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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28화 (228/325)

제228화. 피로 물든 제국기

며칠 후, 원수부에서 여군 설립 검토안이 보고되었다. 그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면서 광해는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예상보다 비슷,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수부가 여군을 시험적으로 도입할 보조 병과로 선정한 것들 중 가장윗줄에 놓인 것이 ‘간호’였기 때문이다.

이후 정훈과 병참 순이었다.

그나마 의외였던 것은 해당 병과에 여군을 도입하는 실험을 육군만이 아니라 폐쇄성이 강한 해군과 해병대에도 동시에 도입하겠다는 부분이었다.

광해가 신기해하면서도 원수부의 검토안을 그대로 승인해 내려 보냈다.

단지 검토안에 불과했던 것에 태왕의 재가가 내려오자 원수부는 서둘러 일을 진행했다. 태왕의 관심사라 판단한 것이다.

해당 결정에 대한 해군과 해병대의 반발도 원수부는 ‘태왕 폐하의 관심사’라는 말로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조선에서 태왕이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는 일에 반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일들도 태왕이 된다고 말하면 결국 실현되는 것을 모든 이들이 숱하게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과거 유럽으로 군대를 파병하며 보급거점간의 거리를 태왕이 잘못계산한 일이 있은 후로, 태왕의 명일지라도 교차 검증이 실시되고 있긴 하지만 반대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해군과 해병대도 마찬가지였다. 원수부의 그 말 한마디에 닥치고 제대로 해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되었는데 육군은 물론이고, 해군과 해병대조차 여군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진심으로 전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해병대 총사였던 곽재우의 말로 시작되었다.

<땅개나 뱃놈들이 성공했는데 우리 해병대에서 실패했다는 보고를 내가 태왕 폐하게 올리게 만들기만 해봐. 관련 업무 본 새끼들은 물론이고, 실패에 일조한 새끼들까지 깡그리 잡아다가 껍데기를 몽땅 벗겨서 소금밭에 널어놓을 테니까.>

그 위협이 먹혔는지 어쨌는지 그 이후로 해병대는 거의 전군이 협조체제를 구축한 채로 매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해병대가 그러게 전력을 기울이니 경쟁 관계인 해군이 가만있을 수 없었다. 해군은 총사부에 직할 사업단을 꾸려 총사가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해병대와 해군이 그러니 육군도 허투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각 군 특성에 맞춘 여군 복무규정과 지원책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에 따라 8월엔 태왕의 명으로 사상 첫 여군 모집이 실시되었다. 사전에 얼마나 각 군에서 홍보를 했던지 2백 명 모집에 자그마치 3만 명에 달하는 지원자가 몰렸다.

자신들을 가둔 여성 차별을 깨고 싶어 하는 조선 여성들의 열망을 단편적으로 보여준 일화였다.

놀란 광해가 그 열망에 조금이라도 응답하기 위해 선발인원을 5백 명으로 늘였다. 그 일로 태왕과 왕실을 향한 조선 여인들의 온갖 찬사와 축복이 쏟아졌다.

그래서였을까?

8월 중순, 황후의 회임(懷妊) 소식이 전해졌다. 이 당시 황후의 나이가 서른아홉으로 당시대로는 가임기간이 지나갔을 나이였기에 큰 경사로 취급되었다.

광해 또한 얼마나 기뻐했는지 침전에서 소식을 듣고는 신도 못 신고 버선발로 중궁전까지 달려갔다는 궁인들의 목격담이 쏟아졌다.

그 소식이 전해진 조선 각지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이 귀한 왕실이 단단해 지는 경사 중의 경사였기 때문이었다.

온 조선의 백성들이 마치 자신들의 일인 것 마냥 기뻐하는 모습에서 태왕과 왕실이 얼마나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여실히 증명되는 기회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좋은 일엔 방해되는 일이 많다는 그 말처럼 조선 왕실의 기쁜 소식에 뒤이어 들려온 것은 대월 정벌에 나섰던 남진군의 참패 소식이었다.

정글을 이용한 대월군의 유격전에 휘말려 지지부진하던 장수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남진왕 마림이 직접 대병을 일거에 동원하여 정글 속에 숨어 든 대월군을 공략하고 나섰다가 오히려 역공에 걸려 대패했던 것이다.

