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총선(銃船)
손일원은 동일본 함대로부터 도쿄만에서 받았던 비열한 기습공격에 대한 응징으로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왕무급 호위함들을 모조리 격침시키고, 동일본 함대 계류지 일대를 무차별로 포격하여 해군 시설을 모조리 파괴했다.
그럼에도 손일원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함장들을 비롯해 이순신 함대의 노련한 함교요원들 중 삼분지 일가량을 잃었고, 대파된 2척의 구축함을 비롯해 자살폭탄 공격을 받았던 5척의 함선이 모두 수리를 받아야 해서 전열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건재했던 충무05함도 함교의 수리를 위해서는 거제 건선단지로 입거(入渠)해야 해서 도쿄만에 정박 중이던 6척의 함선 모두가 전열에서 이탈했다.
긴급야전수리를 마친 충무05함을 비롯한 4척이 대파된 2척의 구축함을 견인한 채 도쿄만을 떠나 거제로 향했다.
이순신 함대의 기함인 태조급 전함, 충무01함의 함교에서 그렇게 도쿄만을 떠나고 있는 동료함들을 바라보는 손일원의 눈이 불길이 이는 듯 했다.
그는 곧바로 해군 총사부로 전문을 넣어 총선모함의 파견을 요청했다.
총선(銃船)은 내연기관을 장착한 작은 배에 신형 기관총인 ‘기01’ 2정을 탑재한 것으로 말하자면 무장 고속단정(高速短艇)이다.
물론 말이 고속단정이지 현대 시대처럼 40노트를 넘어서는 빠른 속도를 가진 것은 아니고 그저 지금 시대에 운영되는 소형 선박들 중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비행선용으로 개발된 2백 마력 내연기관을 개량한 선박용 내연기관은 20노트라는 제법 빠른 속도를 총선에 부여했다.
섬이 많은 남해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소형선박의 특성상 높은 파도에선 전복위험으로 운용상 에로사항이 많아서 단기 작전을 수행하고 복귀할 수 있는 모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에 따라 거제 건선단지는 고왕급 비행선모함 이전에 만들어졌던 항공모함 시험선을 개조하여 총선모함을 만들었다.
선 중앙의 좌우측에 대형 기중기를 설치하여 총선을 싣고 내릴 수 있게 만들고 갑판에 총선을 계류시킬 수 있는 장치를 설치했다.
아울러 승강기도 약간의 개조를 거쳐 격납갑판으로도 총선을 이동시킬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개조된 총선모함은 우연하게도 비행선의 크기와 총선의 크기가 비슷해서 기중기 설치로 인해 소비된 공간을 제외하고 모두 18대의 총선을 실을 수 있었다.
이 총선모함이 남해와 제주일대를 관할하는 1함대에 배치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손일원이 그 배를 요청한 것이다.
물론 바다에서 운용하기 위한 요청은 아니었다.
손일원은 총선들을 아라카와강으로 들여보내 내륙 깊숙이까지 해군의 화력범위를 넓혀 동일본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 고안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손일원의 요청은 해군총사부 참모들의 지지를 받았다. 해군총사부의 고위 지휘관들도 이순신 함대가 받았던 공격에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해군총사인 우치적이 해당사항을 곧바로 원수부와 최고 사령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청했다.
강에서 총선을 운영해보겠다는 발상에 광해와 이순신이 동의해서 실행을 명령했다.
그렇게 1함대에서 총선모함이 동일본을 향해 출발한 것이 도쿄만 공격사건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때는 일왕궁에서 해병 3여단과 막부군이 전투를 막 끝낸 시점이었고, 7전단과 11수송함대에 서두르라는 태왕의 명령이 떨어졌던 바로 그때였다.
남해 근해에 있던 총선모함이 도쿄만까지 도착하는 것에는 이틀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막대한 연료의 소모를 각오하고 25노트(약46km)의 최고속도로 항진한 결과였다.
이것은 막 55병단이 에도에 도착해서 해병 3여단과 함께 아라카와강에 저지선을 설치하던 시기였다.
