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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27화 (227/325)

제227화. 여군 창설

포르투갈 점령전 초기, 대한제국군이 사용할 총탄과 포탄을 현지에서 야전생산하기 위해 싣고 온 시설들이 그대로 총독부 관할로 남아있었다.

이억기는 그 시설을 활용하여 초기형 폭발탄의 생산이 가능한 것이지 총독부로 확인을 요청해왔다.

대서양군 사령관의 요청을 받은 기자헌이 해당 시설로 직접 움직였다.

리스본 주재 야전총포탄 생산 시설이라 이름 붙여져 있던 해당 시설은 현재는 가동되고 있지 않았다.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이 보급품 수송에 투입된 이래로 대규모 보급이 가능해짐으로써 대한제국군도 전량 조선으로부터 보급 받은 총탄과 포탄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당 시설을 남겨둔 것은 조선과의 보급로가 끊어졌을 때를 대비한 전략 생산시설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 시설들은 사용하지 않는 장비임에도 조선인 기술자가 배치되고, 매일같이 정비를 거쳐 언제라도 사용이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곳을 방문한 기자헌은 기술자들과 함께 대서양군 사령관이 요청한 초기형 폭발탄 생산이 가능한지를 검토했다.

유럽이 초선포라 부르는 조선 철포와 대한제국군이 사용하는 이포는 완전히 다른 포였다. 따라서 포탄의 크기는 물론이고, 길이도 다르고 장전방식과 사용 화약도 완벽하게 달랐다.

그런 연유로 검토결과 해당시설로는 초기형 폭발탄의 제조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초기형 폭발탄의 제조 시설의 경우, 현재 조선의 공작기술로 구현이 어려운 것은 아니라서 리스본에 있는 야전총포탄 생산시설이 보유한 장비와 시설로 제작이 가능할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

총독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해당 시설의 제작을 지시했다.

총독의 요청을 받은 리스본 주재 야전총포탄 생산시설 기술자들은 5일 만에 초기형 폭발탄 제작시설을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조선의 기술이 얼마나 발전해 있는지, 조선의 기술자들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뛰어난 능력을 습득하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총독의 치하 속에 그렇게 만들어진 시설로 조선 철포, 그러니까 초선포용 폭발탄 제작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에서 현지 생산되는 흑색화약을 사용한 폭발탄이었다. 그 사실을 전달받은 에스파냐 영사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얼굴로 해당 소식을 본국으로 전했다.

리스본 주재 자국 영사의 전갈을 받은 에스파냐 왕실은 커다란 기쁨 속에 상당량의 화약을 리스본으로 보내왔다. 폭발탄에 사용될 화약으로 써달라는 뜻이었다.

얼마 후, 1차분으로 생산된 2천발의 초선포용 폭발탄을 실은 2척의 조선무역선이 왕무급 호위함 2척의 호위 하에 오스텐트로 향했다.

조선이 제공한 폭발탄을 사용하게 된 에스파냐군은 기대와 달리 네덜란드군을 제대로 밀어붙이지 못했다.

여러 전투에서 폭발탄을 이미 사용해본 덕에 효과적인 사용방법을 알고 있던 네덜란드군과 달리 에스파냐군은 처음 사용해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취급주의사항 몇 가지만 전달받은 에스파냐군 포병들은 폭발탄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거기다 에스파냐군 지휘관들도 폭발탄의 효과를 제대로 내는 작전을 구사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 에스파냐군도 제대로 된 폭발탄 사용방법을 익히고 그것을 전투에 써먹겠지만 그사이에 입는 피해는 적지 않을 터였다.

그로인해 에스파냐에서 조선으로 군사고문단 파견을 요청했지만 거부되었다. 아무리 군사고문단일지라도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간의 전투에 조선군 병력을 보내지 않겠다는 광해의 결정 때문이었다.

