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동일본의 변화
조선과 연관된 전쟁이 5개나 벌어지고 있었던 시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동일본으로써는 꽤나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그간 쇼군의 자리에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고쇼(大御所, 대어소 : 물러난 쇼군)로 자리를 옮기고, 자신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 덕천수충)에게 쇼군의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
실제역사보다 7년이나 늦은 일이었다.
이 일이 이처럼 늦어진 것은 실제역사와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차지하고 있던 관직이 조선 태왕의 교지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에게 허락된 쇼군의 자리가 일본의 전통적인 쇼군의 직책인 세이이타이쇼군, 그러니까 정이대장군이 아니라 조선 태왕으로부터 교지를 받아 얻은 후오코쿠쇼군, 다시 말해 보국 장군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이 직책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조선 태왕의 허락이 담긴 교지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1605년부터 매년 막부에선 사신을 보내 승계의 허락을 청했지만 조선 왕실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결국 얼마 전,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직접 조선의 황궁을 방문해서 태왕을 알현하고 무릎 꿇고 앉아, 충성을 맹세하고 간청을 거듭한 끝에 간신히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 교지를 가지고 도쿠가와 하데타다가 귀국하면서 쇼군의 자리가 바뀐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일왕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당장 후오코쿠쇼군의 직책이 일왕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 출범한 이후에도 여전히 동일본은 막부와 다이묘 체계를 고집했다.
한성조약에 의거해서 대한제국의 법이 통용은 되고 있었지만 각 다이묘들마다 별도의 조칙을 정해서 교묘하게 과거의 악습들을 답습하고 있었다.
간단한 예를 들면 대한제국법상 상업은 원한다면 누구나 영위할 수 있었다. 그것은 동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성조약에 의해 각국의 자율에 맡겨진 조세권을 이용해 그 법을 무력화 시켰다.
여기서 말하는 조세권은 세금을 부과하고 걷어 들이는 권리에 국한 된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막부와 다이묘들이 이용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다이묘의 허가를 받은 상인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달리 하여 사실상 허가를 받은 자만이 상업을 할 수 있게끔 강제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막부와 다이묘들은 제국에 납부하는 세금 이외의 뒷돈을 챙기는 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동일본의 막부는 조세권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을 착실하게 지켜나갔다.
그것이 발목을 잡으면서 동일본의 경제는 계속 정체되며 대한제국이 된 이후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로인해 백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막부 요인들과 각 지의 다이묘들과 무사계급은 여전히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며 독보적인 권위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살아가는 시대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동일본의 백성들에게 이전과 달리 자신들의 삶을 비교할 대상이 생겼던 것이다.
멀리 조선의 땅이 된 관서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바로 접경을 이루고 있는 나고야 왕국만 해도 조선식 개혁을 받아들여 꽤나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이라는 한 울타리로 묶이면서 교역이 발생하며 양국의 접촉이 늘어났는데 그 과정에서 나고야 왕국 백성들과 동일본 백성들 간의 교류가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올 때마다 입성이 바뀌고, 가지고 있는 재산이 달라지는 나고야 왕국의 상인들과 그 밑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달리, 자신들은 재산증식은커녕 여전히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에 동일본 백성들은 좌절했다.
처음엔 좌절로 끝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으로 변질되어 쌓이고 있었다.
동일본의 위정자들이 그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알고 있었기에 아주 작게 숨통을 틔워 주면서도 군에서 총을 회수해 폐기하는 수순을 밟았다.
다른 모든 나라들이 총기를 중심으로 하는 화약무기로 무장해가고 있는 상황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일이었지만 동일본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무사계급을 통해 백성들을 한손에 계속 틀어쥐고 있길 바랐다.
물론 동일본에도 총으로 무장한 병력이 있긴 했다. 한성조약에 의거하여 보유해야하는 대한제국군과 막부 직할군 중 일부를 조선에서 수입한 일총으로 무장시켜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다른 제후국들이 조선으로부터 총포의 수입에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동일본은 초기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러지 않았다.
수군을 부활시키기 위해 함대를 화포가 장착된 조선의 함선으로 무장시키긴 했지만 수군의 수를 억제하고 막부 직할로 둠으로써 역시 화기로 무장한 군대를 꽉 틀어쥐는 것을 택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단 며칠만의 훈련으로 수년에서 수십 년을 단련한 무사들을 쏘아죽일 수 있는 총기로 백성들이 무장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가톨릭이 백성들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동일본 내에 거주하는 기리시탄을 탄압하고 기독교의 포교를 금지시켰다.
이것에도 종교에 대한 자유를 명기한 대한제국법을 피하기 위해 조세권을 악용했다. 막대한 종교세금을 부과하고 그것을 못 내자 탄압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다이묘를 위시한 각지의 지배력과 군권을 확보하고 있었던 막부였지만 백성들에게서는 신망을 점차 잃어갔고 있었다.
한쪽이 인심을 잃으면 그 반대쪽이 얻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동일본에서는 막부가 잃은 백성들의 인심을 왕실이 얻었다.
그렇다고 왕실이 백성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막부의 악습을 막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일왕이 펼쳐주길 바랐던 것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기대가 가져다준 지지세가 얼마나 뚜렷하고 컸는지 군권조차 없는 일왕이 딴 생각 품을 정도였다.
작년에 선왕의 양위로 일왕에 오른 고미즈노오(後水尾, 후수미) 일왕이 바로 그 생각을 품은 당사자였다.
재임기간 중 왕권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으면서도 여전히 정치에 관여하고자 하는 고요제이(後陽成, 후양성) 상왕과 실권은 모조리 앗아가고 허수아비로 삼으려는 막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던 고미즈노오 일왕으로써는 백성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되었을 터였다.
