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이항복의 제의
조선의 의지를 확인한 하비에르 후작은 당혹했다.
그가 위험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선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겠다고 나섰던 것은 에스파냐가 북미 대륙에 대한 조선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당근을 조선이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회심에 찬 하비에르 후작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하비에르 후작은 수많은 말들로 조선의 외교부 대신을 설득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태왕의 지시를 받은 외교부 대신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하비에르 후작은 조선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그 결과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뻔히 아는 하비에르 후작은 절망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곁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았던 이항복이 그런 하비에르 후작과의 대화를 청했다.
이항복의 안내로 총독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하비에르 후작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있었다. 손수 차를 내어 후작의 앞에 놓아준 이항복이 물었다.
“에스파냐가 북미 대륙에 개척도시를 반드시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영토를 보존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이니까요.”
“그렇긴 합니다만 현재 북미 대륙에서 나오는 이익은 극히 미미한 것으로 압니다만.”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조선과 척을 지면서까지 북미 대륙의 개척도시를 고수하시는 것 보다는 희망봉항을 인수해서 동방 무역에 다시 너서는 것이 이익이 아닌가 하여 여쭙는 것입니다.”
“희망봉항만 확보한다고 동방 무역로에 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시대의 무역로는 보급을 위한 기항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항해를 지속하기 어렵다. 포르투갈이 마치 징검다리처럼 해외 식민지를 점령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조선도 유럽으로 향하는 항로를 만들면서 보급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징검다리 형태로 점령지를 늘려나갔던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이항복이 물었다.
“보급 거점 때문이라면 제가 도움을 조금 드릴 수 있을 듯도 합니다만.”
이항복의 말에 하비에르 후작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깃들었다.
“귀국의 외교부 대신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그건 아국의 외무대신이 다시 연락을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걱정이 있으시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만.”
“제가 아국 국왕 폐하께 워낙 장담을 하고 온 터라······.”
“하면 제가 후작님께 명분을 하나를 드리면 어떨까 합니다만.”
“명분······이라면 어떤······?”
의아하게 묻는 하비에르 후작에게 이항복이 말했다.
“최근 네덜란드가 혼란에 빠져있지요. 특히 남부는 완전히 경제와 사회가 무너져서 아비규환이 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긴 합니다만······.”
네덜란드는 조선과의 전쟁 이후 완전히 무너졌다. 해변을 따라 조성된 도시가 파괴되면서 애써 쌓은 둑이 무너진 탓에 저지대가 침수되어 농경지의 대부분이 바닷물에 잠겼다.
하지만 둑을 수리할 수도 없었다. 조선군 함선이 수시로 나타나 조금이라도 수리된 지역이 보이면 가차 없이 포격하여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해안에 나타난 조선군 함선의 포격이 닿지 않는 곳에 둑을 쌓기로 하고 건설을 시작했지만 조선군은 그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해안으로 바짝 붙은 배에서 일단의 소규모 해병대가 상륙하더니 그렇게 건설된 둑을 폭파시켜 버린 것이다.
그들을 막아야 하는 네덜란드군은 감히 나서지 못했다. 자칫 그렇게 벌어진 충돌이 이전과 같은 대규모 조선군의 상륙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최대도시였던 암스테르담은 지금도 복구되지 못했다. 해병 기마대의 살상과 파괴로 완전히 아비규환의 장이 되어버렸던 남부의 상처도 지독하게 깊게 남았다.
그런 일들을 다시 반복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마우리츠를 비롯한 네덜란드의 위정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리스본으로 사절을 보내 조선과의 화해를 수차례 시도했지만 매번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조선은 네덜란드가 제의한 수많은 조건을 모두 거절했다. 마지막 시도에서는 네덜란드에 대한 조선의 지배를 용인하겠다는 의사까지 전달했지만 그조차도 거부되었다.
광해는 복구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갈 네덜란드를 떠안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막대한 자금을 들여 복구해서 살만해지면 다시금 독립전쟁에 나설 네덜란드인들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네덜란드의 혼란 상황은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최근엔 프랑스에 통합을 청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을 정도로 네덜란드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어떤 나라도 네덜란드를 돕거나 도모하지 못했다.
그 행동이 자칫 조선과 전쟁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온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의 네덜란드 문제를 갑자기 조선의 포르투갈 총독이 거론했으니 의아한 것은 당연했다. 그 탓에 궁금한 표정이 가득한 하비에르 후작에게 이항복이 말을 이었다.
“그 네덜란드가 과거 에스파냐의 영토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요. 무도한 자들이 대항을 하기 전에는 그러하긴 했습니다만······.”
“다시 찾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다시······, 찾아요?”
“예.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만.”
“조선이 네덜란드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전혀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벌써 병력 투입해서 점령했겠지요.”
“그럼······?”
“에스파냐가 원하신다면 조선은 네덜란드에선 완전히 손을 떼겠습니다.”
이항복의 말에 하비에르가 잠시 반색을 보였다.
독립 이전엔 상당한 세금을 걷어 들여 에스파냐의 곳간을 살찌웠던 곳이 바로 네덜란드였기 때문이다. 그 때엔 상당수의 귀족들도 다수의 네덜란드 사업에서 상당한 수익을 거두었다.
