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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26화 (226/325)

제226화. 5개의 전쟁

네덜란드군이 첫 공격을 가했던 것은 에스파냐군이 오스텐트에 상륙한지 7일만이었다. 그리고 그 첫 공격 에서 엉망이 된 군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물러나 재편성에 소요된 시간이 또 하루였다.

그렇게 재편성을 끝낸 네덜란드군이 다시 접근했을 때 그들은 에스파냐군 2진이 상륙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상륙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해안가에 대한제국 깃발이 휘날리는 범선 4척과 에스파냐 깃발이 나부끼는 범선 4척이 포선을 이루고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돌격은 지나친 피해를 양산할 뿐이라는 지휘관들의 판단에 따라 네덜란드군은 차라리 상륙작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에스파냐군은 생존한 7천의 병력에 다시 1만5천을 더해 2만2천으로 병력을 늘였다. 상륙을 마친 대한제국 함대는 오스텐트 해안을 떠나 다시 에스파냐의 산탄데르를 향해 출항했다.

하지만 에스파냐 깃발이 나부끼는 범선 4척은 떠나지 않고 그대로 해안에 남았다.

조선의 악마배가 없다뿐이지 네덜란드의 첫 공격 시작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게 된 것이다. 자그마치 4백에 달하는 자살 공격조가 목숨을 바쳐 이뤄냈던 네덜란드군의 우세가 사라진 셈이었다.

똑같은 방법을 다시 써먹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네덜란드군 지휘부에서 거부되었다. 에스파냐군이 바보도 아니고 똑같은 방법에 다시 당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박해 있는 에스파냐 범선들 주변에 무장한 군인들이 타고 있는 작은 보트들이 띄워져 있었다.

그들을 뚫고 에스파냐 범선까지 화약주머니를 짊어지고 헤엄쳐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네덜란드군은 정면 대결을 벌이던가 물러나야 할 상황에 처했다.

네덜란드군 지휘관들은 격렬한 논의 끝에 물러나서 에스파냐군이 점령전을 펼치기 위해 해안가를 벗어났을 때를 노리기로 했다.

그렇게 네덜란드군이 기다리는 사이 에스파냐군은 대한제국 포르투갈 총독부의 지원 하에 두 번에 걸친 추가 상륙을 실시했다.

그렇게 상륙이 마무리된 4월 말엔 오스텐트에 에스파냐가 구축한 상륙거점엔 5만2천에 달하는 대병이 전개되었다.

그것으로 대한제국 포르투갈 주둔군 소속 조선무역선들의 에스파냐군 병력수송 임무가 끝이 났다.

별도의 추가 보급품 수송은 없었다. 한 번의 수송에 3만의 병력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규모의 조선무역선들이 동원되었음에도 1만5천씩 수송되었던 이유가 보급품들과 함께 수송한 까닭이었다.

사실 조선무역선 1척에 수송 가능한 병력은 완전무장한 병력 3백이었다. 조선의 병력 수송 방침 상, 이 병력수송 규모에는 해당병력이 보름간 먹고,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보급품이 포함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1만5천씩 태웠다는 것은 그 이상의 보급품을 함께 수송했음을 뜻했다. 그것은 에스파냐가 네덜란드 점령에 얼마나 큰 공을 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에스파냐군이 오스텐트 해안가에 건설한 요새를 나와 본격적인 네덜란드 점령전에 돌입한 시점은 북미 연합국을 광해가 조선의 제후국으로 선포하던 5월초였다.

네덜란드에서 지키려는 이들과 차지하려는 이들 간의 전투가 벌어지던 시기, 휴스턴에서는 에스파냐 점령지들에 대한 인수 작업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전신으로 도착한 펠리페 3세의 명령을 에스파냐 점령지 지휘부가 믿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긴 이들은 전신이라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으니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휴스턴 지휘부는 강압대신 시간을 선택했다. 이미 에스파냐 본국에서 왕의 명령서를 휴대한 관리가 이곳으로 출발했다니 그가 도착하길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에스파냐 점령지 지휘관들도 왕의 명령서를 가진 관리가 도착한다니 그때까지 푸에블로족에 대한 탄압이나 강압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조선군은 군의를 보내 이주 과정에서 에스파냐군과 충돌해 부상당한 푸에블로족 사람들을 치료하도록 했다.

에스파냐 점령지 지휘관들은 그것까지는 용인했다.

