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외유(外遊)
광해의 부름에 침전의 문이 열리고 알지가 들어서 허리를 굽혔다.
“예. 폐하. 부르셨나이까?”
“잠시 궁 밖을 다녀와야겠다. 번잡하지 않게 준비하거라.”
“어디로 향하실 것이 온지······?”
남창 사태 때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던 알지가 불안하게 묻자 광해가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거제를 다녀올 것이다.”
“폐, 폐하! 그곳은 너무 머옵니다.”
“하니 조용히 갔다 오자는 것이 아니겠느냐?”
광해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알지가 되물었다.
“하면 소신이 수행해도 되는 것이옵니까?”
“네 얼굴에 아니면 절대로 못 간다고 쓰여 있으니 달리 방법이 없겠지. 짐과 태자, 이 원수, 그리고 네가 조용히 갔다 올수 있도록 준비를 하거라.”
“태자 전하까지 가신단 말씀이옵니까?”
알지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왕실의 기둥이 태왕이라면 태자는 대들보다. 기둥과 대들보가 없이 서있는 집은 없다.
아니 그런 것 다 떠나서 현 군왕과 차기 군왕인 태자가 함께 외부로 움직이는 일은 사실상 일어나서는 아니 되는 일이다.
유사시 한 번에 왕위가 비게 되는 까닭이다. 더구나 지금의 조선 왕실은 태자 외에 적장자가 없는 현실이었기에 그 위기감은 특히 더했다.
“아니······.”
“······된다는 말을 하면 너를 빼고 몰래 갔다 올 것이니라.”
태왕의 말에 반대를 하려던 알지의 입이 황급히 다물렸다. 한다면 하고야 마는 태왕의 성품을 아는 까닭이다. 그런 알지에게 광해가 말을 이었다.
“태자에게 짐이 직접 보여주고 설명을 해줄 것이 있어서니라. 그러니 조용히 준비해 보거라.”
“어, 언제 나가실 요량이시옵니까?”
“아직 해가 남았으니 저 해가 지고 대신들이 퇴궐하고 나면 나서볼까?”
조선에 24시간제가 도입된 이래 대신들의 입궐과 퇴궐 시간은 광해의 어명에 의해 오전 9시와 오후 6시로 정해졌다. 과거 경국대전에 여름과 겨울을 달리하여 정해 두었던 것을 통일한 것이다.
그러니 3시인 지금에서 대신들의 퇴궐시간인 6시까지는 겨우 3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알지가 황급히 읍을 해보이고는 침전 문을 닫았다.
이후 알지가 어디론가 빠르게 뛰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광해가 빙긋이 웃었다.
그런 광해에게 이순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녕 태자 전하와 함께 가실 생각이시옵니까?”
“원수에게도 그렇지만 내 태자에게도 직접 보여주고 설명해줄 생각이오. 그렇지 않아도 언제 날을 잡아야지 했는데 이참에 해봅시다.”
“신형 비행선이라면 차라리 궁으로 부르시어 보시는 것이 낫지 않겠나이까?”
“궁은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장원까지는 나가야 하지 않겠소.”
“하면 장원으로 부르시어 보시지요.”
이순신의 말로 미루어 그는 아마도 신형 비행선이 거제 건선단지에서 제작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이순신에게 광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가 보십시다. 가서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니.”
광해의 말에 이순신은 불안감과 궁금증으로 뒤얽힌 표정이었다.
해가지고 침전을 조용히 나선 광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무장한 내금위 3백 인이었다.
전원이 기마대로 꾸려졌던지 내금위 전원의 옆에는 말이 서있었다. 말도 마갑까지 충실히 씌워서 누가 보면 중갑기병인줄 착각할 정도였다.
내금위가 1천으로 이루어져있는데다 광해가 나간다고 해도 궁의 경비는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기에 3백인을 준비한 것은 아마도 비번인 자들까지 모조리 동원한 결과일 터였다.
더구나 저렇게 많이 준비해봐야 사실 소용도 없었지만 광해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금위의 숫자를 줄이자고 나섰다가는 궁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까닭이었다.
그런 광해에게 그 자신도 중무장을 한 내금위 부장이 다가왔다.
