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도움을 주는 자들
원정임무를 맡은 대서양군 소속 원정군은 대한제국 제후국 입장에서 파견한 북미 연합국 출신 대한제국군 병사들을 길잡이 삼아 북미 대륙에 대한 점령 작전을 조금 더 수월하게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퀘벡을 중심으로 점령 작전이 시작되던 시기 작년 9월에 부산포를 출발했던 해병 개척단이 북미 남쪽, 현대시대로 보면 텍사스 휴스턴이 있던 지역에 개척도시를 건설하고 본격적인 헬륨 매장지 탐색에 나섰다.
하지만 퀘벡 쪽에선 와이언도트족의 협력을 얻어낸 것과 다르게 휴스턴에 상륙한 조선군은 원주민들과 적지 않은 충돌을 벌여야만 했다.
경호부대로 딸려 있던 2백의 해병대가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매번 격퇴하는 것에 성공하긴 했지만 피해도 적지 않아서 20여명 가까운 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해병 개척단을 공격한 원주민들 중에는 코만치와 아파치, 나바호 등 광해의 귀에 익숙한 원주민 부족들이 끼어있었다.
원주민들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처음엔 해병 개척단도 대화와 협상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화와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해만 누적되자 결국 해병개척단장은 방어위주의 정책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해병 개척단장은 1개 대, 1백 명의 해병을 동원해서 개척단을 공격한 원주민 부락을 찾아 괴멸시키는 말살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잔인해지기로 마음먹으면 세상의 그 어떤 나라, 어떤 민족들보다 처절해지는 동북아 민족들로 이루어진 조선군이었다.
더구나 해병 개척단장의 명에 의해 전원을 기마 가능자로 구성한 1백인은 시추장비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해 수십 대의 마차와 함께 수송되었던 3백 필의 말들 중 일부를 타고 기동했다.
그렇게 기병화 된 해병대의 말살정책이 시작된 이래 단 열흘 만에 휴스턴 주변의 13개 원주민 부락이 몰살당했다. 조선군을 공격한 전력을 가진 부락은 개미새끼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다.
조선군의 공세가 어찌나 거칠고 사나웠던지 용맹하기로 소문이 난 인근의 한 코만치 부족이 처음 휴스턴 개척도시로 전령을 보내 협상을 제의해왔다.
북미 남부 원주민들과의 첫 외교적 협상이었다.
이 협상은 에스파냐 원정단과 접촉하며 에스파냐어를 배운 한 푸에블로족 원주민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평소 친분관계를 유지해오던 코만치 부족의 도움 요청에 의해 먼 길을 온 자였다.
그 푸에블로족 원주민과 개척단 통역병을 사이에 두고 코만치족의 한 부락과 해병 개척단이 협상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협상에 나선 코만치족의 한 부락은 퀘벡 일대의 북미 원주민들과 동일한 요구를 받았다. 북미 연합국에 가입하고, 대한제국의 점령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엔 강하게 반발하던 코만치족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였을 경우, 천연두 예방제를 놓아주고, 상당수 발생한 병자들을 치료해 주겠다는 제의를 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코만치족도 에스파냐 원정단을 시발점으로 한 유럽 풍토병에 이미 상당수 부족원들을 잃었고, 지금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지 협상에 나섰던 코만치족은 천연두를 앓고 있는 환자를 데리고 와서 치료를 해 보이라는 요구를 했다.
이미 조선에서 다수의 천연두 환자 치료 경험을 가지고 있던 군의들이 여러 약제들을 사용해서 그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물론 천연두가 이미 발병한 환자를 치료할 치료제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현대시대에도 없는 치료제를 만들 능력이 조선에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대신 철저하게 격리된 구역에서 환자의 염증을 낮추고, 가려움증을 완화시키며 호흡기에 좋은 약제들을 사용하는 대증치료를 시행했다.
이것은 환자가 자기 면역으로 천연두를 이겨내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해 천연두를 낫게 하는 방법이었다.
다행히 코만치 부족이 데려온 환자는 3일 만에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해 8일째는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서 돌아갔다.
그것에 코만치족이 굉장히 놀랐다.
며칠 후, 휴스턴 개척도시의 조선 해병 개척단과 코만치족 전체가 협정을 맺었다.
