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삼간택
본격적인 점령 작전이 시작되지 않은 북미지역은 아직까지 관할하는 도가 없었다.
따라서 북미 지역에 존재하는 개척도시들은 모두 해외영토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해토부(해외영토부)의 직접적인 관리를 받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해토부 대신이 직접 올린 청원은 꽤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북미 원주민 중 하나인 와이언도트족에 속한 한 부족이 프랑스에서 넘겨받은 퀘벡을 통해 조선에 편입되고 싶다는 청을 넣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립투쟁심과 외부 세력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다고 알고 있었던 북미 원주민에 대한 광해의 기존 지식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었다.
웬다트(Wendat)족 또는 휴런(Huron)족으로도 불리는 이 와이언도트족은 프랑스가 퀘벡을 개척할 때부터 모피 교역을 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물론 프랑스의 개척도시는 상당히 작았고, 그에 따른 모피교역도 아주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그 작은 규모의 모피교역에서 얻는 이익이 상당해서 이들 와이언도트족의 경제규모와 삶이 달라졌을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
외부 세력과의 교역이 주는 이점을 이미 맛본 부족이라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이 퀘벡을 인수한 이후, 이순신의 지휘 하에 그곳에 확장된 요새도시가 지어지고, 대규모 전략물자 창고를 건설하면서 접점을 확대해 왔다.
그러는 동안 와이언도트족은 조선의 개척도시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조선의 발달한 문물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더구나 조선은 기존의 프랑스나 다른 유럽 열강과 달리 강압적인 무력보다는 설득과 외교를 앞세워 교류를 넓혀가려 애를 썼다.
물론 일부 강경 부족의 도발에는 감히 대적 불가한 무력을 동원한 무자비한 응징을 가해서 주변 원주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있기도 했다.
대신 협조적인 부족들에는 모피 요역을 확대해 주고, 발달한 피복을 포함해 온돌이 깔려있는 집을 지어 선물하는 등 온건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침으로써 적이 되었을 때의 두려움과 친구가 되었을 때의 이익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추운 겨울 온통 모피로 똘똘 말고서 겨울을 나야했던 북미 원주민들에게 두터운 솜옷과 따듯한 아랫목을 가진 조선인들의 존재는 신선한 충격임엔 분명했다.
더구나 하얀 피부에 색색의 눈동자를 가진 유럽인들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검은 머리에 누런 피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조선인들이었기에 심리적인 접근이 더 쉬웠는지도 몰랐다.
결국 와이언도트족 중 일부가 조선의 품에 들어오길 청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일부 부족이 조선의 개척도시인 퀘벡으로 이주하여 살 수 있도록 허락을 청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북미 원주민들과의 원만한 교류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광해가 그 청원을 허락했다.
다른 북미 원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지원을 확실하게해서 그들의 정착에 관심과 도움을 주라는 명도 내렸다.
해당 사실은 퀘벡에 설치된 전신소를 통해 곧바로 전달될 터였다.
아울러 확대 문무백관 회의는 2월 1일부터 북미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점령 작전의 실시와 그에 대한 지원을 의결했다.
북미대륙에 대한 점령 작전은 두 방향으로 진행 될 예정이었는데 이미 작년에 결정이 났던 유럽을 통한 동부지역에 대한 점령 작전을 주로 두고, 조선군 단독 작전에 의한 서부지역의 점령전을 추가로 벌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해병강습함대와 10척의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을 투입 총 5개 여단 2만5천의 해병을 투입하기로 했다.
그런 결정들을 남긴 채 열흘간 이어졌던 확대 문무백관회의가 끝난 직후, 사전에 허가된 대로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로 왕건급 호위함 30척과 조선무역선 50척이 인계되었다.
호위함들은 정규함대에서 각출된 것이었고, 조선 무역선들은 11, 12 수송함대에서 15척씩, 13 수송함대에서 20척이 차출된 것이었다.
이것으로 조선과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가 맺은 선박 거래 1차 계약분이 모두 인계되었다.
해당 함선들이 부산포를 출발하던 날, 초간택을 위한 30명의 규수들이 황궁에 입궁했다. 그곳에는 얼마 전에 조선에 당도한 에스파냐를 비롯한 유럽 3개국의 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확대 문무백관회의가 끝나면 부리나케 돌아갔던 각도의 관찰사들이 태왕의 허락을 얻어 초간택을 지켜보기로 했다.