북미지역에서 에스파냐 점령지의 인수가 지지부진 하던 6월 중순, 거제 건선단지에서 계획보다 조금 늦게 3차분 일칠함대가 진수되었다.

건조된 함들은 모두 4개 함대 분으로 태조급 전함 4척, 유리급 순양함 16척, 온조급 구축함 32척,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16척으로 총 68척에 달했다.

이 함선들은 해군 재편 계획이 일정보다 늦어진 까닭에 인수 항해를 생략한 채 진수와 동시에 실전배치가 이루어졌다.

함선들은 동해를 담당하게 된 1함대, 남해와 제주 해역을 담당하게 된 2함대, 일본 열도 전 해역을 담당하게 된 3함대, 그리고 북해도를 제외한 해외영토의 방어를 담당하게 된 5함대에 1개씩의 일칠함대가 나누어 배치되었다.

흔히 4함대라 불리는 연안경비단은 그 임무특성에 맞게 서해경비단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해경비단은 현재 한창 건조가 진행 중인 정경달급 경비선이 완성되는 11월에 함종 교체가 예정되어있었다.

그렇게 조선에서 해군의 재편이 완료되던 6월 말, 드디어 원주민의 도움을 받은 휴스턴 탐사대 중 하나가 헬륨 매장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 소식은 지체 없이 조선으로 전해졌다. 광해는 마침 개발이 완료된 대량 채굴기술과 장비를 즉시 현장으로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일부 함정의 호위를 받으며 2척의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에 장비와 인력이 실려 부산포를 떠나던 날, 신세계항에 전개되어있던 2개 해병여단이 북미대륙 서부지역에 대한 점령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들은 연초에 개최되었던 확대 문무백관회의의 결정에 따라 2월에 포항을 출발해 신세계항으로 향했던 해병강습함대에서 상륙한 부대였다.

현재 해병강습함대는 그들을 내려두고 다시 포항으로 이동 중이었다. 추가 상륙을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이 작전에 총 5개 여단, 2만5천의 조선 해병대를 투입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 병력을 동원해서 조선은 북미 대륙의 로키산맥 이서지역을 모두 점령하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휴스턴과 헬륨 사건이후 광해는 현대시대에 사용되던 지명이나 명칭을 쓰는데 이전에 비해 주저함이 없었다.

이전엔 가능한 현대시대의 용어가 아니라 새로이 조선식의 이름을 붙이려 노력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행보였다.

그것은 굳이 인위적으로 만들기보다는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광해 자신이 실수든, 고의든 말해버린 단어가 사용되어도 무방했고, 개발자나 발견자가 붙인 새로운 이름을 써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까닭이었다.

그런 광해의 생각 덕에 로키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게 된 로키산맥을 기준으로 대한제국은 북미대륙을 동부와 서부를 나누었다.

따라서 그렇게 나눈 서부지역은 모두 조선의 단독 점령지로, 동부지역은 대한제국의 점령지로 정해둔 것이다.

물론 포르투갈 점령에서 그러했듯이 동부의 대한제국 점령지에서도 조선의 몫은 다른 제후국보다 많을 것이다.

점령군의 무장과 대부분의 함정을 조선이 대고, 또 대량의 보급품들 중 상당수를 조선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4할 가까운 보급품은 각 제후국이 각출하여 공급한다지만 기여도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니 제후국들도 조선이 점령지의 절반에 달하는 지역을 차지하는 것에 이미 동의한 상태였다.

이 시기 조선이 관여하거나 개입한 전쟁은 모두 5개로 늘어있었다.

북미에서 벌어지는 점령전이 3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네덜란드와 대월에서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왕의 배려로 지상군용 일포까지 도입한 남진군은 화력면에서 대월군을 압도하고 있었음에도 예상외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울창한 정글을 이용한 대월군의 게릴라 전술에 휘말려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역사에서 프랑스와 미국이 쓰디쓴 패배의 잔을 마셔야 했던 상황을 남진군이 고스란히 맞닥트린 것이다.

대월군은 왕실까지 정글로 도주한 상태에서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었다. 자그마치 5만의 대병을 동원한 남진이 맥을 못 추는 이유였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네덜란드 점령전에 나선 에스파냐도 마찬가지였다.

자그마치 5만2천에 달하는 대병과 막대한 물자를 쏟아 부었음에도 에스파냐군은 네덜란드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대규모 인명손실만 보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전과를 거두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잉글랜드로부터 복제한 폭발탄이 있었다.