“폐하를 모실 준비가 끝났나이다.”
지세창이 산악전단을 맡아 할롱 전투에 나가있었기 때문에 현재 실질적인 내금위의 지휘관은 부장이었다. 그가 직접 내금위를 지휘해 광해를 호종할 생각인 듯 싶었다.
“경도 함께 가는가?”
“예. 내금위장께서 직접 호종하여 사력을 다하라 하였나이다.”
“내금위장에게까지 보고가 된 겐가?”
“내금위의 일은 여전히 보고 받고 있나이다.”
“허허, 전장 지휘만으로도 바쁠 사람에게······.”
못마땅한 표정인 광해에게 내금위 부장이 서둘러 답했다.
“전장 지휘가 아무리 급하다하나 황궁의 숙위만큼 중한 것이 없다하면서 매 교대시간마다 보고하라 지시하여······. 송구하옵니다. 폐하.”
부장의 말에 광해가 쓰게 웃었다. 남창 사태 이후 내금위는 태왕의 호위에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자신들이 2백씩이나 있었음에도 자칫 태왕을 잃을 뻔 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내금위장인 지세창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그는 자신이 조금 더 잘 대처했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나 훌륭히 잘 해냈다는 광해의 치하에도 불구하고 지세창을 비롯한 내금위 전체는 태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가지고 있었다.
남창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며 죽어간 수많은 내금위 위사들의 죽음을 똑똑히 기억하는 광해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부장이 송구할 일이 아니지. 그저 짐이 안타까워 한 소리였다. 하니 그만 가지.”
“예. 폐하. 소신이 호종하겠나이다.”
잠시 후, 중무장한 내금위 3백이 똘똘 둘러싼 광해와 태자 호, 그리고 이순신이 궁을 나섰다.
황궁과 장원은 말을 달려 1시간이면 닿는 거리였다.
사전에 은밀히 광해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원은 기밀 연구시설 근무자들을 모두 대기시켜놓은 채 태왕의 방문을 맞았다.
“어서오시오소서. 폐하.”
황급히 달려 나와 머리가 땅에 닿을까 싶게 허리를 숙이는 이는 이제 내년이면 칠순에 달하는 고령의 이장손이었다.
나이와 달리 그는 굉장히 정정해서 여전히 직접 쇠를 다루며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광해가 그런 이장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짐으로 인해 퇴청해 쉬어야 하는 이들이 고생을 하는군.”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이리 친히 납시시니 광영이 아닐 수 없나이다.”
“광영은 무슨, 힘든데 퇴청시간 늦어졌다고 욕이나 안하면 다행이지.”
“폐, 폐하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저희 장원의 모든 관리들은······.”
화들짝 놀라 정색을 하는 이장손에게 광해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서둘러 말했다.
“아아, 웃자고 한 소리요. 웃자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장손에게 광해가 물었다.
“준비는 되어 있소?”
“예. 모두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나이다. 소신이 모시겠나이다. 이리로 걸음 하시옵소서.”
안내를 자처하는 이장손을 따라 장원을 한참 걸은 뒤에 도착한 곳은 조선에 존재하는 모든 연구소들의 연구결과를 보고받아 해당 정보를 보관하고 관리해서 각 연구시설들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조선 만물연구회 건물이었다.
가히 조선의 모든 기술이 통합되어 보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선 만물연구회 건물은 포도청 장원경비대가 아니라 내금위 별원이라 불리는 별도의 경비대가 철통같은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내금위 소속으로 황궁에서 근무하는 이들과 순환근무하게 되어 있었다. 그만큼 광해가 이 시설을 중히 여긴다는 의미였다.
그곳에 도착한 광해는 건물 앞에 설치된 탑을 보며 물었다.
“못 보던 건데, 현태가 망루도 아니고 무슨 용도인가?”
광해의 물음에 이장손이 황급히 보고했다.
“대공포이옵니다.”
“대공포?”
“최근에 화포 개발조에서 함상에서 현식총을 대체할 신형 기관총을 개발했사온데 그 총을 대공포로 사용할 수 있도록 양각을 최대치로 높이고 회전이 가능하도록 만든 폐쇄식 포가를 붙여 만든 것이옵니다.”
