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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49화 (249/325)

제249화. 동일본 영지군의 꼼수

나구모 함장은 천천히 가라앉는 전열함에서 동료함들을 향해 마구 함포를 쏘아대는 유리급 순양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단 한척의 함선이 가로막은 바다를 20척의 전열함이 뚫지 못했다. 한때 바다를 지배했던 해모수급 전열함이 보여주는 모습이라 믿기 어려웠다.

아니, 그만큼 유리급 순양함의 파괴력이 컸다.

수병들이 아우성치며 배를 버리고 탈출하는 가운데 나구모 함장은 멍하니 서서 지난 날 들을 떠올렸다.

조선의 영광을 일본인들의 영광으로 확대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나라, 그중에서도 일왕이 건재한 동일본으로 귀화했다. 조선군내에서 차별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귀환한다는 말을 했을 때 배신자라는 비난도 없었다.

조선의 동료들은 그렇게 떠나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잘 살라는 축복의 말을 건넸었다. 그렇게 옛 동료들의 배웅까지 받으며 떠난 조선에 배은망덕하게 칼을 들이민 결과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에 허탈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함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 한다는 오래된 전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쉬고 싶었다.

차갑게 올라오는 바닷물의 감촉이 종아리를 적셔왔다.

쐐앵.

소름끼치는 소음을 끌고 포탄이 날아오는 것이 나구모 함장의 눈에 보였다. 신기하게도 그 포판이 자신을 정확히 맞출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온전히 죽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마 배신의 대가인 모양이라고 생각한 나구모 함장이 눈을 감았다.

쾅!

주돛대를 일장함포 포탄이 정확히 명중했다. 주돛대를 붙잡고 서있던 나구모 함장의 모습도 부러져 꺾이는 주돛대와 함께 화염에 휩싸여 보이지 않았다.

20척의 해모수급 전열함은 충무05함을 넘지 못했다.

충무05함의 포격도 거셌지만 함교가 날아가고 자살특공대의 폭발 공격에도 버티고 떠있는 함선들의 반격이 그만큼 거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조선군 함선에도 피해가 컸다.

특히 자살 특공대가 함 뒤쪽을 집중적으로 노린 까닭에 3척의 온조급 구축함은 기관부에 물이 들어차는 바람에 구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여러 개의 수밀구역으로 이루어진 함선의 구조 덕에 침몰은 면했지만 자력으로 이동하기는 어려워진 셈이다.

그렇게 함선의 피해보다 고위 지휘관들의 피해가 심각했다.

4척의 구축함과 1척의 순양함의 함교가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파괴된 바람에 그 5척의 함장과 고위 장교들이 떼죽음을 당한 까닭이었다.

충무05함이 보고에 곧바로 달려 들어온 나머지 이순신 함대의 함선들이 어슴푸레 밝아오는 도쿄만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쿄만에서 동일본 함대가 이순신 함대를 향해 기습공격을 벌였다면, 비슷한 시간 육지에선 일왕궁 앞에서 대치중이던 해병 3여단에 막부군이 총공격을 퍼부었다.

자그마치 4만에 달하는 막부군이 5천의 해병 3여단을 향해 맹공을 가한 것이다.

고전적인 석화시와 대조총부터 홍이포, 거기다 일포까지 막부군이 보유한 화포란 화포는 모조리 동원된 포격전이 기습적인 공격의 서막을 열었다.

4백문에 가까운 이 화포 공격에 조선군 해병 3여단은 150문의 삼포와 124문의 구포, 그리고 280정의 현식총으로 맞섰다.

화력은 조선군 해병 3여단의 명확한 우위였다. 정확도, 사거리, 포탄의 파괴력까지 모두가 해병 3여단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양측의 대치 거리였다.

겨우 2백보(약363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일왕궁을 장악한 막부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던 까닭에 막부군의 화포 공격이 고스란히 해병 3여단에 쏟아졌다.

