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어린 대사
조선을 비롯한 대한제국 내 모든 제후국들과 심지어 수만리 떨어진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까지 조선 태자의 국혼문제로 소란스럽던 시기 유일하게 명은 그 일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그것은 태자와의 혼사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명이 내전의 와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창 사태를 일으켰던 유충헌이 호남성으로 귀환해 공개적으로 명 왕실에 반기를 들고 나섰던 것이다.
처음엔 지방군단들을 동원해 쉽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이 유충헌의 반란은 생각 외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그간 일부 토호와 상가들이 부를 독점하면서 누적되어온 명나라 백성들의 분노가 유충헌의 반란을 계기로 도처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호남성으로 진군해서 반란을 진압해야할 지방군단들이 모두 각자의 주둔지에 발이 묶여버렸다. 개중에는 지방군단에 속한 일부 부대가 그렇게 반란을 일으킨 이들에 합류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백성들의 반발이 가장 심각했던 지역은 사천성이었다.
예전부터 변방 취급을 받으며 소외되어 오던 사천의 백성들은 조선으로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새로운 문물과 산업에서도 자신들이 소외되어 있다는 것에 분노했다.
그렇게 수백 년간 쌓여온 울분이 폭발한 것이라서 상당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사천군단의 절반가량이 그 반란에 참여했고, 나머지 절반은 흩어져 도주했다.
사실상 사천이 무정부상태에 빠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천을 아우를 확고한 반란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20여개나 되는데다 고만고만해서 확실한 지도자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천에 유충헌이 재빨리 손을 뻗쳤다.
우습게도 호남에서 가장 부를 많이 축적한 유충헌이, 부를 독점해온 토호와 상가들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천 반란세력과 연수를 맺은 것이다.
세력과 자금력이 부족했던 사천의 반란세력들은 명나라 왕실군의 위협에 직면한 상황에서 유충헌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호남과 사천을 손에 넣은 유충헌이 사람들의 추대로 호남성 장사에서 서왕(西王)에 올라 나라이름을 후초(後楚)라 지었다.
과거 사천을 기반으로 세워졌던 초나라의 후신임을 자처한 것이었다.
상황이 그렇게 진행되자 후초로 인해 강서의 명나라 왕실과 단절되게 된 귀주와 운남이 덩달아 흔들렸다.
특히 운남까지 관할하는 귀주군단 지휘부의 고민이 깊었다. 나름대로 귀주와 운남의 반란을 잘 진압해가고 있던 귀주군단의 지휘부에게 선택지가 주어진 셈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명 왕실에 계속해서 충성을 할 수 도 있었고, 후초에 합류하던지, 그도 아니면 자체적인 나라를 세울 수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선택지들을 놓고 귀주군단과 귀주, 운남 두 성의 고위 인사들이 고심하던 찰라 대한제국이 사태에 개입했다.
사실 사태 초가만 해도 광해는 명나라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남창 사태의 주범이 벌인 반란이라는 것만으로도 조선이 개입할 명분은 충분했지만 광해는 대한제국이 출범하면서 제후국들과 맺은 조약을 준수하고자 했다.
흔히 한성 조약, 또는 제국 조약이라 부르는 해당 조약에 의거하면 종주국인 조선은 대한제국의 법을 어기지 않는 이상, 내부 분란 등 제후국들의 내정에는 관여치 않을 것을 명문화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조약에 근거하여 광해는 개입을 자제하고 참고 인내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유충헌이 자신을 서왕이라 칭하고 호남과 사천을 합해 후초를 세우면서 상황이 변해버렸다. 대한제국 역내에서 황제의 허락 없는 개국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제국 조약에 근거한 정당한 개입조건이 성립된 것이다. 광해가 지체 없이 대한제국군의 투입을 명령했다.
명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후금과 준가르, 티베트가 황명에 따라 각각 보유하고 있던 1만씩의 대한제국군을 명으로 파병했다.
명과 남쪽 국경을 접하는 남진의 경우, 대월에 대한 원정준비로 여념이 없었기에 특별히 황명으로 동원에서 제외되는 배려를 받았다.
대신 강소도에 배치되어 있던 조선 육군 제34병단이 명나라 절강성으로 진입했다.
후금과 준가르, 티베트, 3방향에서 동시에 대한제국군의 공략을 받은 사천이 곧바로 흔들렸다.
아무리 지방군단이었던 병력을 일부 보유했다고는 해도 무장과 훈련이 빈약한 반란군이 정규훈련을 받은 데다 일총으로 무장한 대한제국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위기에 봉착한 사천의 반란세력들이 일제히 서왕에 오른 유충헌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그 요청은 묵살 당했다.
한정된 재원과 병력으로 방어에 나서야 했던 유충헌이 사천을 버리고 자신의 기반인 호남에 전력을 기울이기로 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버림을 받은 사천의 반란세력들이 하나둘씩 대한제국군의 공세에 무너져갔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자 귀주와 운남 두 성의 고위 지휘부와 귀주군단의 지휘관들은 곧바로 명 왕실에 대한 충성을 다시금 천명하며 내부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귀주군단을 투입해 사천의 남부를 공략하고 나섰다.
남쪽 방향에서마저 공격을 받기 시작한 사천의 반란세력들은 결국 무너지거나 흩어져 도주했다.
사천에서 반란이 발생한지 2달 만이었다.
절강성의 경우 조선군 34병단이 진입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반란이 진압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이들도 조선군이 개입한 이상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흩어져 도주해버린 것이다.
마지막까지 저항을 택해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일부 반란군을 절강군단과 함께 토벌한 34병단이 그 기세를 몰고 왕도가 있는 강서로 들어섰다.