차기 국모를 선발하는 일이었던 데다 각 관찰사들이 관할하는 지역 출신 가문들의 여식들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지대했던 까닭이었다.
초간택에 들어온 규수들은 집안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동일한 위치에서 심사를 받는다는 관례에 따라 같은 옷을 입도록 되어 있었다.
노란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는데 이것에는 예외가 없었다. 따라서 풍속과 복장문화가 다른 지역 출신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로인해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프랑스의 공주도 동일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하긴 대한제국 제후국들 중 조선에서 가장 먼 카자흐 제후국 왕실의 공주도 같은 복색이었으니 그 세 나라의 공주만 난감한 상황은 아니었던 셈이다.
본래 간택령에 따라 입궐하게 되는 여인들의 나이는 13살에서 17세 사이였지만 이번 간택은 태왕의 허락을 얻은 황후의 특명으로 최소 나이를 11살로 낮추었다.
당장 프랑스에서 온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공주가 조선식으로 11살, 에스파냐에서 온 안 도트리슈 공주의 나이가 12살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공주는 최대치에 해당하는 17살이었는데 사실 이것에는 잉글랜드 의회와 제임스 1세의 계산이 깔려있었다.
자손이 귀한 조선 황실에서 서둘러 왕손을 보고자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곧바로 출산이 가능한 나이대의 여인을 보내는 것이 선발에 유리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사실 조선 왕실의 간택의 기준은 외모가 단정하고, 품행이 올바르며 집안이 지나치게 권세 높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외척이 발호할 것을 걱정한 까닭 인듯 싶은데 그것을 생각하면 유럽 세 나라의 공주는 모두 선발되기 어려운 조건을 가진 것과 진배없었다.
가문이 유럽 대국들의 왕실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30명의 초간택 규수들 중 만만한 집안의 처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모두가 제후국 왕실의 공주이거나 이름 높은 명가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후보들을 놓고 왕실 웃어른들 사이에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선왕의 후궁인 인빈 김씨가 에스파냐의 공주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 인빈 김씨를 잠시 지그시 바라보았을 뿐 황후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초간택을 통해 재간택에 들 5명을 선발하는 과정이 예상외로 치열한 논쟁을 거듭했다. 황후를 제외한 왕실 여인들 모두에게 어디선가 선이 닿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태자와 함께 종학에서 공부하던 에스파냐의 페르디난트 왕자가 자신의 큰 누나인 안 도트리슈를 찾아간 것이다.
모처럼 만에 이루어지는 남매간의 재회였기에 태왕도, 황후도 허락한 사안이었으니 이 둘의 만남에는 아무런 하자도 없었다.
다만 누나를 만나러 간 페르디난트 왕자의 곁에 조선의 태자가 동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지만.
이 일은 예상외로 심각하게 다루어졌다. 이 만남을 알아차린 후보들의 가문들이 일제히 해당 사안을 문제 삼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태왕의 특명에 의해 조선 최고의 감찰기관인 사간원이 태자와 안 도트리슈 공주 사이에 접점을 만들려는 의도적인 움직임이 있었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조사까지 실시했을 정도였다.
다각도의 조사를 진행한 사간원은 사안의 심각성을 미처 알지 못했던 페르디난트 왕자와 태자의 호기심이 불러온 우연이 만들어낸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그것으로 법적인 문제는 없다고 확인 되었지만 절차적인 정당성은 훼손된 셈이었다.
실제로도 그 만남이후로 태자가 안 도트리슈 공주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자고로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태자가 쉬는 시간이면 쫓아와 조잘거리는 이야기들 속에 안 도트리슈 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반 이상이니 황후의 관심이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인빈 김씨의 지지가 강력하였기에 재간택을 받은 5명 속에 안 도트리슈 공주가 속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공주도 그 속에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공주는 재간택을 받지 못했다.
프랑스 왕실이 조선 황실과의 혼례에 사실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지 다른 재간택자들과 달리 그녀를 지지하는 조선 황실의 웃어른이 없었던 것이 탈락의 가장 큰 이유였다.
재미있는 것은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은 프랑스 대사는 덤덤한데 반해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공주는 펑펑 울었다는 것이다.
그런 엘리자베트 공주를 위해 황후는 그녀가 유럽에서 온 다른 두 공주와 함께 귀국할 때까지 궁에 머물며 지낼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해주었다.