손일원은 지상군의 작전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총선을 아라카와강으로 들여보내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에도강으로 그 목적지를 바꿨다.
양쪽으로 약간의 농경지와 산지를 끼고 있으면서 작은 마을들이 강을 따라 건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일본에 출혈을 강요하기에는 아라카와강만큼이나 효과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내 총선모함에서 18척의 총선이 모조리 내려졌다.
기01 총탄을 만재한 총선들이 일제히 도쿄만과 접한 하구를 통해 에도강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보이는 마을은 모조리 파괴하라는 것이었다.
포가 아니라 건물파괴의 효과는 덜하겠지만 3분의 2치(약20mm)에 달하는 구경을 보유한 기01의 탄환은 어지간한 목조건물은 순식간에 넝마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은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최근 발화불질을 탄두에 발라 만든 소총용 소이탄이 개발되어 공급되고 있었던 덕에 목조건물에 화재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수백발의 총격보다 목조건물에는 불이 훨씬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손일원은 총선에 가능한 많은 수량의 소이탄을 탑재하도록 했다.
그 총선들이 에도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마을이란 마을은 보이는 족족 무차별로 사격하여 파괴했다.
인명살상도 상당한 수준에서 벌어졌지만 손일원의 예상대로 소이탄에 의한 화재로 인한 피해가 막대했다. 목조건물들에 붙은 불길이 마을 전체로 번져나가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초기에 화재를 진압해야 했지만 총선들의 사격으로 인해 사람들이 불을 끄기보다는 몸을 숨기는데 정신이 없었던 까닭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일련의 상황은 동일본 영지군에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사실 동일본 영지군은 경비가 강화된 아라카와강이 아니라 에도강 주변의 산을 따라 이동 중이었다. 다수의 병력이 이동하고 있었지만 움직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식량을 최소만 가지고 출발한 탓에 강가의 마을들에서 다수의 식량을 징발하여 충당하고 있었다.
한데 그렇게 식량원이 되어주던 마을들이 총선의 공격을 받아 잿더미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더구나 하구 일원의 몇몇 마을만 공격받았다면 어려워도 어떻게 상류 쪽에서 식량을 조달했겠지만 총선들은 그 빠른 속도를 이용해 순식간에 상류지역까지 공격해서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총선들의 공격에 놀란 동일본 백성들이 에도강가에서 황급히 물러났다.
얼핏 사람의 그림자만 보여도 총탄이 비 오듯 쏟아지니 강가로는 접근 자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본 영지군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식량을 수습해 보기 위해 불타버린 마을로 접근하다 총선에 발견된 영지군 병력 수십 명이 벌집이 되어 죽은 경우도 나왔다.
선수와 선미에 각기 한정식의 폐쇄식 기01 총좌를 가지고 있는 총선은 3분의 2치(약20mm) 총탄을 분당 1천발씩 퍼부을 수 있는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선들의 갑작스런 등장 이후 산속으로 이동하던 동일본 영지군의 식량사정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사실 동일본 영지군은 에도강변의 산지를 따라 내려와 하구 인근에서 뗏목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재빨리 에도강을 건넌 후, 진격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 계획 전부가 총선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틀 째 제대로 된 식량지원을 받지 못한 영지군은 심각한 상황에 처하고 있었다. 훈련도 사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농민군 수준의 영지군이 굶기까지 하자 통제력이 형편없이 낮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밥을 지을 쌀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애써 숨어있는 상황에서 불을 피운다는 것은 조선군 비행대에 자신들의 위치를 발각시키는 꼴이었던 까닭이다.
결국 동일본 영지군을 지휘하는 이들은 산을 버리고 벌판으로 나왔다. 에도강 쪽으로는 총선들의 위협이 상존했기에 이들이 진출한 지역은 아라카와강이 보이는 쪽이었다.
비로소 조선군 비행대가 동일본 영지군의 위치를 파악하는 순간이었다.
55병단 비행대와 해병 3여단 비행단 모두에게서 적군의 위치 확인 정보를 받은 동일본 지상 작전 지휘소에선 곧바로 정찰대를 내보내 도강 위치를 파악하도록 했다.