그런 조선군 34병단에 명나라 대한제국군 1만이 합류해왔다. 그들을 이끌고 34병단이 호남으로 진격했다.
사천을 정리한 후금, 준가르, 티베트의 대한제국군 3만과 귀주군단의 일부인 1만 병력도 때를 맞춰 호남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탓에 전장을 외부에서 형성할 수 없었던 유충헌은 장사성에 병력을 집결시킨 채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호남군단의 잔여병력 1만과 호남 도처에서 긁어모은 5만의 병력으로 방어에 나섰지만 명 왕실군과 조선군을 비롯한 대한제국군이 다가오면서 연일 도주자가 속출했다.
개중에는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을 지키던 병력 전체가 도주한 경우도 있어서 유충헌을 비롯한 후초 지휘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진압군이 도착했을 무렵엔 장사성에 남아있는 병력은 겨우 2만 가량에 불과했다. 겨우 며칠 만에 자그마치 3만이나 하는 대규모 병력이 도주해버린 것이다.
그나마도 도처에 독전대를 두어 도주를 감시한 덕에 그만한 수치에서 멈추었던 것이지 그냥 방관했다면 얼마나 남았을지 감히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사성의 민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장사성을 진압군은 삥 둘러쌌다.
명왕을 대리한 절강군단장이 유충헌에게 투항을 권고했지만 갑옷까지 갖춰 입고 성벽에 오른 유충헌은 그 자리에서 거부했다.
제 딴엔 흔들리는 성내의 민심을 잡고, 방어에 나선 후초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성벽에 설치된 누각에 서 있는 유충헌의 모습을 바라보는 34병단 지휘부의 얼굴엔 실소가 가득했다.
“저거 지금 죽여 달라고 떼쓰는 거지?”
어이없어하는 병단장의 말에 부관이 쓰게 웃었다.
“애들 준비시킬까요? 저 정도 거리면 저격수들이 충분히 닿겠는데요.”
“저격수? 감히 태왕 폐하를 암살하려던 자객놈 따위에게 무슨 저격수. 포병대 동원해서 아예 뭉개버려.”
병단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탄하고 대기하던 34병단 포병대가 일제히 성문 위 누각을 향해 포격했다.
자그마치 3백문의 삼포가 발사한 작렬탄이 유충헌이 고위지휘관들과 함께 서있는 성문 위의 누각에 집중되었다.
요란한 포격음 뒤로 일어난 자욱한 포연이 바람에 걷힌 후 확인한 누각은 물론이고, 성문 자체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무너진 성문을 통해 명나라 왕실군인 절강군단을 선두에 세운 진압군이 노도처럼 장사성 내부로 밀어닥쳤다.
가뜩이나 불안하게 흔들리던 후초군과 장사성의 민심은 깨어진 성문으로 진압군이 들어섬과 동시에 완전히 무너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무기를 버리고 손을 바닥에 댄 채 납작 엎드린 후초군과 백성들을 포박하여 꿇어앉히는 것으로 명에서 일어났던 모든 반란이 진압되었다.
개국한지 2달을 간신히 넘긴 후초가 그렇게 짧은 생명을 기록하고 역사에서 사라진 8월 말, 국혼을 위한 청원서를 소지한 에스파냐의 대사가 조선에 도착했다.
도착한 다음 날, 태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하락 받은 에스파냐의 대사는 자그마치 펠리페 3세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왕자였다.
이제 겨우 5살의 아이가 펠리페 3세의 전권대사라는 중책을 맡아 조선을 방문한 것이다.
물론 페르디난도 왕자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실질적인 업무를 위해 디에고 백작이 대사대리의 직책으로 딸려있었다.
그는 대사대리 겸 초대 대한제국 및 조선 대사로 임명되어 있기도 했다.
타국, 그것도 이역만리 떨어진 나라로 가는 대사의 자리에 왕족을, 그것도 나이어린 왕자를 임명해 보내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페르디난도 왕자를 선진학문을 가르치는 조선의 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펠리페 3세의 요청서가 함께 따라온 것이다.
그럼에도 파격적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은 에스파냐가 이만큼 이번 일에 공을 들이고 있음을 시사 하는 일종의 성의 표시였던 것이다.
사실 이 시기 에스파냐 왕실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포르투갈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모자라 왕이 포로가 되는 수치까지 겪었다. 더구나 조선 무역선단을 임의로 압류, 구속하는 리스본 사태이후, 조선과 에스파냐간의 무역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태왕의 명으로 에스파냐에 대한 금수조처가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금수조치는 조선과 거래하는 모든 다른 나라의 상단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무슨 소린가하면 조선의 물건을 사는 상단들은 그 물건을 다시 에스파냐에는 팔수 없다는 약조를 해야 했던 것이다.
만일 그 약조를 어긴 것으로 확인되면 다시는 조선과 거래할 수 없다는 조항이 들어간 협정문에 서명까지 해야 했다.
따라서 커다란 수익을 안겨주는 조선과의 거래가 끊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에스파냐에 조선에서 건너온 물건을 팔려는 상단들은 없었다.
조선의 신문물이 이미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진 뒤였기 때문에 이 조처는 에스파냐 경제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품질이 좋은 조선제 고가품을 쓰는 귀족층에서의 불만도 적지 않았지만 싼 가격에 훌륭한 품질을 자랑하는 다양한 조선제 생필품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일반 백성들의 불만도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한 불만들은 가뜩이나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에스파냐 왕실은 서둘러 조선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금수조치를 해제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국혼을 청한 것도, 어린 왕자를 굳이 대사라는 직책으로 파견한 것도 모두 그런 절박함에 기인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