치료를 확인한 부락의 추장이 전달한 소식을 듣고, 완치된 환자를 확인한 부족 전체가 협상에 나선 것이다. 그들도 그만큼 천연두를 비롯한 유럽 풍토병에 큰 위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엔 나바호족과 아파치족도 찾아와 협정을 맺길 원했다.
조선 해병 개척단과 협정을 맺은 코만치족 부락들에서 군의들의 도움으로 다수의 환자들이 치료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까닭이었다.
개척도시 휴스턴을 중심으로 한 북미 대륙 남쪽에서 대한제국의 이름을 앞세운 조선군은 도움을 주는 자들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 효과 때문인지 종래엔 해병 개척단에 북미 연합국 병력으로 참여한 원주민 병사들의 수가 해병 개척단 소속 해병들의 수를 훌쩍 뛰어넘게 되었다.
그렇게 뭉친 원주민들의 세력에 겁을 먹고, 또 병을 고쳐준다는 도움을 주는 자들의 소문에 점차 협력해 오는 원주민 부족들이 늘어갔다.
그런 일련의 상황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 개척도시는 현대시대와 마찬가지로 휴스턴이라고 불렸다.
그와 같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해병 개척단이 준비되는 단계에서 태왕이 무심코 해당 이름을 말해버린 까닭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휴스턴이라는 지명이 영어가 아니라 한글로 표기되었으며 홍문관에서 5년에 한 번씩 간행하는 조선말 대사전에 북미 대륙 개척도시에 사용된 지명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기록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휴스턴을 기점으로 움직이는 조선 해병 개척단의 임무는 영토 확장이나 점령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규모 기술진을 대동한 탐사 및 채굴 임무를 띤 일종을 과학탐사대 겸 개발단이었던 셈이다. 처음에야 어쩔 수 없이 토착원주민들과 군사적 충돌을 벌였지만 그 상황이 안정되자 곧바로 본래의 임무로 돌아갔다.
그 일련의 과정에도 예상 외로 원주민 출신 병사들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조상 대대로 살아와 지리를 잘 아는 그들은 옛날부터 검은 액체가 새어나오는 땅이나 기체가 빠져나오는 지역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맨땅에 박치기 하는 심정이었던 해병 개척단 소속 탐사대로써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따라서 탐사대는 그 지역들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소모된 대량의 보급품을 충당하기 위한 보급요청이 조선으로 전해졌다. 소속이 해병대였기에 그들의 보급요청을 가장먼저 받은 곳은 해병대 총사부였다.
문제는 해당 지역의 작전권이 조선 해병대 총사부에 없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해병대 총사부는 조선군 최고 사령부로 해당사항을 보고했다.
태왕이 환궁하면서 조선 전군의 군령권은 다시 태왕을 정점으로 하는 최고 사령부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이순신도 조선군 원수에 당연직으로 따라붙는 최고 사령부 우부총사의 직책으로 지휘에 참여해 있었다.
최고 사령부의 직제 상 태왕이 총사, 태자가 좌부총사를 당연직으로 보유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휘는 여전히 우부총사인 이순신이 행사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광해가 이렇게 복잡한 지휘체계를 갖춘 것은 이순신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충성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체계를 제대로 갖추어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군벌에 의해 군이 장악되는 사태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각 군 총사들도 최고 사령부 참모장이란 당연직으로 지휘에 참여하여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여하간 해병대 총사부의 보고에 대해 최고 사령부는 해당 보급요청을 대서양군 사령부로 전달했다.
이것은 지난 제국 최고회의에서 북미 대륙 동부에 대한 작전권을 대한제국군이 갖고 그 지휘를 조선 대서양군 사령부가 행사하기로 합의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이 휴스턴을 개척한 조선군 해병 개척단이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이름을 앞세운 이유였다.
따라서 조선군 최고 사령부를 통해 전달된 해병 개척단의 보급요청에 퀘벡에 설치된 대서양군 사령부는 보유하고 있던 물자를 반출하여 지원하도록 했다.
이 수송 작전에는 대서양 함대에 배속된 범선형 함선들과 조선무역선들이 동원되었다.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들은 리스본과 퀘벡 간 병력수송과 보급물자 수송에 모두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급을 기다리던 가운데 한 원주민 부족이 조선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희망해왔다.