대신 에스파냐 포병을 리스본으로 보낼 경우 교육시켜 줄 수 있다는 제의를 했고, 에스파냐는 신속히 백여 명 정도의 포병들을 뽑아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최고 사령부의 명령을 받은 대서양군 사령부가 그렇게 리스본에 도착한 에스파냐군 포병들의 훈련을 맡았다.

그렇게 에스파냐군 포병들이 리스본에서 훈련에 임해있던 시기, 조선에서도 제후국들이 보낸 병력이 조선 해병대 훈병원에서 강화훈련에 돌입해 있었다,

이번에 소집된 병력은 한성 조약에 의거하여 상비군으로 보유하고 있던 나머지 1만의 대한제국군 병사들이었다.

그들 속에는 대월 정벌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남진군 소속 병력도 있었다. 소집 면제를 요청해 올 것이라던 예상을 깨고 남진은 병력을 제대로 보내왔던 것이다.

대월과의 전선에 동원한 5만 병력에 더해 이미 대서양군에 복무중인 병력이 2만, 그리고 이번에 소집된 병력 1만까지 합해 남진은 자그마치 8만의 병력을 소집해서 운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라의 규모와 국력에 비춰보면 그건 분명 무리였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광해는 두말없이 그들을 받아 들였다.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남진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아 선례로 삼았다.

향후 제후국들은 자국의 사정을 핑계로 조선의 대한제국군 병력 소집을 거부할 수 없게 된 셈이었다.

그렇게 소집된 대한제국군 병력에는 조선군도 섞여 있었다.

이번에 소집된 조선군은 전원이 모병제로 선발된 인원이라는 점이 특징이었다. 그간 진행해오던 모병제 전환 작업이 완료되어 올해로 징병제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모든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전쟁이 벌어져서 총력전이 선포된다면 또 다시 징집이 벌어지겠지만 그전까지는 원하는 자만 군대에 가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로인해 일부 포도청에서 근무하던 징병 사병들도 내년이면 완전히 제대해서 사라지게 되어있었다.

이번에 소집된 대한제국군에 포함된 조선군의 규모는 균등의 법칙에 따라 제후국들이 소집해 보낸 병력과 마찬가지로 1만에 달했다.

이들은 다른 제후국 병사들과 똑같이 훈련받고, 똑같이 근무하게 될 터였다.

모병제에 의한 조선군 의무복무기간이 7년이므로 이들은 대서양군 복무를 마친 이후에도 군 생활을 조금은 더 해야 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본인이 희망하고, 근무 평점이 평균이상이라면 추가 근무도 가능했다.

조선은 여전히 변화와 개혁이 연이어 벌어지는 세상이었다. 상전벽해라고 1년 전의 조선과 지금의 조선은 또 달랐다.

그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조선에서 올해가 징병제가 폐지된 해라면, 내년엔 조선의 선거가 확대되는 해였다.

현재 조선은 해외 8도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시장까지 모두 백성들이 뽑는 간선제가 실시되고 있었다.

가장 말단지방 관리에 속하는 이장은 백성들이 직접 뽑고, 그 이상의 관리는 그렇게 뽑힌 이들이 차례차례 뽑아서 올라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찰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단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이장부터 출마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이장에 당선되고, 다시 이장들끼리 모여 자신들 중에 읍장을 뽑고, 그렇게 뽑힌 읍장들끼리 모여 시장을 선출한다.

지금까지는 여기서 끝났지만 내년부터는 그렇게 선출된 시장들끼리 모여 서로에 대한 토론과 평가를 거친 후, 시장들의 투표로 관찰사를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이미 몇 차례의 경험을 거친 백성들은 이장을 뽑는 것에 신중했다. 자신이 뽑은 이장이 읍장이나 시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젠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장들이 된 이들이나 읍장들이 된 이들도 투표에 신중했다.

자칫 잘 못 뽑아놓으면 몇 년간 다른 시, 또는 다른 읍에 비해 뒤쳐지는 자신들의 동네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주거 이전의 자유가 주어져 있다지만 아직은 거주지를 이동하는 경우가 현대시대에 비해 극히 드물었다.

