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5화. 일왕궁 사태
동일본에서 일어난 이상 상황을 가장 먼저 파악한 조선의 기관은 일왕궁에서 30분 거리에 있던 조선 사무국이었다.
일왕궁 인근에서 폭음과 총소리가 연이어 들려왔기 때문이다.
대사관 첨탑에 상시 배치되어있는 해병 외교경비대 소속 견시수와 저격병이 해당 사실을 인지해 상황실에 보고했고, 상황실은 곧바로 사무국장과 조선 해병대 총사부에 같은 사실을 보고했다.
아울러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에 배치된 해병 경비대 병력에 비상이 발령되었다. 무장한 해병대원들이 무장을 챙겨들고 뛰쳐나와 각자 정해지 위치로 달려갔다.
남창 사태이후, 각국 주재 조선 사무국엔 비상 대처요령이 하달되어 있었다.
최악의 경우 기밀문서를 파괴하고, 전신장비를 폭파하는 등 절차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해당 절차에 따라 준비에 들어간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은 긴장된 시선으로 일왕궁 쪽을 유심히 관찰했다.
해병 경비대장이 쌍안경을 들고 첨탑으로 올라왔고, 뒤이어 사무국장도 첨탑으로 올라왔다.
“충!”
군례를 올리는 경비대장에게 사무국장이 물었다.
“상황은 어떻소?”
“왕궁 경비 병력과 정체불명의 외부 병력 간 교전이 벌어진 듯합니다.”
“정체불명의 외부 병력?”
“전통무장을 갖춘 이들인데, 복장 상태로 미루어 정규 병력으로 판단됩니다.”
말과 함께 경비대장이 내미는 쌍안경을 받아든 사무국장이 일왕궁이 있는 방향으로 쌍안경을 들었다.
“흠······. 그렇구려. 교전이 벌어졌구려. 등에 꽂은 깃발은······. 멀어서 잘 안 보이는군.”
“예. 다만 사무라이와 아시가루로 보이는 이들이 확인된 이상 정규 병력을 운용하는 막부의 소행으로 파악됩니다.”
“한데 총포 소리는······?”
“근왕군으로 명명된 병력이 일왕궁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귀환한 대한제국군 말이오?”
“예. 맞습니다.”
“그들이라면 오전에 출궁했다고 하지 않았소?”
의아한 표정인 사무국장의 물음에 경비대장이 답했다.
“그 이후에도 일부 화포가 일왕궁에서 관측된 것으로 보아 일부 병력이 남아있었던 듯 보입니다.”
경비대장의 답에 사무국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완전히 제멋대로 부리는 구려.”
대한제국군을 사사로이 자국의 근왕군으로 삼은 일왕의 행동은 온당치 않았다. 당연히 그것을 항의했지만 일왕측은 조약에 그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며 정당함을 주장해왔다.
일왕의 말대로 한성조약은 각 제후국이 2만의 대한제국군의 유지와 1만의 동원군을 상시 조선으로 파병한다는 사항을 명문화하고 있었지만 그 병력을 자국에서 이용하면 안 된다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제국군의 무장은 조선이 대한제국 황실의 이름으로 책임진다.
따라서 각 제후국에 주둔하고 있는 대한제국군 병력은 조선에서 보내진 무기와 장비로 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병력을 사사로이 해당 제후국이 이용한다는 것은 잘못 된 것이라 판단한 동일본 조선 사무국 국장은 해당 사항을 외교부에 정식 보고하고 조약 수정을 청원한 상태였다.
물론 아직 외교부에서는 공식적인 반응이 없었다. 보고 시점이 며칠 되지도 않은 데다 외교부도 나름 토의가 이루어져야 하니 그렇겠지만 동일본의 상황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왕이 패하겠소?”
사무국장의 물음에 경비대장이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오늘 새벽에 근왕군 병력이 출궁했던 것이 무슨 목적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 목적에 대한 조선 사무국의 문의에 일왕궁은 아직까지도 답이 없었다.
“당체 답이 없으니······.”
답답해하던 사무국장이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경비대장은 무슨 목적으로 출궁했다고 생각하시오?”
“해당 문의에 일왕궁에서 답이 없는데다 지금의 상황을 대비하여 유추하면······. 아마도 그 병력은 막부를 급습하기 위해 출병했던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일왕이 막부를!”