더 강력한 화력에,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남진군이 패배한 것은 정글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부대들이 조각조각 나뉘어 원활한 협력전투를 벌이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에 반해 대월군은 정글 요서요소를 잇는 좁은 토굴을 길게 파서 재빠르게 병력을 이동시켜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집중해서 남진군을 각개 격파해 버린 것이다.

더구나 남진군은 울창한 밀림으로 인해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무기의 성능을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했다.

여기서 일단락되었다면 남진군의 원정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을 텐데 전투 와중에 남진왕인 마림이 전사하고 말았다.

얼마나 크게 당했던지 국왕의 시신조차 챙기지 못한 대패였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광해와 조선은 여기까지도 용납할 수 있었다. 이유와 명분이 어디에 있든 타국을 침공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남의 목숨을 취하려면 자신의 목도 걸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전사한 남진왕의 시신을 대월군이 승리를 거둔 정글 입구에 보란 듯이 창에 꿰어 세워두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남진군의 맨 앞에서 펄럭이던 대한제국기가 달린 깃대에.

자신들의 승리에 도취한데다 남진을 모욕하는 것에 눈이 멀어 미처 파악하지 못한 행위였는지, 아니면 대한제국을 남진과 싸잡아 함께 모욕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성공했다.

대한제국 전체가 분노했다.

국왕의 전사로 정신없는 남진과 거리가 먼 북미 연합국을 제외한 10개 제후국에서 대월을 피로 씻어야 한다는 청원이 빗발쳤다.

남진왕의 전사에 다른 제후국 군왕들이 모두 즉각적이고도 강경한 대처를 천명하고 나선 것은 그 일을 방관했을 때, 자신들의 생명도 그렇게 덧없이 다뤄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기회로 제후국 군왕의 죽음에 온 제국이 발 벗고 나서 징치를 가한다면? 자신들의 목숨은 그만큼 더 안전해 질 거라는 계산도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제후국들의 입장이 어쨌든 광해도 그냥 지나갈 수 없게 되었다. 황제의 깃발로 제후를 살해하고 보란 듯이 전시해 모욕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광해가 가장먼저 한일은 분노의 일성을 터트려 대월에 대한 정벌을 명한 것이 아니었다.

광해는 조용히 내금위장인 지세창을 불러 물었다.

“정글에서 싸우자면 어찌해야 하는가?”

태왕의 물음 속에 든 뜻을 재빨리 파악한 지세창이 답했다.

“정글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소신의 답이 정확하다 할 수는 없겠사오나 수림이 울창한 산악에서 전투를 벌여본 결과 화기의 효과는 크게 감소되옵니다.”

“하면 무엇으로 싸운단 말인가?”

“짧은 칼과 짧은 총, 그리고 지향뢰와 수탄이옵니다.”

“짧은 칼과 짧은 총은 알아듣겠네만 지향뢰와 수탄은 어찌? 화기는 효과가 크게 반감된다 말하지 않았는가?”

광해의 물음에 지세창이 답했다.

“함정입니다. 숲이 우거진 산속에선 예상외로 지향뢰로 구성한 함정이 효과적입니다. 적의 이동로로 예상되는 지역의 길목에 지향뢰의 뇌관과 연결된 실이나 철선을 늘어트려 놓으면 적이 지나가다 쾅!”

손을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형상을 만들어 보이는 지세창의 말뜻을 광해는 곧바로 이해했다. 지향뢰를 부비트랩으로 쓰겠다는 소리였으니까.

하긴 그러라고 안정성이 높은 뇌관이 개발되자마자 지향뢰에 부착하여 뇌관형 지향뢰를 만들어 낸 것이었으니까.

“하면 수탄도?”

광해의 물음에 지세창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니옵니다. 수탄은 유사시 숨어서 기다리던 적에 대한 투사무기로 활용해서 아군 병사가 대응할 시간을 벌거나 적의 공격을 차단하는 용도로 사용하옵니다.”

하긴 은폐나 엄폐를 한 상태에서 숨어있던 장소로 수탄이 날아들면 자리를 이동해 도망가거나 폭사 당할 테니까.