산업시설들을 각지로 골고루 배분하는 광해의 정책 덕에 황도인 신의주와 철산단지, 그리고 거제 건선단지를 제외하고는 인구가 집중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마을에서 혼인을 하고, 직장을 얻어 계속 살아가는 백성들의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자신이 사는 마을이 뒤처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들 했다. 남들보다 앞서나가지는 못해도 비슷하긴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장을 뽑는 것에 신중을 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명성만으로 뽑히는 일이 확 줄었다.

현대시대에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조선의 문인들이 이장선거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던 것도 다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글공부 잘한다고 마을 일을 잘 보는 게 아니라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다.

더구나 올해부터는 시장 이상에 선출되는 사람은 반드시 군복무 경험이 있어야만했다.

이전엔 조선 사내라면 무조건 군대를 가야 했으니 이 조항이 필요 없었지만 이젠 원하는 사람만 군대를 가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조항이 성문화 된 것이다.

이것이 요구된 것은 총력전 상황에서 관찰사와 시장이 지역방어 사령관을 겸임하게 되기 때문이다.

총력전이 선포되면 정규군에 이어 예비군 전체가 전장에 투입되기 때문에 본토에 군 지휘관이 극히 드물어진다.

이때 관찰사와 시장들이 50세 이상의 사내들로 조직되는 방어부대를 이끌고 각자의 고을을 지켜야하는 것이다.

총력전 상황이라는 것은 그 이하 나이대의 팔팔한 사내들은 모조리 전장으로 끌려감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백성들도 동의하는 편이었다. 한데 여성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 시기, 조선의 여성들도 선거권은 있었지만 아직 피선거권은 얻지 못했다.

교육받은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직장을 갖는 여인들의 수도 광해가 왕이 되기 이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늘었다.

광해가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장려한 까닭이다. 그렇다보니 여성에게도 피선거권을 달라는 요구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고 긍정적으로 검토가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장 이상에 선출되려면 군복무 경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항목이 추가로 붙자 여성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조선은 여군제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 조건을 충족해서 시장 이상의 피선거권을 얻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로인한 여인들의 불만이 얼마나 높았던지 병무부가 아니라 국내 문제를 다루는 국토부가 해당 사안을 의정부 회의에 정식안건으로 올렸을 정도였다.

각부 대신들의 회의인 의정부 회의에서 다뤄진 이 문제는 결국 태왕이 주제하는 대전 조회에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이 사안에 대해 원수부의 첫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화약무기로 중무장한 조선군이지만 아직까지도 실전 상황에선 창, 칼 같은 살수무장을 동원한 육박전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데 체력적 차이가 명확한 여인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나마 시설문제나 성범죄 따위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서 광해가 원수부의 반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원수부의 반대로 이 사안이 묻힌 것은 아니었다. 왕위에 등극한 이후 지속적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을 장려해온 광해가 중재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전투 병과는 적응 상황을 보아가며 차차 도입하기로 하고 보조 병과로 일부 인원을 선발하여 배치하는 것은 어떻겠소?”

태왕의 의견이었다. 해보지도 않고서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이순신이 몇몇 보조 병과를 뽑아 계획을 세워 보고하겠다는 것으로 안건이 마무리 되었다.

광해가 지독한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게 내려있던 조선에서 여러 반대에 부딪쳐 가면서도 여성의 사회진출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사실 그가 여성권익 신장에 큰 뜻을 품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는 여성권익 신장보다는 지극히 실익적인 부분이 컸다.

조선은 고질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그 만큼 일자리도 폭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경제활동 인구가 늘어날수록 경제규모가 커진다. 인구를 늘이는 것보다 기존의 여성들을 사회로 진출시킴으로써 인구증가로 발생하는 부작용들을 줄이면서 경제활동 인구를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조선 여성들의 권익도 높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였다.

광해는 적어도 후손들이 여성권익에 있어 후진국 소리는 듣지 않길 바랐다. 그런 광해의 생각 덕에 조선에 여군 제도가 도입되는 기회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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