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북미 개척지의 청원
해병 개척단에 소요될 함정들을 추가로 건조하느라 예정보다 늦은 10월 중순에야 2개 일칠함대분의 신형 증기철선들이 진수되었다.
두 함대에 장병들이 배치되어 인수 겸 적응 훈련이 개시되었다.
이미 수개월간에 걸쳐 71기동함대와 72기동함대에 나누어 제후국 장병들과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선원들이 범선 인수훈련을 마친 터라 조만간 해모수급 전열함들은 전량 조선을 떠날 예정이었다.
따라서 보유함선 전체가 사라지게 될 71, 72 함대의 신규함선 보충이 시급했던 조선 해군은 인수 훈련에 보름간의 짧은 여정만을 허락했다.
그로인해 문제점들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위해 거제 건선단지의 기술자들 일부가 일정기간 함께 탑승하여 작업을 지속하기로 했다.
2차분 신형 증기철선들의 진수가 완료되자 광해는 3차분 생산을 명령했다. 2차분이 71기동함대와 72기동함대를 대체할 함선들이었다면 3차분은 정규함대들을 교체할 분량이었다.
태왕의 명을 받은 거제 건선단지가 내년 5월을 목표로 곧바로 3차분 신형 증기철선들의 건조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11월이 오자 예정대로 71, 72 기동함대 소속 해모수급 전열함 1백 척이 명, 남진, 나고야, 동일본 4개 제후국과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로 20척씩 나뉘어 출발했다.
이 전열함들 중 제후국으로 향하는 80척에는 이포가,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가 인수한 20척에는 일포가 장비되어 있었다.
그렇게 기존에 보유했던 함선 전체가 사라진 71, 72 기동함대로 2차분으로 생산된 일칠함대들이 배속되어 왔다. 각 함대 당 1개씩의 일칠함대가 배치된 것이다.
그 시점을 기해 조선 군제에 약간의 변화가 발생했다.
우선 기본 편제에서 분대의 규모에 손질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5개 오를 묶어 25명으로 분대를 구성했었으나 이 시점을 기해 2개 오, 10명을 분대로 구성하게 했다.
그럼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분대지원화기인 현식총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당장 이전 체계에서 1백 명으로 구성된 1개 대가 보유하는 현식총의 수가 대본부에 추가 배치된 1정의 현식총까지 합해 5정이었던 것에서 11정으로 대폭 늘어나게 된다.
이것은 기본 전술 부대의 화력보강이 이루어짐을 뜻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이전에 이런 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것은 현식총에 사용되는 금속탄피형 총탄의 보급문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이 본격적으로 실전 배치됨에 따라 머리 떨어진 전선이라도 대량의 보급이 가능해짐으로써 화력보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아울러 해군 편제에도 변화가 있었다.
유럽에 대서양 함대가 배치된 것과 마찬가지로 신형 증기철선들을 보충 받은 71기동함대를 태평양 함대로, 72기동함대를 인도양 함대로 개칭하였다.
이로써 조선 해군은 대양해군 체제를 완벽하게 갖추게 되었다.
두 함대가 기존에 갖추고 있던 해모수급 전열함의 수에 비해 보충된 신형 증기철선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두 함대의 장병수에 대한 감축도 함께 진행되었다.
어차피 조선에선 징병제의 폐지수순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감축되는 병력으로 인한 실직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군에 남기로 희망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들의 희망대로 군에 남을 수 있을 만큼의 장병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력 개편까지 마친 두 대양함대의 모항에도 변화가 생겼다.
71기동함대가 개편되어 완성된 태평양 함대의 모항은 부산포에서 남경이자 관서도의 감영이 설치되어있는 대판(오사카)으로 변경되었다.
아울러 72기동함대가 개편되어 편성된 인도양 함대의 모항은 강서도의 상해에서 대만도 관할인 포라중으로 바뀌었다.
주몽급 순양함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함대는 여전히 부산포를 모항으로 하여 유사시 해군 전력의 해외 증파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순신 함대에 대한 신형 증기철선의 배치는 4차분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광해는 포르투갈의 해외식민지였던 영토들을 해병대와 육군 5전단 소속 병력들이 완벽하게 점령, 안정화시킴에 따라 해당 지역들을 조선의 정식 영토에 편입하였다.