“그럼 그 네 가지만 갖추면 되겠나?”

“가장 중요한 것이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

광해의 물음에 지세창이 답했다.

“훈련된 병사들입니다.”

“훈련된 병사들이라면······. 산악부대 말인가?”

“정글과 산이 다르긴 하겠으나 일반 병사보다는 적응이 훨씬 빠를 것이옵니다.”

지세창의 답에 광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병제 전환과정에서 병력감축에 들어가야만 했던 조선군은 가장먼저 산악전단과 특수전단을 해체했다.

특수전단의 경우엔 단병격전병단을 제외한 소속부대들을 전부 존속시켜 각 전단으로 나누어 배치했지만 산악전단은 말 그대로 해체수순을 밟았다.

5개의 산악병단들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본토를 방어하는 1전단에 배속된 15산악병단과 서부3도에 배치된 3전단 예하 35산악병단뿐이었다.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흩어져 배치되었고, 다수의 산악부대 지휘관들은 현재는 대서양군 소속이 된 포르투갈 원정군 지휘관들로 임용되어 파견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이 현재 상황에서 동원할 수 있는 산악전투 전문병력은 그 2개 병단 2만에 불과했다. 물론 그것도 적은 병력은 아니었지만 적지로 원정을 떠나는 병력으로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광해의 생각을 표정으로 읽었던가? 지세창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자신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이면 충분합니다. 소신에게 맡겨주소서. 대월을 무릎 꿇리고, 죄를 치르게 하겠나이다.”

지세창의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광해가 준비를 지시했다.

해체되었던 산악전단이 부활했다.

비록 대월정벌기간에만 존재하는 한시적인 군사집단에 불과했지만 부대의 이름은 분명 산악전단이었다.

전단장은 내금위장에서 잠시 물러난 지세창이 맡았다. 그가 지휘를 맡은 산악전단 휘하로 15산악병단과 35산악병단이 임시 배속되었다.

이순신을 비롯한 원수부 고위 지휘관들은 우려를 표명했다. 원정군으로는 너무 수가 적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광해는 원수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해병대 소속 2개 여단을 추가로 배속시켰다. 다양한 작전환경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해병대의 특성상. 일정부분에서 산악전훈련을 받은 병력이라는 점이 참작된 선발이었다.

그렇게 3만으로 구성된 산악전단이 이순신 함대와 11, 12, 13 수송함대의 도움으로 곧바로 부산포에서 대월의 영토로 투입되었다.

보유함선의 상당수를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로 인도한 수송함대들은 3만의 병력을 수송하는 데 남은 함선들 전체를 동원해야만했다.

그 결과 9월 중순, 산악전단은 해병대 2개 여단을 앞세워 대월 땅 동부 해안에 위치한 할롱에 무사히 상륙했다. 실제역사에서 제국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베트남 땅에 조선군이 발을 디딘 것이었다.

*****

조선군이 대월의 할롱에 상륙하기 7개월 전인 2월. 이제 19살의 이치원이 왕립군관학당을 졸업하고 내금위로 배속되었다.

16살에 왕립군관학당을 입학해 가문의 이름을 빛냈다는 칭찬을 들었던 이치원은 태왕을 지근거리에서 지키는 내금위가 되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런 그가 동기 한명과 함께 배속된 곳은 그 이름조차 생소한 내금위 산하 특수비행대라는 부대였다.

특기가 검술이었던 그들이 왜 비행대로 배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 배속된 이치원과 동기 외에 2명의 부대원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육군 비행대 출신의 전문가들이었다.

내금위 소속이기 때문인지 전원이 9품, 사용 이상의 군관들로만 구성된 이 특수비행대는 ‘01열기구’를 운용하는 내금위 비행대와는 완전히 다른 부대였다.

근무지도 왕궁이 아니라 장원이라 불리는 조선 신문물 개발원이다.

처음엔 별로 하는 일도 없었다. 하루 4시간의 내연기관 운용 및 정비 교육과 아무것도 없는 격납고를 쓸고 닦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석 달이 지난 어제, 드디어 특수비행대에 요상하게 생긴 비행체가 하나가 배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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