 상관없이 조선이 외부로 나갈 길을 여소서.”
이순신은 지금 일본 열도의 완벽한 점령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점령 민족의 독립 국가를 제후국으로 유지시켜 독립을 열망하는 무리들의 탈출구를 열어두는 기존의 점령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에 얼른 답을 하지 못하는 광해에게 이순신이 말했다.
“힘 있는 자에게 굽히고, 약한 자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못된 습성이 몸에 배인 이들이 왜인들이옵니다. 강한 힘으로 치시고, 그보다 강한 위엄으로 누르소서. 감히 맞서지 못할 것이옵니다.”
솔직히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점령지 분쟁은 피점령지민들을 방금 이순신이 말한 형식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벌어졌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광해는 불가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왜인들에게 갖는 한국인, 아니 조선인의 분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득했기 때문이다.
가능한 중립을 유지하려 애를 썼던 광해조차 왜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상당히 깊게 남아있었으니까. 다만 자신의 치세에서 그것을 평화적으로 바꿀 기회가 되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아니 될 모양이었다.
결국 작은 포기의 한숨을 내쉰 광해가 이순신에게 물었다.
“그렇게 강한 힘으로 치자면 1전단의 두 개 병단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닐 터.”
“폐하께오서 결심을 세우신다면 원수부는 본토병력에서는 추가 파병을 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나고야 병력의 투입을 요청하라는 소리로군.”
“그러하옵니다. 나고야 병력이 투입되면 윤곽이 드러날 것이옵니다. 저들이 폐하께 한 충성의 맹세를 지킨다면 그것으로 좋은 일일 것이고, 만에 하나 우려하시는 대로 배덕의 칼을 든다면······. 조선군은 전력을 기울여 저들을 휩쓸어 버릴 것이옵니다.”
“전력이라······. 예비군을 동원하자는 소리겠구려.”
“50만 예비군 중 절반이상이 정왜전쟁 유경험자들이옵니다. 일본 열도에서의 작전에 누구보다 적응이 빠를 것이오니 최적의 증원 병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자신하옵니다.”
자신감 충만한 이순신의 말에 광해가 잠시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말에 동의하리다. 대신 예비군 훈련을 강화하시오. 준비를 조금이라도 한다면 덧없이 죽어나가는 백성들의 수는 덜 할 터이니.”
“비상 훈련이란 말로 닦아 세워두겠나이다.”
“그 일엔 짐의 이름을 팔아도 무방할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를 숙이는 이순신을 바라보는 광해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또 다시 백성들을 큰 전쟁으로 몰아넣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궐에서 물러나온 이순신이 원수부 참모들과 함께 해당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순신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고야가 충성맹세를 어기지 않았을 때와 어기고 배덕의 칼을 들었을 때, 두 가지 경우를 두고 도상연습을 수차례 진행하여 문제점을 찾아내 보완한 뒤, 완성된 계획이 광해에게 보고되었다.
그런 일련의 일이 진행된 것이 겨우 단 하루하고 반나절만의 일이었다. 소집부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36시간 동안 원수부의 참모들 중 누구도 잠을 자지 못한 채 얻어낸 결과였다.
그 계획안을 광해가 승인했다.
곧바로 광해의 명을 받은 외교부에서 대한제국 황명으로 나고야 병력의 동일본 진입을 요구했다. 나고야 왕국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그마치 5만의 병력을 곧바로 출병시켰다.
이 5만의 병력에는 유럽에서 귀환한 후 해산한 병력이 가지고 있던 일총과 일포로 무장한 신규 대한제국군 1만도 포함되어 있었다.
훈련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그들까지 동원할 정도로 나고야는 이번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대서양군에 동원된 2차 원정군 병력은 11월 초에 퀘벡을 떠나 12월 말에 조선으로 도착할 예정이었다. 광해는 그들이 퀘벡을 떠나기 전에 동일본 사태가 일단락되길 바랐다.
*****
나고야 병력이 출병한 바로 그날이, 동일본 영지군이 아라카와강을 건너기 위해 총공세로 나온 날이었다.
영악하게 도강 위치를 선정한 동일본 영지군이 강가로 노도처럼 밀어닥쳤다. 뗏목을 밀기 위해 강물로 뛰어든 영지군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강 건너 산속으로 들어간 해병과 55병단 병사들의 사격이 이루어졌다. 특히 현식총 사격이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문제는 도강지역이 집중된 것에 비해 현식총은 넓게 산개되어 있어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과 달리 저지 효과는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역사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 다수의 기관총을 가지고서도 미군이 밀려야 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순식간에 뗏목이 다리처럼 연결되자 그것을 밟고 동일본 영지군 병력이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하구에서부터 총선들이 올라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총선은 선수와 선미에 폐쇄식 기01 총좌를 가지고 있었다. 해당 총좌는 작은 확인창 외에는 모조리 강철 장갑판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시야에 제약을 받긴 해도 사수의 피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아울러 조종실도 신형 증기철선들처럼 전투 시엔 강철 장갑판으로 조종실 창문을 뒤덮는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 해군의 주력함인 신형 증기철선들의 함교 장갑판과 다른 점이라면 완전 밀폐식이 아니라 조타수가 위치하는 구역엔 작은 확인창이 뚫려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피탄률을 낮추기 위해 확인창은 조타수의 시야와 수평으로 뚫려있는 것이 아니라 한참 위에 존재했다.
조타수는 그 높은 위치의 확인창과 연결된 잠망경을 통해 앞을 확인하고 조타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전투 작전이 그런 상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총선의 조타수들은 좁아진 시야에 대한 적응 훈련을 상당히 강도 높게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에도강에서의 작전에서도 조타 실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라카와강에서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