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9화. 왕민사업
조선이 한창 선거 열풍에 휩싸여 있던 1월 중순, 부산포에서 대한제국군 3차 원정군 병력이 탑승한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들이 출항했다.
이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들은 11, 12수송함대 소속으로 모두 60척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척당 2천명의 무장병력을 수송할 수 있는 탈해급이었기에 이 두 함대만으로 12만에 달하는 대한제국 해병대의 수송이 가능했다.
그들은 유럽으로 향하는 항로를 따라 말레이와 인도양을 거쳐 리스본으로 향한 다음 거기서 퀘벡으로 향해 3월 중순까지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3차 원정군의 경우 처음부터 유럽이 아니라 북미대륙에 투입되는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착하면 곧바로 2달간의 인수인계절차가 시작되고, 5월부터 기존 병력의 철수가 시작된다.
먼저 유럽에 투입되었던 1차 원정군인 대한제국 해병대 병력 12만이 철수하고, 그 다음에 2차 원정군인 대한제국 육군 병력 12만이 철수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그렇게 철수한 대한제국군의 자국 귀환일정과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무장을 해제해서 보내느냐 아니면 무장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서 각자의 자국으로 돌려보내느냐 하는 점이었다.
외교부는 반대했다.
당장 나총과 이포는 현재 제후국에 공급되고 있는 일총과 일포에 비해 현격하게 좋은 무기였기 때문이다.
병무부도 외교부와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원수부는 의견표명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무기만을 생각했을 때는 외교부와 병무부의 주장이 옳았지만 대한제국을 위해 외국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 돌아온 이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자칫 그간 쌓아온 충성심에 큰 상처를 내는 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한제국이 한 나라는 생각을 투철하게 가지게 된 24만의 젊은이들을 잃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원수부는 자신들이 고충을 그대로 태왕에게 고했다.
원수부의 보고에 태왕은 미련 없이 해당 병력이 귀환하는 대로 무장을 회수하고 일총과 일포로 교체하도록 지시했다.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태왕의 이 지시가 내려진 사항이었기에 원수부는 그에 맞춰 준비를 갖춰갔다.
이 시기 태왕이 병무부에 귀환하는 대한제국군 장병들에 대한 군인 연금 지급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조선에선 태왕의 특별지시에 의해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에게 일정부분의 연금을 지급해왔다. 물론 큰 규모는 아니었다.
단순 참전의 경우 왕실 근로자 평균 급료의 1할, 부상의 경우 부상정도에 따라 1할에서 5할까지이고, 전사했을 경우 10년 치 급료의 일괄지급과 함께 매월 3할의 연금이 유족에게 지급된다.
현재 왕실 상단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의 월평균 급료는 50만 원 정도다. 그러니까 단순 참전의 경우 5만원, 부상자들의 경우엔 그 부상의 정도에 따라 5만원부터 25만원까지 차등해서 지급을 받는 다는 소리다.
대신 중복 지급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두 개의 전쟁에 참전했다고 군인연금이 두 배가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다만 복수의 참전이 있을 경우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을 적용시켜주기는 한다.
이 군인연금에 소요되는 재정은 온전히 왕실 재정에서 충당한다. 왕실의 명을 받아 전쟁에 참여한 것이니 왕실이 책임진다는 광해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참전 군인들의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다. 지난 몇 년간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조선이기에 참전 경험이 없는 예비군은 드물었다.
그렇다보니 예비군의 절대다수는 금액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군인연금을 받는다. 군인연금이 들어오는 철산은행의 통장에는 매번 입금자가 태왕이다.
거기에 하나의 문구가 항상 따라붙는다.
<그대의 충성과 희생을 조선의 왕실은 결코 잊지 않는다>
태왕과 왕실에 대한 현역만큼의 충성심을 예비군이 유지하는 것은 그와 같은 배려 때문이었다.
또 하나, 참전 군인들에겐 재기 지원이라는 제도적 지원이 제공된다.
무언가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사업을 하다 잘못되었을 경우 왕실 예비군 지원단에 신청하면 한 번에 한해 재기를 위한 교육과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물론 무상은 아니다. 조건도 붙는다. 반드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거기다 결국은 빌린 돈도 갚아한다.
그래도 상환기간이 30년에 달하는데다 결정적으로 무이자였다. 더구나 아무런 담보도 없이 10년 치 급료에 해당하는 돈을 빌려주는 곳은 그곳 외에 아무 곳도 없었다.
융자제도가 나와서 잠시 하는 이야기지만 조선에는 특별한 제도가 하나 존재한다.
왕실 소유인 철산 은행 창업지원단이라는 곳에서 시행하는 이 제도는 왕민동업사업이란 이름의 정책을 진행한다.
15세 이상의 경제활동이 가능한 조선 백성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평생 한번은 이용할 수 있는 정책으로 말 그대로 왕실과 공동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다.
종류와 사업범위엔 제한이 없었다.
막말로 시전에서 떡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상점을 열든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제출한 사업신청서가 타당하다고 판단되면 철산 은행은 해당 신청자에게 사업장, 또는 토지를 무상으로 빌려주고, 사업개시를 위해 소모되는 비용도 전액 지원한다.
지원 기간도 길다.
3년간 끊임없이 뒷바라지를 해준다. 실적이 좋지 않더라도 신청자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운영자금을 지원하고 개선책을 함께 고민한다.
대신 성공한다면 이윤의 3할을 왕실이 가지고 간다. 매출액이 아니라 모든 경비를 빼고 남은 이윤의 3할이다.
이자도 없고 원금 상환의 부담도 없다. 대신 그 사업이 폐업되거나 매각 될 때까지 끊임없이 이윤의 3할을 왕실이 가져가는 것이다.