파괴력이 적다고 사람이 죽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범위가 작다지만 폭발반경에 있던 해병들은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적과의 교전 가능성을 알면서도 충분한 거리를 벌리지 않은 해병 3여단 지휘부의 안이한 대응이 불러온 피해였다.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해병 3여단 장병들은 물러서지 않고 대응했다. 마치 마주서서 서로의 안면에 강펀치를 연속해서 날리며 누가 먼저 나가떨어지는지 겨루는 모양새였다.

피해는 막부군이 훨씬 심각했다. 특히 구포로 발사되는 공중폭발탄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일왕궁의 담에 몸을 숨겼어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쇠비는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삼포의 작렬탄 공격은 일왕궁의 성벽을 뒤에 숨은 병사들과 함께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결정적으로 포격의 속도가 막부군에 비할 수 없이 빨랐다. 후장식인데다 흔히 통산탄이라 불리는 포탄, 장약 일체형의 금속탄피형 작렬탄을 사용하는 조선군 포병의 재장전 과정이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간결했던 까닭이다.

거기다 280정의 현식총이 고개만 들면 총탄을 퍼붓는 통에 막부군 병사들은 담장에 몸을 숨긴 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렇게 보병이 고착된 상황에서 조선군 포병은 정확한 대포병 사격으로 막부군 포대를 빠른 속도로 제거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다 막부군 포대가 모조리 격파되고 나면 더 꼼짝 못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되었다간 총 한 번 못 쏴보고, 칼 한번 못 휘둘러보고 몰살당할 것이라고 판단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결심을 굳히고는 크게 외쳤다.

“토츠게키(突撃, 돌격)!”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외침에 다이묘들이 연달아 ‘토츠게키’를 외쳤고, 곧바로 커다란 함성과 함께 막부군 병사들이 담장에서 일어서 뛰쳐나왔다.

와아아.

하지만 그 함성은 곧바로 비명들로 뒤덮여버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현식총들이 일제사로 병사들을 긁어버린 것이다. 막부군 병사들이 일어서 달려 나오는 족족 현식총이 훑고 지나갔다.

자그마치 분당 14만발의 총탄이 빗발쳤다. 그런 밀집사격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막부군 병사들이 황급히 다시 왕궁의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 담을 향해 해병 3여단의 삼포들이 불을 뿜었다.

전투는 4시간 만에 끝이 났다.

막부군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채 저항하다 모두 전사했다. 그런 악착같은 저항 때문에 해병 3여단의 피해도 컸다.

전사자가 2천에 달했고, 부상을 입지 않은 이가 드물 정도였다. 양측의 포격전이 그만큼 거칠고 사나왔다는 뜻이다.

반란이 본격화 된 것이니 서둘러 지방 영지들이 병력을 모으기 전에 진압에 나서야 했지만 해병 3여단은 추가 작전을 펼칠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해병 3여단의 보고에 조선군 최고 사령부는 7전단과 11수송함대에 서두르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아직 7전단은 부산포에 집결을 끝내지도 못했고, 대월 전선에서 돌아오고 있는 11수송함대는 이제 겨우 상해 앞바다를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광해가 나고야 왕국에 조선군 55병단의 진출로를 열라는 황명을 내렸다. 직후 대판(오사카)으로 집결하고 있던 55병단에 출병 명령이 떨어졌다.

서남도의 서쪽 끝인 시모노세키에 주둔해 있던 예하 553단이 아직 집결지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55병단은 명령을 받자마자 곧바로 출병했다.

조선 전군이 이미 기마대와 기동보병대로 기동화 되어 있었던 까닭에 이들의 이동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전시 고속기동의 경우 기동화 된 조선 육군은 하루에 3백리(약118km)를 주파한다. 과거 유럽 원정에 나섰던 몽골 기마대의 하루 이동속도가 151km에 달했다는 기록에 비하면 다소 느리다지만 상당수의 마차를 동반한 상황에서 보인 이동속도로는 가히 전광석화에 비견될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관서도의 대판(오사카)과 동일본의 에도간 거리를 감안하면 55병단이 도착하기 위해서는 최소 3일, 최대 4일이 소요될 터였다.