놀라는 사무국장에게 경비대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 추측은 그렇습니다. 지금 일왕궁을 공격 중인 막부의 병력이 너무 적다는 것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그 병력은 격파 되었을 수 있다 보입니다.”
“지금 대한제국군이 막부의 병력에게 격파되었다는 말씀이오!”
일왕이 막부를 급습했을 것이라는 말보다 더 놀라는 사무국장에게 경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막부가 겨우 저 정도의 병력으로 일왕궁을 공격할리 없으니까요.”
경비대장의 답에 잠시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인 사무국장이 물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왕이 패하겠소?”
다시금 묻는 사무국장에게 경비대장이 답했다.
“오전에 출궁한 병력이 제 추측대로 이미 격파되었다면······. 예. 일왕은 막부를 군사적으로 이기지 못합니다.”
“흠······. 일왕궁을 격파한 이후 막부의 병력이 사무국으로 진출해 위협을 가해올 가능성에 대비해 주시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경비대장의 답을 들은 사무국장이 첨탑을 내려갔다.
직후 경비대장은 현식총 사수를 첨탑에 추가 배치했다. 신형 기관총인 기01은 비행선을 제외하면 아직 실전 배치되지 않았다.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의 비상 상황을 보고받은 조선 해병대 총사부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곧바로 원수부와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해병대 총사부는 유사시에 대비해 지정해 두었던 긴급대응 부대 1개 여단에 출동 대비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해병강습함대가 북미대륙 서부 점령 작전에 동원되어있었던 까닭에 별도의 즉응 병력 지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해병대 총사부가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만큼이나 보고를 받은 원수부와 최고사령부도 바삐 돌아갔다.
보고를 받은 태왕과 이순신이 최고사령부로 나왔고, 상황보고들이 일목요연하게 이어지기 시작했다. 사무국 경비대장의 판단과 동일한 분석이 원수부와 최고 사령부 참모들에 의해 내려졌다.
그에 따라 최고 사령부는 현재의 동일본 사태를 왕권을 둔 내전으로 규정했다.
대한제국 조약으로도 불리는 한성 조약은 각 제후국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쟁투나 왕권 다툼에 황제와 종주국인 조선이 개입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따라서 내전으로 규정된 이상 광해와 조선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 없었던 것은 동일본 내에 머물고 있는 조선인들과 조선 사무국에 파견된 관리들의 안전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사시에 대비해 조선군 전력을 동일본 해역으로 긴급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에는 아직 신형 증기철선으로 교체되지 않은 13수송함대가 동원되었다.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에 일부 함선을 판매했던 13함대는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곧바로 30척의 조선무역선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포항으로 향했다.
출동 대기 태세를 갖추고 있는 해병 1개 여단을 싣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이미 2월에 대월 전선에서 귀환해 신형 증기철선들로 구성된 일칠함대로 편재를 변경한 채 적응훈련에 여념이 없던 이순신 함대에 출항 명령이 떨어졌다.
이순신 함대는 부장인 손일원의 지휘 하에 곧바로 포항으로 항진했다. 그곳에서 해병을 실은 13함대를 호위해 동일본 해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관서도와 서남도에 주둔 중인 5전단 예하 55병단에도 비상이 걸렸다. 조선이 지상군을 투입한다면 해병대 외에는 가장 먼저 동일본에 투입될 병력이 바로 55병단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나고야 주재 조선 사무국에도 비상을 걸고 곧바로 나고야 대한제국군 병력의 출병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지만 수행 불가를 알리는 답신이 도착했다.
근왕군으로 변경해서 유지하고 있던 동일본과 달리 나고야 왕국은 귀환한 대한제국군 병력의 군역을 해제하고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현재는 그 인원을 대체해 모집된 병력 1만의 훈련이 진행 중이었는데 이제 겨우 3일차였다. 아직 농민과 다를 바 없는 그 병력을 전투에 동원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고 나고야 주재 조선 사무국이 보고했던 것이다.
대한제국군의 선발과 유지는 한성조약에 의거하여 각 제후국의 재량에 맡겨져 있었다. 따라서 병력수가 맞는다면 소집과 해산은 제후국의 고유재량권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원수부는 해당 조약을 수정하여 신규소집 병력이 전투투입 가능 시점에 이르기 전에는 기존 병력을 해산할 수 없도록 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외교부로 전했다.