그와 달리 재간택에 들지 못한 나머지 후보들은 모두 궁을 나서 각자의 나라나 가문으로 돌아갔다.
초간택의 결과를 확인한 관찰사들이 비로소 각자의 소임지로 돌아갔다. 그런 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자신들이 맡은 지역에서 올라온 여인들 대부분이 떨어진 까닭이었다.
태왕은 황후가 보내온 재간택 명단을 받아보고는 다소 놀랍기도 하고, 실소가 나기도 했다.
일단 가장 큰 발언권이 있는 황후가 자신이 태어난 명나라 왕실에서 추천한 여인을 뽑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다.
또한 재간택에 든 5명의 여인들 중 한 명만 조선의 여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제후국 또는 유럽 열강의 공주라는 것에 실소를 금치 못했던 것이다.
에스파냐와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후금과 카자흐 왕실의 공주들이 나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한명 뿐인 조선의 여인조차 예학의 태두로 존중받는 김장생이 속한 광산 김씨 가문 출신이었다.
너무 쟁쟁한 가문 출신들만 남은 탓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광해는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왕실 혼사는 본래 내명부의 소관인데다 자신조차 명나라 공주였던 지금의 황후와 성혼했지만 그것으로 큰 분란이 일어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태왕이 아무소리도 하지 않자 황후는 그대로 재간택 명단을 공표했다.
재간택에 든 5명은 본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삼간택 때에 왕궁에서 보내준 가마를 타고 다시 입궁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타국의 공주들이 대다수인 까닭에 모두 궁에 머물게 하였다.
그로인해 황후는 시간을 끌지 않고 재간택을 진행했다.
재간택에선 5명의 후보를 조금 더 심도 있게 살펴서 3명의 삼간택에 들 규수들을 추려낸다.
본래 이 자리엔 발을 치고 직접 후보들을 불러 대왕대비와 대비까지 참여하여 예에 대해 묻고 답을 듣는 과정이 있는데 두 웃어른의 자리 모두가 유고인 상태라서 황후가 홀로 진행하였다.
조선 여인인 한명을 제외한 네 명의 타국 출신 후보들 중 카자흐와 후금의 공주는 어설프게라도 조선말을 할 줄 알았지만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공주는 조선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런 까닭에 재간택이 진행되는 동안 영어와 에스파냐어가 가능한 여성 역관이 배석해 통역을 맡았다.
그 와중에 안 도트리슈 공주가 어설프게 조선말 몇 마디를 했다. 황후의 물음에 ‘예. 그러하옵니다’와 ‘아니옵니다’ 그리고 ‘감사하옵니다.’ 단 세 마디에 불과 했지만 황후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게 하기엔 충분했다.
“어디에서 배운 말이더냐?”
역관을 통해 황후의 물음을 받은 안 도트리슈 공주가 답했다.
“동생이······. 알려주었습니다.”
“동생? 페르디난트 왕자 말인가?”
황후의 물음에 안 도트리슈 공주가 조선말로 답했다.
“예. 그러하옵니다.”
얼마나 반복해서 노력한 것이지 제법 발음도 정확했다. 그것에 황후의 미소가 다시 입가로 깃들었다.
아마도 몇 달간 먼저 조선의 문물과 말을 배웠던 페르디난트 왕자가 누나를 위해 발 벗고 나섰던 모양이었다.
그 어리고 작은 왕자가 이 일이 제 누나에게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과연 알고나 한 것일까 싶었다.
여하간 황후는 그 것을 트집잡고 싶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왕자의 뜻이었든, 아니면 그 뒤에 에스파냐의 대사가 있든, 적어도 공주는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으니까.
이후 여러 가지 물음이 던져졌고, 안 도트리슈 공주는 조심스럽게 답을 내놨다.
그와 같은 문답이 며칠간 5명의 후보 모두와 황후 사이에서 이어졌다. 때론 같은 질문을 다시 던져 이전의 답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 남겨진 삼간택 후보는 셋.
광산 김씨 가문의 규수와 후금의 공주, 그리고 에스파냐의 안 도트리슈였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공주는 삼간택에 들지 못했다. 그것에 대해 엘리자베스 공주 자신과 잉글랜드 대사가 크게 낙담했다.
황후는 엘리자베스 공주를 포함한 낙선 후보들을 따로 불러 위로하였다.
다음 날, 황후가 삼간택에 든 세 명의 명단을 가지고 태왕을 찾았다. 최종 선택 전에 태왕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