우선 디에고수아레스항만을 점령하고 있던 마다가스카르 전체를 점령하여 모잠비크와 합쳐 녹주도(綠州道)라 명하였다.
그 녹주도가 다반과 광무항, 상투메 프린시페, 적도기니, 다카르, 카보베르데 등 아프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조선 점령지를 관할하게 하였다.
그에 따라 남포르투갈도와 녹주도가 늘어 해외 8도가 되었다.
그렇게 늘어난 해외 8도에 속한 대만도에 기존에 관할하던 해남섬과 유구(오키나와), 홍콩 외에 마카오, 포라중, 사라왁, 암본, 반다제도, 동티모르, 오리사, 마드라스를 추가로 관할하도록 하였다.
모든 직제 개혁은 사전준비를 거쳐 새해인 광무 10년 1월 1일을 기해 실시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 본토 8도, 만주 4도, 서부3도, 해외 8도, 도합 23개도를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에 걸쳐 두고 있는 세계제국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광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신세계, 즉 아메리카 대륙, 그중에서도 북아메리카에 대한 개척에 본격적으로 임하라는 명을 대서양군 사령부에 내려 보냈다.
대서양 함대와 원정군으로 구성된 대서양군의 최고 사령관은 대서양 함대 제독인 정경달을 임명했다.
한데 이런 태왕의 명령은 곧바로 제동이 걸렸다.
70노구를 이끌고 대서양 함대를 맡길 자처하여 포르투갈로 나갔던 정경달이 몸져눕더니 며칠 만에 사망한 것이다.
리스본에 설립된 왕립 남포르투갈 종합병원의 의원들이 부검한 결과 특별한 질환이 발견되지 않아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로 결론지어졌다.
발전한 조선의 의료기술 덕에 실제역사보다 9년을 더 산 셈이었지만 이 노장의 죽음에 대한 태왕의 슬픔은 상당히 깊었다.
광해가 슬퍼하며 특별히 노장의 시신을 조선으로 운구하도록 명하였다. 조국의 땅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신세계 점령 작전을 앞두고 대서양군을 지휘할 장수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었다. 인선에 들어간 광해에게 해군 총사 이억기가 자원을 청하였다.
해군 총사였던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강등되는 것과 마찬가지였음에도 강한 의지를 내보이는 이억기의 청을 광해가 가납하였다.
올해 쉰한 살의 이억기가 대서양 함대 제독 겸 대서양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급히 리스본으로 출발했다.
이로써 대서양군은 2품 상장군을 총 지휘관으로 맞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원정군 사령관을 맡고 있었던 3품 대장군의 직급이었던 김경서를 지휘하는데 조금 더 수월한 결과가 되었다.
지휘관의 교체에 따라 본격적인 북미대륙 점령 작전의 실시는 새해로 밀려나게 되었다.
다사다난했던 광무 9년이 그렇게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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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 10년, 서기로는 1612년, 임자년(壬子年) 새해가 밝았다. 광해가 조선의 왕위에 오른 지 20년, 대한제국 황위에 오른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올해로 서른여섯이 된 광해는 황후와 함께 열 살이 된 태자 이호의 새해인사를 받는 것으로 임자년 첫 날을 시작했다.
새해 첫날부터 초오일까지는 중요한 업무가 아닌 이상 궁에 출입할 수 없다는 관례에 따라 궁은 모처럼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왕실의 이런 관행을 태왕은 민간에까지 그대로 적용하여 새해 첫 5일간은 공식적인 휴일로 지정되어 있었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이 기간은 편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가까운 친인척들을 찾아 인사를 나누는 시기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광해도 왕실 가족들을 초청해 궁에서 작은 연회를 열었다. 말이 연회지 그저 8촌 이내의 왕실가족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했다는 정도였다.
이 자리에서는 선왕의 후궁이었던 인빈 김씨와 지금은 궁 밖에서 기거하는 신성군 등 왕실 인척들도 참석했다.
광해는 그들의 생활에 곤궁함이 없는지 물어 살폈고, 그런 태왕의 관심에 모두들 황송해 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태왕이었다. 조선, 나아가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 제왕의 자리에 앉은 임금은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아닌 존경과 두려움의 존재였다.
