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북미 연합국
황후가 가져다 준 명단을 앞에 둔 광해는 고심했다.
가장 무난한 것은 광산 김씨 가문의 처자로 낙점하여 태자를 조선인 여인과 짝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외척이 발호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는 셈이기도 했다. 조금 처지는 가문이었다면 오히려 나았겠지만 광산 김씨는 명문소리를 듣는 가문이었다.
약간의 힘만 실리면 충분히 권문세가로 올라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차라리 후금의 공주나 에스파냐의 공주가 나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결국 조선 밖에 가문을 두고 있는 셈이니 외척의 발호로 이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그 두 나라의 개입이 생길수도 있으니 그도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이 명을 아우르듯 태자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하나, 후금의 공주는 처음 듣는 이름으로 그녀가 어떤 역사적 영향을 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에스파냐의 안 도트리슈 공주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그녀는 실제역사에서 프랑스의 왕 루이 13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절대왕정을 꽃피운 루이 14세를 낳기 때문이다.
현대시대엔 삼총사에 등장하는 프랑스의 왕비로 더 유명한 여인이 바로 안 도트리슈 공주였던 것이다.
그런 여인이 조선의 태자와 혼례를 올리게 된다면 프랑스의 역사는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런저런 연유로 한참을 고심하던 태왕은 광산 김씨 가문의 여식을 제외한 둘 중 누구로 해도 상관이 없겠다는 뜻을 황후에게 밝혀 보냈다.
어차피 자신이 조선의 태왕이 되면서 틀어진 역사, 지금처럼 헤쳐 나가면 유럽의 역사가 어찌 변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이다.
태왕의 뜻을 전달받은 황후는 며칠간 궁에서 지내며 쌓인 두 공주의 평판을 궁녀들에게 물어 결국 안 도트리슈로 낙점하였다.
재미있게도 그 소식을 접한 이들 중 가장 기뻐한 이는 당사자인 안 도트리슈 공주도, 에스파냐의 대사도 아닌 조선이 총리대신이었다는 소문이 잠시 궁 안에 돌았다.
여하간 태자비가 간택되었다.
금발에 파란 눈은 아니었지만 유럽왕족이자 백인이 차기 조선의 국모가 된 셈이었다.
이 결정에 안 도트리슈 공주가 기뻐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가 페르디난트 왕자를 따라온 태자를 만나기 전까진 이 혼사에 부정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했다.
그땐 에스파냐 대사가 구해준 조선말 선생의 교육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는 것이 그 반증이었다.
하지만 태자를 만난 이후, 공주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왕자가 알려준 조선말 몇 마디를 수십, 수백 번 반복하여 입에 붙였을 정도로 노력했다.
그 이유는 오로지 그녀, 안 도트리슈 공주만 알고 있을 터였다.
사실 태자인 이호는 황후를 닮아 상당한 미공자였다. 턱 선이 미려하고 눈매가 부드러우며 눈동자도 초롱초롱했다.
유모상궁의 손이 아닌 황후의 손으로 직접 길러졌고, 태왕과 매일같이 한 시간 이상을 자유롭게 지내는 시간을 갖은 덕이었는지는 몰라도 태자는 굉장히 성격이 좋았고, 모난 곳이 없었다.
외모와 성품이 모두 흠잡을 곳이 없으니 처음 태자를 접한 궁녀들이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한 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태자의 혼처가 정해진 것이다.
이 결정에 대해 총리대신은 기뻐했을지 몰라도 내각은 상당히 불편해 했다. 태왕에 이어 그 다음 보위를 이을 태자까지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 배후자를 맞이하게 된 까닭이었다.
순수 조선 혈통은 바라지도 않았다. 만주4도 출신도 좋았고, 서부 3도 출신도 상관없었다. 막말로 과거 왜라 불렸던 지역 출신일지라도 감내할 수 있었다.
그저 조선에서 낳고 자란 규수이길 바랐지만 그것이 어긋난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신들은 태왕에게 상소를 올려 삼간택까지 올라간 광산 김씨 가문의 여인을 태자의 후궁으로 삼아달라고 청하였다.