“신형 기관총?”
“예. 그렇지 않아도 며칠 후 있을 종합보고에 보고할 계획이었사온데 지금 올리올까요?”
“그럽시다. 한번 들어봅시다.”
“그간 해군에서 사용하는 현식총의 사거리가 짧아 실전에서 근거리 방어에 부족하다는 평가가 높았사옵니다.”
“그 보고는 나도 들었소만.”
“해서 사거리를 높이는 방향으로 개량을 거듭하여 나온 총이옵니다. 외형과 사격방식은 현식총과 같사옵고, 구경을 3분의 2치(약20mm)로 키우고 총탄에 든 장약의 양을 늘려 사거리를 1천보(약1.8Km)로 확장한 것이옵니다.”
“명칭은?”
“기관총 01형이라 하여 ‘기01’이라 부르옵니다.”
“기01이라······.”
이름을 되뇌며 고개를 끄덕이던 광해가 물었다.
“흑색화약을 사용한 것인가?”
“예. 최근에 개발되고 있는 총탄들은 모두 흑색화약을 사용하여 개발되고 있나이다.”
“다른 총기와 총탄들은?”
“현재 올해 말을 목표로 한창 개발이 진행되어 대부분 완료단계에 도달해 있나이다.”
“그럼 그것은 완료된 후에 보고받기로 하고, 신형 비행선을 볼까?”
“예. 이리로 납시소서.”
이장손의 안내로 들어선 곳은 조선 만물연구회 건물 한쪽에 마련된 대형 격납고였다. 이착륙장을 포함한 이 시설엔 비행선 통합 연구장이란 명칭이 달려있었다.
비행선을 만들면서 연관된 모든 부서가 하나의 장소에서 정보를 교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었다.
하긴 관여된 부서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니까. 당장 헬륨 기체 연구소와 내연기관 연구소는 물론이고, 무기개발부의 소총 개발조, 포탄 개발조, 포가 개발조에다 신문물 개발부의 객차 개발부, 제작공구 개발조까지 비행선 제작에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선 비행선 통합 연구장의 격납고엔 두 개의 비행선이 계류되어 있었다.
평강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해진 날틀02와 비슷한 크기의 비행선과 조금 더 대형의 비행선이 나란히 계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광해가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작은 비행선이었다.
“이것이 신형 날틀인가?”
“예, 폐하. 정식 명칭은 날틀03이옵고, 이전 날틀02보다 부력이 2배정도 커졌나이다.”
“크기는 비슷해 보이는데?”
“기낭의 형태가 달라서 그리 보이는 것이오나 실제로는 2배가량 기낭이 커졌나이다.”
“2배? 내 보기엔 비슷해 보이오만.”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커져서 그렇사옵니다.”
“세로로?”
“체적을 길이가 아니라 높이로 키웠사옵니다. 본래 날틀02의 기낭 내부에 존재하는 여유 공간을 완전히 없앴고, 위로 더 늘려 실질적인 기낭의 체적은 두 배에 이르게 개량 된 것이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높이가 조금 더 높아진 듯 보이긴 했다.
“그러면 그것의 높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겠소?”
걱정스런 광해의 물음에 이장손이 재빨리 답했다.
“최대높이를 사전에 거제와 협의하여 그것의 안전운용 높이에 맞추었사옵니다.”
장원 외의 기관과도 협업이 원활하게 수행되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광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했군. 정말 잘했어. 그렇지 그렇게 협의하여 일하여야 하는 것일세. 고생들 했소.”
광해의 치하에 이장손이 기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폐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옵니다.”
“어찌 그렇기만 할까. 장원주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모두 의식을 깨우고 심혈을 기울인 덕이겠지. 내 궁으로 돌아간 후 크게 상을 내리고 칭찬할 것이오.”
“감읍하옵니다. 폐하.”
기뻐하는 이장손의 손을 두어 번 두드려준 후 광해가 태자의 손을 잡고 비행선을 돌아봤다. 그런 두 사람을 이순신이 따랐고, 이장손을 비롯해 연구자들이 함께 대동해서 설명에 충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