같은 초선포를 사용하는 양국군의 파괴력이 이 폭발탄이라는 포탄으로 극명하게 갈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함대함 전투용으로 개발된 화염탄 한 종류뿐이라지만 폭발탄이 폭발하면서 비산하는 쇳조각과 화염은 보병들에게도 치명적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네덜란드군의 자살 공격조에 의해 피해를 입은 구축함을 빼내고, 새롭게 배치된 온조급 구축함의 전신을 통해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받고 받고 있던 대서양군 사령부는 에스파냐군에 대한 지원 가능 여부를 조선군 최고 사령부에 문의했다.

이억기는 초선포가 사용할 수 있는 폭발탄을 제공할 수 있는지 물은 것이다.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대한제국군이 도운 에스파냐군이 고전하는 것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사실 이때쯤엔 온 유럽이 조선과 혼인 동맹을 맺은 에스파냐를 조선과 동일 선상에 놓기 시작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스파냐의 뒤에 조선이 있다는 식의 생각이 유럽에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새롭게 포르투갈 총독으로 부임한 기자헌은 달리 생각했다.

유럽에 포르투갈 홀로 외롭게 있는 것 보다는 에스파냐를 마치 조선의 꼭두각시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만들어서 다른 유럽 여러 나라들에 대한 방패막이로 삼자는 안을 내놓았던 것이다.

그것에 대서양군 지휘부가 동의하면서 유럽에 퍼지고 있던 오해를 그냥 방치해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금 에스파냐군이 네덜란드 전쟁에서 겪고 있는 실패가 조선의 실패처럼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이억기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이억기의 문의에 회의를 거친 최고 사령부는 태왕의 명으로 그것을 허락했다. 다만 에스파냐에 공급하는 폭발탄은 초기에 조선군이 사용하였던 것을 제공하도록 제한했다.

현재 조선이 생산해 사용하는 포탄은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지만 사용된 화약을 기준으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갈색화약을 채용해 개발된 포탄으로 조선에서는 이 종류의 포탄들을 2차 개발포탄이라 부른다.

후장식인 이포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이 2차 개발포탄부터 탄두, 장약 일체형인 종이탄피 포탄이 생산되었고, 화염포탄과 산탄포탄에 더해 확산포탄도 생산되었다.

이 2차 개발포탄은 현재 대한제국군이 보유한 무기와 제후국에 판매된 무기에 공급된다.

두 번째는 버드나무 목탄이 채용되어 발화속도가 빨라진 갈색화약을 사용한 3차 개발포탄이다.

금속탄피형 포탄이 이 포탄으로 제작되었고, 조선군에 보급되어 있는 작렬탄도 이 포탄 종류에 든다.

요사이 장원에서는 최근에 들어서야 완전히 개발이 끝난 파우더형 무연화약을 이용한 각종 포탄이 개발 중이었는데, 그 개발들이 끝나면 4차 개발포탄으로 명명될 예정이었다.

여하간 태왕은 지금은 조선에서 완전히 생산이 중단된 1차 개발포탄, 그러니까 20년 전 벌어졌던 임진왜란에서 시작해 이포가 개발되기 전까지 조선군이 사용했던 포탄에 한정해 에스파냐에 공급을 허가한다는 명령을 내려 보냈던 것이다.

하긴 마카오에서 습득한 일포(야포)용 폭발탄을 복제한 잉글랜드도, 또 그런 잉글랜드로부터 확보한 폭발탄을 복제한 네덜란드도 굳이 조선식으로 구분하자면 1차 개발포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성능상의 차이는 없긴 했다.

하지만 그런 태왕의 결정이 대서양군 사령부에 전달되자 문제가 발생했다.

대서양군에 배속된 대한제국군이 보유한 포탄이 모두 2차 개발포탄으로 생산된 개량형 포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스본과 퀘벡 양쪽에 조성되어있는 전략물자 창고에 사전 전개되어 산처럼 쌓여있는 대량의 보급품들은 모두 그에 맞춰져 있었다.

오히려 조선군 대서양 함대에서 사용하는 3차 개발포탄으로 만들어진 작렬탄은 보유하고 있었지만 정작 에스파냐에 보급해줄만한 1차 개발포탄은 전혀 보관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억기가 리스본의 총독부로 전신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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