대전 조회에서 그 상소문을 읽은 태왕이 조용히 그것을 품에 넣으며 말했다.
“이 상소에 이름을 적은 자들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하니 그 행동거지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상소에 이름을 올렸던 대신들의 낯빛이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는 경고였다.
그 경고 후에 광해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조선 황실에 후궁은 없다. 후궁을 들여 후사를 복잡하게 만들고, 그로인해 분란을 야기한 전례가 선대에 숱하다. 그러한 폐단을 다시금 만들라 주청하는 자들은 그만큼 황실의 혼란을 원한다고 짐은 믿을 것이다.”
광해의 그 말에 대신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 이상 태자의 후궁에 대해 입에 담지 못했다.
그날 태왕은 에스파냐에 내려진 금수조치를 해제하는 명을 내렸다.
에스파냐가 먼저 화해를 청해오고, 대사관계를 제대로 수립한 데다 태자비까지 나왔으니 금수조처를 지속하는 것은 예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리스본의 포르투갈 총독부 전신소를 거쳐 해당 소식을 접한 에스파냐 왕실은 축제분위기였다.
향후 조선, 나아가 대한제국에 대한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착각에다 금수조치 해제라는 실질적인 목적까지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기뻐했는지 펠리페 3세가 해당 소식을 에스파냐 전역에 공표하여 알리고, 대신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을 정도였다.
본국인 에스파냐가 그렇게 기뻐하던 시기 조선의 황궁에 있던 안 도트리슈 공주에게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유럽의 다른 두 공주와 함께 자국으로 돌아갔다가 내년 5월 국혼일에 맞춰 다시 입궁하던지, 그때까지 조선의 황궁에 머물며 신부수업을 받아도 좋다는 특별허락이 내려진 것이다.
펠리페 3세는 귀국했다가 다시 조선으로 향하길 원했고, 에스파냐 대사도 그것을 권했다.
하지만 안 도트리슈 공주는 무슨 생각인지 조선에 남길 희망했다.
놀란 에스파냐 대사가 만류하기도 전에 황후에게 안 도트리슈 공주가 자신의 뜻을 알려 허락이 떨어졌다.
조선 황후의 허락이 떨어진 일을 되돌릴 방법이 에스파냐 대사에게는 없었다. 결국 안 도트리슈 공주는 국혼일까지 조선에 남게 되었다.
조선에서 태자비 간택이 끝나 간택령이 해제된 2월 중순부터 조선과 연관된 2개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간택령이 내려진 동안 원정을 미루어두었던 남진이 대월을 향한 정벌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또한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30척에 나누어 탄 6만의 대한제국 해병대가 리스본을 출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서양군의 북미 점령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조선은 11개 제후국에 1만 씩의 병력을 6월 말까지 조선으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포르투갈에 원정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가있는 병력들의 교대를 위한 병력의 소집이었다.
조선은 그들을 6개월간 훈련시킨 후, 내년 1월 출발시켜 3월 이전에 도착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해 두고 있었다.
내년 5월까지가 기존 원정군의 임무기간 이었기 때문에 도착 후 2달간 임무교대를 위한 기간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소집되는 병력은 모두 조선 해병대 훈병원으로 입소하여 훈련을 마친 후, 대한제국 해병대로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이들도 이동시간을 제외한 5년간 원정군 임무를 수행하도록 계획 되어 있었다.
이들의 수송을 위해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2차분 60척에 대한 생산이 결정되어 거제 건선단지가 건조에 들어갔다.
2차분은 11수송함대와 12수송함대의 함선들을 대체할 예정이었다. 13수송함대의 함선들을 대체할 계획은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
퀘벡에서는 북미 점령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와이언도트족과 협상을 벌여 그들의 영역을 존중하는 대신 조선에 복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은 태왕의 허락을 얻어 퀘벡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와이언도트족의 한 부락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하여 성사되었다.