문제는 심리적인 힘으로 삼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고미즈노오 일왕은 은밀히 사람들을 풀어 자신의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주로 낙향한 무사나, 막부의 개입으로 큰 피해를 입으며 몰락한 상인들이 그 대상이었다.
움직임이 얼마나 조심스럽고 은밀히 이루어졌는지 왕실을 감시하고 있던 막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고미즈노오 일왕의 패거리는 자신들을 왕당파라 불렀다. 일왕을 동일본의 진실 된 통치자로 옹립하고 왕권을 되찾아 오려 노력하는 이들이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다행인 점은 왕당파가 백성들의 지지만 믿고 섣불리 일을 벌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긴 일왕이나 왕당파에게는 막부가 보유한 강력한 군대와 싸울 수단이 없었다. 더구나 이익을 포기하고 일왕을 위해 나서줄 다이묘를 찾지도 못했다. 자칫 다이묘들과의 접촉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다들 죽은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왕과 왕당파는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이 기다리는 기회는 내년에 유럽전선에서 돌아오는 대한제국군의 귀환이었다.
그들은 대한제국 황제에 대한 충성심 교육을 강력하게 받은 이들이라는 정보를 들은 까닭이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결국 정통성에 대한 충성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일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옮겨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일왕과 왕당파는 일순간에 막부의 군대와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일본이 일왕과 왕당파가 기회를 기다리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11월로 접어들었다.
조선에선 겨울의 삭풍이 본격적으로 불어오는 11월에 접어들었지만 대월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대월군은 산악전단이 정글에 설치한 함정에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었다.
대월군이 단지 산악전단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수시로 기습을 통한 공격을 가하는 통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전쟁이 그렇게 소규모로 철저하게 정글을 통해 진행되는 통에 지지부진하게 길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로인해 북부에 도착한 대한제국 병력은 전투에 투입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섣불리 정글에 집어넣었다가 피해만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작전지원대를 이끌고 대월의 북부로 파견된 정기룡은 대기하는 동안 산악전단의 일부병력을 지원받아 병력의 훈련에 매진했다.
제후국들이 대한제국군의 이름으로 보내준 5만의 병력을 산악전단에 준하는 훈련을 시켜 투입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는 사이 11월 말이 되었다.
거제 건선단지에서 계획대로 60척의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들이 진수되었다. 이 배들은 인수 항해를 거쳐 곧바로 11, 12 수송함대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며칠의 차이를 두고 20척의 정경달급 경비함 20척도 완성되어 진수되었다. 이 배들도 인수시험 항해를 거쳐 내년 초에 전력화를 거쳐 퇴역하는 장갑귀선과 판옥전선을 대신해 서해경비단으로 실전배치 될 예정이었다.
대규모 신형 증기철선들이 완성되어 진수되었지만 거제 건선단지의 건선거들은 여전히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분 일칠함대의 건조가 계속되고 있었던 데다 비워진 건선거에서 곧바로 13수송함대와 조선무역선단에 공급될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80척과 5차분으로 규정된 태평양함대 확대분 함선들을 건조하기 시작한 까닭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이순신은 거제 앞바다에 떠있는 항공모함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
추가로 3대의 날틀03을 배치 받은 항공모함은 모두 4대의 날틀03을 활용한 각종 훈련을 지속하면서 실전에서 적용할 작전운용수칙을 정리하고 전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2월에 들어서면서 온 조선이 선거준비에 돌입했다.
내년 1월에 치르게 될 선거가 이전과 달리 시장을 넘어 관찰사까지 뽑게 되기 때문이었다. 선거의 관리는 조선 최고 사정기관인 사간원에서 맡는다.
지방 행정부서와 분리되어 황실이 관장하는 중앙관청에서 맡는 것이다. 따라서 현직 관찰사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출마에도 제한 사항이 없었다.
그 덕에 12월부터 시작된 선거입후보자 등록에 이름을 올린 현직 관찰사들도 적지 않았다.
현직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황실의 대신을 지냈던 한 인사는 자신의 고향에서 치러진 이장 선거에서 떨어져 망신을 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조선의 행정구역은 황해, 평안 강원, 경기, 충청, 전라, 경상의 본토 8도와 남간도, 북간도, 서간도, 동간도로 이루어진 만주 4도, 그리고 구주, 사국, 서남, 관서, 북해로 이루어진 해외 5도, 또한 하북, 산동, 강소로 구성된 서부 3도, 거기다 대만, 남포르투갈, 녹주, 북미로 이루어진 원해 4도로, 총 24개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북미도는 퀘벡에 감영만 건설되었을 뿐 아직 본격적인 행정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긴 점령 작전이 진행 중으로 백성들의 이주도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곳에 감영부터 건설했던 것은 포르투갈 총독에서 물러난 이항복을 보낼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결론적으로는 그런 노력이 소용없어졌지만.
그런 까닭으로 이번 선거에서 북미도는 빠져있었다. 하긴 원해 4도 중 이번에 선거를 제대로 치르는 곳은 대만도 뿐이었다.
나머지 원해 4도 중 남포르투갈도는 이장선거와 읍장 선거까지만 치르고 녹주도는 북미도와 마찬가지로 선거를 치르지 않는다.
녹주도도 아직 원주민들에 대한 안정화작업이 마무리 되지 않았고, 백성들의 이주도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외 나머지는 모두 관찰사까지의 선거를 모두 치른다. 자그마치 21개도가 이장과 읍장, 시장은 물론이고 관찰사까지 뽑는 것이다.
이장을 제외하면 모두 간접선거라지만 백성의 손으로 관리를 뽑는 시대가 조선에서 정착되어 가고 있었다. 작금에 와서는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선거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12월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