하비에르 후작의 가문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으니 하비에르 후작이 이항복의 제의에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네덜란드 공략은 여러 가지 난제가 존재했다. 실제로 에스파냐가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난제들 때문이다.
그것을 떠올린 하비에르 후작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런 하비에르 후작에게 이항복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네덜란드를 도모하자면 육군병력을 투입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지리적인 문제가 가득합니다. 당장 우리 에스파냐와는 적대관계인 프랑스를 지나야 하니까요.”
“상륙작전을 펼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만?”
이항복의 물음에 하비에르 후작이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우리 함대가 바다로 나서면 당장 잉글랜드와 프랑스 함대가 저지하러 나설 것입니다.”
포르투갈 전쟁 초기 조선과의 해전을 거치며 북부에 존재하는 에스파냐의 주력 함대는 완전히 분쇄되었다.
최근 들어 재건이 다시 시도되고 있었지만 아직 몇 척에 불과해서 잉글랜드나 프랑스의 함대와 결전을 벌이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사실 포르투갈 전쟁 당시 남부지역의 함대를 불러올려 조선 해군과 결전을 벌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펠리페 2세 시절부터 집중 육성되어 강력했던 북부의 함대가 패배한 상황에서 그 규모가 절반에 불과한 남부 함대를 불러올리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었기에 그 계획은 중단되었다.
더구나 남부의 함대를 그렇게 불러 올렸다가 그마저 잃을 경우 지중해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벌이는 경쟁에서마저 도태될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에스파냐의 주력함대였던 북부함대가 건재할 때도 잉글랜드와 프랑스 함대와의 전투는 사실상 회피되고 있었다.
이동속도가 둔중한 수송함대를 호위하며 양국 함대와 결전을 벌여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제대로 병력을 투입하지 못한 채 고전한 진짜 이유였다.
그런 고충을 슬쩍 내비친 하비에르 후작에게 이항복이 귀가 솔깃한 제의를 내놨다.
“병력 수송을 도울 수 있는 지 알아봐 드릴까요?”
이항복의 그 말에 하비에르 후작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그렇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기대에 찬 하비에르 후작의 물음에 이항복은 미소를 그렸다.
사실 에스파냐군을 수송하기 위해서 대서양 함대에 지원을 요청할 필요도 없었다.
총독의 지휘권이 미치는 포르투갈 주둔 함대인 연합전대에는 1백 척에 달하는 조선무역선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배들은 주둔군을 태우고 왔던 선체들로 지금은 포르투갈 내 해상 운송에 투입되어 있었다.
조선은 그 배의 선원들을 차례차례 조선의 정식 영토가 된 남포르투갈도 사람들로 교체하여 해당 함선들에서 근무하고 있는 조선 본토인들을 점진적으로 귀국시킬 예정이었다.
그것을 위해 현재 남포르투갈 선원들이 한창 교육 중이었다.
태왕에게 허락을 구할 수 없는 이유로 하비에르 후작을 돕고자 하는 이항복은 그 배들을 잠시 동원해볼 생각을 가진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빙긋이 미소를 그리는 이항복에게 하비에르 후작이 바짝 다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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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후작은 조선과의 협상에 실패한 채 귀국했다. 당연히 국왕과 온건파의 비난과 조롱이 따라야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하비에르 후작이 생각지 못한 선물꾸러미를 가지고 온 까닭이었다.
일단 조선으로부터 인수하게 될 희망봉항을 중심으로 한 동방 무역로 상의 조선 점령지 항구에 대한 기항 가능 여부를 협의할 수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아직 구체적인 사항은 결정되지 않았지만 잉글랜드 수준에서 체결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포르투갈 총독의 약조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선물은 에스파냐의 네덜란드 공략에 대한 조선의 지원, 정확히는 포르투갈 총독부의 지원이 약조된 것이다.
더구나 그 약조에는 한번에 1만5천 명 가량의 육군을 수송할 수 있는 수송함대의 지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한 에스파냐 왕실은 곧바로 후끈 달아올랐다.
얄미운 네덜란드를 다시금 꿇어앉힐 절호의 기회를 가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에스파냐는 하비에르가 가져온 선물을 덥석 받기로 결정했다.
그 소식을 리스본의 이항복에게 전한 에스파냐는 하비에르 후작을 사령관으로 삼아 군대의 동원을 선포했다.
엉망이 되어 있다고는 해도 고질적인 반발세력이 뿌리 깊은 네덜란드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의 투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에스파냐가 이번 전쟁에 6만의 대병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병력 동원에 나선 것이다.
그간 포르투갈을 점령한 조선군과의 재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 병력을 준비해 두었던 에스파냐로써는 이미 준비해 두었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기에 부담이 크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과는 화해를 한데다 자국의 공주가 조선의 태자비로 결정되기까지 했기 때문에 조선과의 전쟁 위험은 훨씬 낮아진 상황이었다.
그것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원정에 나서는 것에 대한 위험부담을 줄여주었다. 그에 따라 에스파냐는 북부 항구도시인 산탄데르에 동원된 육군 병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