매각될 경우 투자원금에 해당하는 금액은 왕실로 귀속된다. 그 이상의 매각 이익금 중 3할은 왕실로 나머지는 신청자가 갖는다.
만일 매각 대금이 투자원금 이하라면 사업은 실패로 보고 신청자는 아무런 이익금도 가져가지 못한다.
물론 이 제도에도 조건이 붙는다.
사업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해당 사업에 대한 교육을 창업지원단이 지정한 교육기관에서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것이다.
이수하지 못하면 아무리 신청이 통과되었다 해도 사업은 시작되지 않는다.
제법 심사도 까다롭고, 관리도 엄격한데다 사업을 영위하는 내내 이윤의 3할을 세금과 별도로 왕실에 납부해야 하는 제도이긴 했지만 적어도 아무런 부담 없이 자신의 꿈을 펼쳐볼 기회를 조선의 백성이라면 평생 한번쯤은 가져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의 백성들은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뻐했다.
참전 군인에게 주어지는 재기 지원은 이 창업지원단 사업과 별개이기 때문에 그들은 두 번의 기회를 가지게 되는 셈이었다.
이런 강력한 지원 정책에도 불구하고 모병제 전환이후 병력자원의 수가 급감하고 있었다.
군인이 되겠다고 지원하는 이들의 수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조선군이 여전히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적은 수라고는 하나 전쟁에 참여한 이들 중에선 꾸준히 전사자나 부상자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 군에 지원하는 이가 얼마 후에 그렇게 전사자의 명단에 오르거나 부상자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깊었던 것이다.
조선군의 완편 병력은 40만을 아주 살짝 넘기는 정도다. 하지만 현재 편성된 현역 병력은 그보다 5만이나 적은 35만이었다.
최근 들어 해군에 신형 증기철선들이 배치되면서 다행히 함선수와 병력수가 줄어드는 통에 상당부분 부족분을 상쇄시키고는 있었지만 부족분의 증가속도가 너무 가팔랐다.
현행 감소율대로 계속되면 병무부의 예측으로는 5년 이내에 부족자원은 5만이 더 늘어 10만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재기 지원만이 아니라 주택 지원 등, 수많은 지원정책에도 불구하고 군인으로 지원하는 이들이 적은 것은 그것이 아니어도 할 일이 조선에 넘치도록 많았기 때문이다.
요즘 어지간한 지방 도시만 내려가도 6차선으로 시원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마차들이 수도 없이 돌아다닌다.
상점들은 즐비하고 손님들은 끊임이 없다.
백성들 전체의 소득이 높다보니 구매력도 좋고, 소비력도 상당했다.
‘소득의 2할은 저축, 8할은 소비하자’라는 태왕의 계몽운동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까닭이다.
벌어서 쌓아두기만 해서는 경제가 발전하지 않는다. 소비해야 경제가 커지고 그 과실이 다시 백성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광해가 기울이는 노력이 적지 않았다.
윤택해진 삶은 조선 백성들의 모습 전반을 바꾸어 놓았다.
일단 복색부터 변화가 있었다. 요즘엔 조선에서조차 평시엔 전통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이들을 보기가 어려워진 시대였다.
간편한 개량한복이 대세였고, 전통한복은 예식이 있거나 명절, 또는 웃어른께 인사를 가기위해 정갈하게 꾸며야 할 때나 입는 옷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마치 현대시대 정장의 위치를 전통한복이 차지한 셈이다.
재미있는 건 조선에 부임한 외국 대사들도 왕실 행사에는 한복을 차려입고 참석한다는 점이었다. 세계적으로 전통한복은 예복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유럽 왕실들 중에서도 한복을 입고 여는 파티를 개최하는 곳이 적지 않았다.
특히 에스파냐나 잉글랜드, 프랑스는 조선 대사관이 개최하는 성대한 연회가 매년 한 번씩 열리는데 이 연회의 드레스코드는 언제나 전통한복이었다.
그 연회에 참석했다가 한복의 미에 반해 특별히 드레스코드가 없는 자신들의 연회에도 한복을 입고 참여하는 유럽 귀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반대로 조선에서도 연회문화가 발달 중이었다. 아직은 일부에 불과했지만 시끌벅적한 잔치가 외국식의 연회로 변형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계가 서로 문화를 주고받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문화교류의 중심엔 조선이 서 있었다.
교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여행을 다니는 백성들의 수가 정말 많이 늘었다.
과거에는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살고 있던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여행을 다니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국토부가 ‘죽기 전에 가보자 금수강산’이라는 계몽운동과 함께 일정부분 여행경비를 지원하는 정책을 펼친 이후 급격하게 늘어나기도 했지만 철도가 결정적이었다.
먼 거리를 비교적 싸고 안전하게, 그리고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해진 시간에 맞춰 이동하는 이 기차의 존재는 백성들의 이동성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더구나 해군에서 퇴역하는 조선무역선들을 대거 근거리 교통수단으로 확충투입하면서 기차와 배를 접목시킨 여행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예를 들면 부산포까지 기차로 이동하고 부산포에서 배를 타고 사시사철 따듯한 유구로 여행을 가는 이들이 생겼을 정도다.
오죽하면 유구를 관장하는 대만도 감영이 폭증하는 유구 여행객들의 수를 제한할 지경이었다.
주거이전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 조선이었지만 여전히 태어난 마을을 벗어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여행으로 다른 지역을 둘러보는 것은 마치 유행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경제만큼이나 사회가 발전하고 있었다.
그렇게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조선으로 12만의 대한제국 해병대 1차 원정군 병력이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