대신 대한제국은 평화협정을 맺은 와이언도트족에게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그들의 문화와 자치권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대신 대한제국의 점령 사실을 승복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평화협정을 맺을 때 의무적으로 북미 연합국이라는 대한제국 제후국에 가입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사전에 광해가 계획했던 것으로 북미 원주민들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 내기 위한 정책이었다.
나라라고는 해도 사실상 북미 원주민들 특유의 문화와 자치권이 존중되어야 했기에 사실상 부족 간 협의체라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터였다.
광해는 이 북미 연합국에 각 부족의 대표가 파견되어 의회를 열고, 그곳에서 나온 결과로 이 협의체를 이끌어 가기를 원했다.
일종의 공화정을 시도한 셈이다.
와이언도트족의 부락들은 꽤나 긴 토의 끝에 그런 대한제국의 요구를 수용했다. 대한제국은 그 보답으로 일정분량의 곡물을 공급하기로 했다.
또한 대한제국군 군의들이 협력하기로 한 원주민들에게 천연두 예방제(백신)를 놓아주었다.
유럽인들과 접촉이 늘어난 이후, 북미 원주민 사회에까지 천연두 등 다수의 유럽 대륙의 풍토병이 번지면서 북미지역 원주민의 9할에 달하는 인구가 감소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는 다는 것을 실제역사를 통해 알고 있던 광해가 사전에 준비를 시킨 것이었다.
반대로 남미의 풍토병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매독에 대한 대비를 위해 원정군 군의들은 멸농(페니실린)과 왕립 조선종합 병원 소속 약제 연구소에서 개발한 신형 항생제인 신멸농을 비롯한 약제들을 대량 소지하고 있었다.
이 약제들은 원정군 병사들은 물론이고, 북미 원주민들에게도 사용될 수 있도록 태왕의 사전 허가가 내려져 있었다.
광해는 가능한 북미원주민들과 원활한 유대관계를 맺고 선진 의료기술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급격한 인구감소를 막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북미에도 남미를 휩쓴 천연두와 같은 유럽의 풍토병들이 원주민들 사이에 퍼지면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특히 천연두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는데 대한제국군이 그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는 약을 준다니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 소문이 퍼지면서 와이언도트족 외의 부족들까지 찾아와 대한제국군과 평화협정을 맺고자 했다.
그렇게 찾아온 부족들 속에 있는 천연두 환자 등 몸이 아픈 이들을 원정군 소속 군의들이 치료해 내면서 대한제국군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무기와 병을 가지고 들어와 북미 원주민들을 죽여 나갔던 유럽인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원주민들과 비슷한 피부, 비슷한 머리칼색, 비슷한 눈동자색을 가진 대한제국군 병사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그 인식은 떠 빨리, 더 광범위하게 퍼졌다.
종래엔 와이언도트족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던 부족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그만큼 천연두를 비롯한 유럽의 풍토병으로 북미 원주민들이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뜻이었다.
그로인해 대한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북미 연합국에 가입된 북미 원주민 부족의 수가 늘어났다.
물론 아직까지는 부족 간의 뿌리 깊은 불신이 남아있어 북미 연합국이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대한제국이라는 커다란 힘 앞에서 억지로라도 서로가 대화와 협상을 시작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 은 퀘벡을 기점으로 시작된 대한제국군의 북미 점령 작전에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대한제국과 평화협정을 맺으며 북미 연합국에 가입된 부족들은 공히 대한제국 제후국으로써의 권리도 누릴 수 있었지만 의무도 함께 지어야 했다.
그 중 가장 첫 번째로 요구된 의무가 바로 대한제국군에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4개 부족, 15개 부락이 가입된 북미 연합국은 회의를 통해 5백 명의 전사들을 원정군에 파견했다.
이일이 일어난 5월을 기점으로 광해가 대한제국 황제의 권한으로 북미 연합국을 대한제국 제후국으로 공식 인정하여 선포하였다.
그럼으로써 대한제국은 종주국인 조선을 포함 13개 나라의 연합 제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