여하간 동일본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나고야 왕국방면에서 투입할 전력이 없게 된 조선군 최고 사령부는 해병대의 출병을 서두르라고 독촉했다.
동일본 주재 조선 사무국은 사전에 구축되어 있던 비상 연락망대로 전령을 보내 동일본, 특히 에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위험을 경고했다.
사무국 전령에 의해 연락을 받은 열 명은 곧바로 자신에게 할당된 2명에게 사전에 약속된 방법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그것이 계속 확대되어 모든 조선인에게로 전파된다.
외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주어진 행동지침은 3단계였다.
1단계인 ‘경고’를 받을 경우 가능한 외출을 삼가고 비상연락체계를 점검하여 유지하며 상황을 예의 주시해야 했다.
2단계에 해당하는 ‘위험’을 통보받으면 지체 없이 탈출 장비를 지참한 채 지정된 탈출지역으로 이탈하해야 했다.
3단계인 ‘긴급’은 급변사태에 발령되는 것으로 1단계와 2단계의 경보를 발령할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일 경우에 해당 하는 것으로 이 단계를 통보받을 경우엔 모두가 각자 알아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것은 조선 사무국이 도움을 줄 수 없을 만큼 급박한 상황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발령된 것은 1단계인 ‘경고’였다.
아직 조선 또는 조선 사무국에 대한 위협행동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국민 보호조치를 먼저 발동할 경우 종주국이 제후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잘 못 줄 수 있기에 신중하게 결정되어 시행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신 폭음이 울리는 탓에 불안해하고 있던 에도 거주 조선인들은 사무국의 비상연락에 기민하게 움직였다.
사전에 교육받은 대로 가능한 귀가해 가족끼리 모여서 유사시 전달될 수 있는 비상연락체계를 확인하고, 탈출 장비들을 점검했다.
그런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왕궁의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다.
병력적 우세는 4백의 병력을 동원한 막부에 있었다. 근왕군이 남겨둔 병력은 겨우 1백여 명에 불과한 포병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왕궁에 남은 병력은 3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1백 명의 병력이 대한제국군이라는 것이 막부의 병력을 동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고난을 안겨주고 있었다.
아무리 포르투갈 전쟁과 북미 점령전에서 사용하던 나총과 이포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성벽의 보호를 받는다는 안정감 때문이었는지 이들 병력은 좁은 산길에서 막부군의 급습을 받아 격파된 본대와 달리 재빨리 일총과 일포에 적응했다.
재장전에 시간이 소요되는 일총과 일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소화했다.
하지만 2백의 일왕군은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항상 근왕을 외치며 자신만만했던 2백의 호위대는 우왕좌왕하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조정 대신들이 고용한 사무라이와 그 가문 자제들로 이루어진 호위대는 호화롭던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 실력을 신임할 수 없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전히 피비린내 나는 실전 경험을 거친 이들이 남아있던 막부군과 달리 이들은 전부 실전 경험이 없었다.
임진년에 시작되어 기해년에 끝난 7년간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후 일본 땅에서 전투 행위가 사실상 종료되었기 때문에 실전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전쟁 경험이 없는 이들이 실전에 맞닥트리자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명령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고, 교전에선 어설프게 움직이다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만약 1백의 대한제국군 출신 근왕군 병력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무너졌을 정도로 대응은 형편이 없었다.
하지만 역전의 노장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데다 직전의 승리로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막부군은 거칠고 사나왔다.
그들에 맞서 대한제국군 출신 근왕군 병사들을 중심으로 일왕궁 병력은 사력을 다해 공격을 막아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봉착했다.
미처 근왕군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서측 성벽이 돌파 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일왕궁의 성벽은 성벽이라 불리긴 하지만 낮은 담장에 불과했다. 특히 정문을 제외하고는 망루조차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20문의 포가 모조리 정문에 배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에 따라 정문을 공격한 2백 명의 막부군 병력이 큰 피해를 입고 있긴 했지만 그와 달리 좌우로 나뉘어 협공을 취한 나머지 2백 명의 병력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전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병력 중 일부가 일왕궁의 담을 넘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