개척 초기 코만치 부족과 협상을 벌일 때 도움을 주었던 푸에블로 부족이었다. 이들의 요청을 해병 개척단은 다른 원주민 부족과 같은 과정을 거쳐 승인했다.
협정을 맺은 푸에블로 부족은 기존의 거주지를 떠나 새로운 거주지로 옮기길 희망했고, 휴스턴의 해병 개척단 지휘부는 인근 원주민 부족들과 협의하여 땅을 일부 내어주기로 했다.
푸에블로 부족의 경우 그 규모도 크지 않았던 데다 농경을 영위하는 부족이었기에 사냥을 위한 넓은 영역도 필요치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해병 개척단 지휘부는 이때까지도 푸에블로 부족의 이주와 합류가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협정에 서명한 부족장이 부족과 함께 돌아오겠다며 떠난 지 보름 후, 피투성이가 된 푸에블로 원주민 한 명이 휴스턴으로 왔다.
코만치족과 협상을 도와준 자였고, 얼마 전 족장과 함께 와서 협정을 맺고 돌아갔던 바로 그였다. 놀란 해병 개척단장이 상황 파악을 명했고, 그로인해 미처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푸에블로 부족이 리오그란데강 상류에 세워진 에스파냐 개척도시에 종속되어 지배받고 있는 원주민이라는 것이었다.
미처 북미 남부 깊숙이 에스파냐 세력이 들어와 있다는 것도 몰랐던 해병 개척단으로써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해병 개척단은 해당 사실을 해병대 총사부로 보고했다.
해병대 총사부는 즉각적으로 최고 사령부로 다시 보고했고 그 사안을 확인한 광해가 군사적 대응을 보류시킨 채 외교부 대신을 불렀다.
사실 북미 대륙에 대한 점령 작전을 전개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외의 나라를 염두에 두지 못했다. 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전 진행 중에 네덜란드 개척도시들과 부딪쳤을 때 대서양군 사령부는 물론이고, 최고 사령부도 살짝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적대세력으로 규정하여 전쟁까지 벌인데다 아직도 대서양 함대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전투함을 보내 해안 도시의 재건을 방해하고 있는 네덜란드를 상대하는 것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항복을 요구하고 불응하면 격파하라는 지시로 간단히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파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태자비 간택령을 기회로 화해를 하고 관계를 정상화한데다 에스파냐의 공주가 태자비로 결정까지 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해는 이번 상황을 외교적 대화로 풀길 원했다. 애초에 포르투갈을 포기할 때 북미지역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도록 지시하지 못했던 태왕의 실수도 있었던 까닭이다.
최고 사령부로 불려와 광해의 뜻을 들은 외교부 대신은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바로 광무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며 포르투갈 병탄 후에도 방치되고 있는 희망봉 지역을 내어주는 대신 북미 대륙에 대한 에스파냐의 권리를 포기하게끔 하자는 것이었다.
외교부 대신의 제의를 광해가 승인했다.
그에 따라 외교부로 돌아간 외교부 대신이 즉시 주조선 에스파냐 대사인 디에고 백작을 호출했다.
갑작스런 호출에 긴장한 표정으로 외교부로 출석한 디에고 백작은 외교부 대신으로부터 휴스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듣고, 그 해결책을 제시 받았다.
디에고 백작은 즉각적으로 본국 왕실에 사실을 아리고 결정을 받겠다면서 외교부 건물에 건설되어 있는 외교부 전용 전신소의 사용을 요청해왔다.
11개 제후국에 설립된 조선사무국에 전신소가 일괄적으로 건설되면서 그 원활한 업무 수행을 위해 최근 외교부에 전용 전신소가 건립되었는데 그것의 사용을 요청했던 것이다.
외교부 전용 전신소가 건립된 이후, 그 사용권한 결재권을 갖게 된 외교부 대신이 디에고 백작의 요청을 그 자리에서 승인했다.
따라서 디에고 백작은 대사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외교부 전신소로 향해 리스본에 있는 포르투갈 총독부 전신소를 통해 본국에 해당 사실을 알리고 답을 청했다.
포르투갈 총독부의 전갈을 받은 리스본 주재 에스파냐 영사관은 즉시 해당내용을 적은 보고서를 기마전령에게 주어 본국의 왕도인 마드리드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