계급 상 동일본 지상 작전 지휘소의 소장은 55병단장이 맡고 부소장을 해병 3여단장이 맡고 있었다.
이런 체계는 조선군의 전시 작전규칙에 성문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군종, 또는 병종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합작전 지휘에 불협화음이 발생하지 않았다.
55병단장도 7전단이 도착하는 순간 자신의 지휘권이 7전단장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기 보다는 부소장인 해병 3여단장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작전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구축된 아라카와강 저지선은 제법 단단했다. 도처에 배치된 현식총과 병사들의 경계망이 제대로 형성된 까닭이었다.
그것은 경계임무를 주임무로 삼는 주둔군인 55병단 병사들이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는 지역을 귀신같이 선정하여 경비 초소를 건설하고, 망루를 세운 덕이었다.
참호에 숨어 대가리만 내밀고 총을 쏘는 육군의 작전 방식을 빗대어 땅개라 비웃던 해병대 병사들이 육군의 능력에 새삼 놀라는 계기였다.
영지군은 에도강 동편 지역을 장악한 상태로 아라카와강을 도강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산에서 나무를 해와 배다리를 만들 뗏목을 대규모로 만드는 모습이 비행대에 목격되기도 했다.
위장전술을 위해 아라카와강 상류지역에 배치해 두었던 3만의 병력도 집결지로 내려와 합류했다. 20만에 달하는 동일본 영지군 병력이 아라카와강 건너 들판에 득실거렸다.
이제 반나절만 지나면 7전단이 에도에 상륙하게 된다.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조선군에 비상이 발령되었다. 동일본 영지군이 아라카와강을 향해 노도처럼 밀어닥친 것이다.
대규모 도강이 가능하려면 강 양쪽으로 상당한 넓이의 평지가 존재해야 한다. 도강전의 부대를 규합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고, 도강 후에는 군열을 정비할 공간이 또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강의 상례였다.
하지만 동일본 영지군은 그 상례를 깼다. 도강 전에 부대를 규합할 공간은 있었지만 도강 후 군열을 재정비할 공간이 전혀 없는 지역을 향해 도강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방어를 해야 하는 조선군으로써도 상당히 불리했다. 겨우 일, 이보 남짓한 강돌 밭만을 보유한 강가에 배치할 수 있는 조선군의 수에 큰 제약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특히 큰 바위가 없는 강돌 밭은 방어하는 조선군 병사들을 완전히 노출시켜서 도강하는 적이 건너편 강가, 또는 뗏목에서 이쪽을 향해 발사하는 무기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 우왕좌왕하는 육군 55병단 병사들을 이끌고 강가 산속으로 들어간 해병들이 강을 바라보며 사격을 가했다.
대기하고 있던 포병대가 도강지역으로 급속 기동을 시작했지만 좁은 강돌 밭에 포병을 배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해당 상황이 비행대의 열기구를 통해 지상 작전 지휘소로 전달되었다. 55병단장은 고심 끝에 도쿄만에 정박해 있던 이순신 함대로 지원을 청했다.
55병단장은 이순신 함대가 해안가로 최대한 가까이 붙어 함포사격을 해주길 원했던 것이지만 그 요청을 받은 직후 전달받은 정찰 결과상 동일본 영지군이 도강을 시작한 지역은 함포의 도달거리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위치였다.
시험사격에서 보인 최대사거리 언저리라 바람을 잘 타면 아슬아슬하게 도달할 수도 있는 거리이긴 했지만 열 발을 쏘면 한발이나 도달할까 말까했다.
더구나 그렇게 도달한 포탄도 넓은 도강 지역의 좌측 끝단에 살짝 걸칠 뿐이었다. 그것을 바라고 포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마침 그때 소모된 탄을 보급받기 위해 총선 10척이 도쿄만에 정박 중인 총선모함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보고받은 손일원이 곧바로 해당 총선들을 아라카와강으로 진출하도록 명령했다.
손일원의 명령에 급히 총탄만 재보급 받은 총선들이 빠른 속도로 아라카와강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