이시기 동일본의 지방 영지들은 대규모의 병력동원에 나서있었다. 조선군의 화력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숫자의 명확한 우위뿐이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그에 따라 12개 다이묘 영지에서 닥치는 대로 병력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병자고 뭐고 일단 사내면 무조건 징집되어 칼과 창을 쥐어줬다.

종래엔 철재 무기가 모자라자 대나무를 깎아 죽창을 만들어 지급했다. 그런 일련의 노력 덕이었는지 이들이 3일간 모집한 병력은 자그마치 20만에 달했다.

사기, 전투력, 그런 것은 장담할 수 없었지만 숫자만큼은 명확히 조선군을 압도했다.

병력을 모은 지방영지들은 곧바로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와 함께 본거지로 삼고 있던 사이타마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사이타마는 과거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유민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이 존재하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동일본 어디보다 발전이 빠르고, 적응력도 좋았다.

지금이야 고구려와 신라 유민이 시조였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그들은 자신들이 조선인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긴 그런 것에 얽매이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고구려 유민들이 이 땅에 들어온 지도 이미 천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결을 마친 동일본 영지군이 다시 막부의 깃발을 휘날리며 에도로 진군했다.

그런 그들에겐 불행이겠지만 다행히 이때엔 조선 육군 55병단이 막 에도에 도착한 직후였다.

해병 3여단의 잔여병력과 합류한 55병단은 에도와 사이타마를 가르는 아라카와강에 저지선을 설정하고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현재 7전단을 실은 11수송함대가 동일본을 향해 전속으로 항진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오늘만 넘기면 조선군은 3만에 달하는 증원 병력을 얻게 될 터였다.

더구나 7전단은 기마병과 보병은 완편에 비해 2만이나 부족했지만 포병은 완벽하게 숫자를 채우고 있어서 5개 병단급 포병대를 온전히 보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강을 방어선으로 삼은 조선군에게 확실한 이점을 제공할 터였다.

문제는 그 하루의 시간이었다. 이미 20만의 영지군이 강 건너에 도착해 도강 위치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라카와강을 저지선으로 삼은 조선군 해병 3여단과 55병단은 포병을 아직 전개시키지 않은 채 모두 말에 묶어둔 채 대기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라카와강을 따라 분산 배치했을 경우 화력의 우세를 십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된 고육지책이었다.

적의 도강지점이 확인되면 해당지역으로 보유 포병전력을 집중하여 대응하겠다는 전략을 세워두었던 것이다.

대신 해병 3여단과 55병단이 보유한 840정에 달하는 현식총은 저지선으로 삼은 아라카와강을 따라 흩어져 배치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구역으로 적이 도강할 경우 포병병력이 증강되기 전까지 도강을 저지하는 중요 화력으로 활용될 예정이었다.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현식총용 총탄이 각 총좌마다 배급된 상태였다.

동일본 영지군은 여러 개의 정찰대를 내보내 마땅한 도강지점을 찾아 움직였다. 이상한 것은 이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을 그들이 좀처럼 도강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이상히 생각한 한 현장 지휘관이 병단 본부에 비행대 정찰을 요청했다.

잠시 후, 여섯 대의 마차로 이루어진 55병단 비행대가 현장에 도착해 열기구를 띄웠다.

인맥을 활용한 적정 정찰로 파악된 적병의 군세는 20만. 하지만 비행대의 열기구가 파악한 적군의 군세는 겨우 3만 남짓이었다.

나머지 병력이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종래엔 해병 3여단의 비행대까지 다른 지역에 투입되어 정찰비행에 나섰지만 열기구들은 17만에 달할 동일본 영지군 병력을 찾는데 실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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