어떻게 하든 끌어내리고 자신이 올라가려던 과거의 조선 왕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을 용납할 태왕이 아니었다. 아마 그러한 기척만 보여도 태왕의 칼이 날아올 것이라는 걸 왕실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한 나라를 침공하는 것에도 명분보다 실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실제로 그리 행한 태왕이었다. 하물며 왕실 종친의 목을 베는 것쯤임에야.
그런 태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왕실 종친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새해 첫 5일을 보낸 황궁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다시 대신들이 입궁해 업무를 시작한 까닭이었다.
새해를 기해 변화한 것들이 적지 않았다.
새로 편입된 녹주도를 비롯한 행정관서는 물론이고, 대양함대들로 개편된 해군도 그랬고, 대규모 토목공사로 진행되었던 철도들도 완공되었다.
우선 서경선에서 연결된 서부선까지 완공되어 철도로 부산포에서 출발해 황도인 신의주를 거쳐 서경(베이징)을 지나 소주까지 이어지는 철도망이 완성되었다.
그로인해 가장 인구가 많아 물동량이 높은 서부 3도 전역이 조선 본토와 철도를 이용한 승객 및 화물 운송 체계를 완비하게 되었다.
아울러 평양을 출발해 철산단지와 연해주를 거쳐 백력까지 연결된 동간도선도 완공되어 그간 화물 마차로 감당해오던 삼강평야의 막대한 곡물들의 수송에 숨통이 트였다.
현재는 평양이 아니라 철산 단지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간선 철도가 한창 공사 중이었다. 이 간선 철도가 완성되면 동간도선은 황도인 신의주와도 직접 연결될 예정이었다.
송눈평야를 가로질러 제제합이와 연결하는 북간도선도 완공되어 송눈평야의 소출 수송에도 활력이 더해졌다.
다만 이쯤 삼강 평야와 송눈 평야는 이상기후를 겪고 있었다. 얼마 전 부터 기온이 내려가는 현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미 소빙하기가 이때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광해는 북부 대평원 지역의 소출량 감소에 대비해 남부지역 평야들에 대한 소출 증대에 힘쓰도록 명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당분간 식량수급에 문제가 생길 것에 대비해 이미 조선은 수년간 대량의 곡물을 도처에 비축해두었다.
제후국들에게도 그에 대한 당부를 해두어 상당한 양의 곡물들을 비축해 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올해를 기점으로 조선 내부에도 추가로 철도망이 새로 개설되고 있었고, 해외 8도 중 과거 왜의 땅이었던 구주도, 사국도, 서남도, 관서도에도 철도 공사가 개시되었다.
광해가 새해 첫 확대 문무백관회의에서 서부선의 종착지인 소주에서 명나라 왕도인 남창을 연결하는 철도의 건설을 명하였다.
조선과 제후국을 연결하는 첫 철도 개설 공사의 시작이었다. 이미 제국 최고회의에서 의결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명도 그에 대한 제반 준비를 마치고 착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창선으로 명명된 해당 철도가 착공 된 직후, 서경(베이징)을 출발해 북원의 왕도인 호화호특(呼和浩特, 후허하오터)을 거쳐 할하의 왕도인 카라코룸으로 향하는 카라코룸선의 착공도 계획되어 있었다.
제후국을 연결하는 철도였지만 그 비용은 조선이 감당하기로 했다. 철도가 연결되어 얻는 이익 중 상당부분을 산업시설이 몰려있는 조선이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후국들에 대한 산업화는 조선의 지원 하에 지속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다만 그 산업화라는 것이 조선의 것과 경쟁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1차 산업,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잠업을 광범위하게 벌여 생사를 생산하고 또 그것을 활용한 옷감의 생산 같은 1차적 산업에 국한했다.
그렇게 생산된 1차 산업의 결과물로 옷을 만드는 2차 산업은 여전히 조선에 밀집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재료가 되는 1차 산업 생산품의 수송에 철도가 활용되면 그 운송비 절감으로 인한 원재료비 인하가 가능하기 때문에 조선 산업의 발달과 판로 확대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확대문무 백관회의에서는 해당 안건을 태왕의 명대로 그대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번 확대 문무백관 회의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의제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로부터 인수받은 북미 개척지들에서 올라온 청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