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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13화 (213/325)

제213화. 결속(結束)

과한 청원이라는 것을 총리대신도 알기에 황후 앞에 바짝 엎드려 간절히 청했다.

그 간절함이 통했던가? 아니면 황후도 명이 불안했던가?

그 진실은 알 수 없었으나 총리대신의 설득에 황후가 순순히 응해 몸소 황궁에 마련되어 있는 전신소로 행차했다.

놀란 황궁 전신소 관리들을 다독여 황후가 태왕과 전문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폐하, 강녕하시옵니까? 신첩(臣妾)은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나이다.”

“황후를 걱정시켜 미안하오. 다행히 장병들의 노력 덕에 무사히니 이제 걱정하지 마시구려.”

“돌아오소서.”

“남은 일이 있으니 마치면 돌아가리다.”

“신첩은 불안하옵니다.”

자신이 낳고 자란 모국이자 오라비가 다스리는 나라를 믿지 못한다 말하는 황후의 마음을 알기 때문일까, 태왕의 답신에 명왕이 언급되었다.

“불안해하지 마시구려. 곁에 내금위장이 건재하고, 명왕이 보필하니 더는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오.”

자신의 오라비가 여전히 태왕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전문으로 확인한 황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혹여 라도 오라비인 명왕이 이번 사태와 연관 되었을까 싶어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님을 알고 안도하는 사이 추가로 전문이 도착했다.

“황후 마마, 소신 명왕이옵니다. 이제부터 신이 죽음으로 폐하를 지키겠사오니 심려치 마소서.”

오라비의 전문을 받고서야 자신이 오라비와 모국인 명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태왕의 안전만을 걱정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것이 왠지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오라버니는 무사하십니까?”

“예. 무탈하오니 걱정하지 마소서.”

명왕의 답신에 안도하면서도 황후의 마음 한편에 놓인 불안감은 완전히 떨쳐지지 않았다. 자신이 모국인 명보다 조선을 더 믿고 있다는 것에 당혹해 하면서도 황후는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전문을 보내도록 했다.

“신첩의 오라비가 폐하를 지키고 있다하니 다행이긴 하오나 폐하, 신첩은 환궁하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황후, 제국을 단단히 이루어 근동의 모두가 전쟁 없이 살 수 있는 기회가 코앞이오. 그러니 지금은 돌아갈 수가 없소.”

“하오나 신첩은 그 기회가 폐하를 앗아갈까 한없이 두렵사옵니다.”

“수많은 생목숨이 그 기회를 지키기 위해 끊겼소. 그 천금 같은 희생을 치르고 겨우 내 한 목숨 살자고 중간에 돌아 갈 수는 없는 일이오. 제국이 반석위에 서는 것이 내 필생의 꿈이오. 그러니 황후. 나를, 내 꿈을 이루게 도와주시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황후가 보낸 마지막 전신의 내용은 이러했다.

“폐하의 꿈이 신첩의 꿈이오니 폐하 부디 꿈을 이루소서. 회의가 끝나는 그 순간 까지 모쪼록 옥체를 살피시옵고, 무사히 환궁하시면 뵙겠나이다.”

황궁 전신소 문 앞에서 이제나저제나 목 빠지게 기다리던 총리대신은 전신소를 나서던 황후의 고개가 가로로 저어지는 것에 낙담했다.

그런 총리대신에게 황후가 말했다.

“폐하의 뜻이 굳건하시니 내각은 그 뜻을 좇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루려 하시는 폐하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전신소로 들어가기 전과 달리 묵직해진 황후의 명에 총리대신이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명심 하겠나이다. 황후 마마.”

“믿겠습니다.”

그 말을 남겨두고 돌아가는 황후의 뒤에서 총리대신 이원익이 깊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

빠르게 혼란을 수습해가는 명나라의 왕궁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유충헌의 눈빛엔 깊은 실망감이 들어 서 있었다.

그런 그에게 무사히 돌아온 호남군단장이 다가섰다.

“최종적으로 투입한 전력이 모두 패하거나 사살 된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서둘러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절강성 남부의 온주(温州)항에 배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서두르시지요.”

“배?”

“위급 시에 대비해 우리 가문의 상단과 거래해온 비율빈(필리핀)에 거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일단 그곳으로 피했다가 구라파(유럽)로 빠져나가야합니다. 제국의 눈 밖에 났으니 이제 이 근방에서 살수는 없으니까요.”

아들인 호남군단장의 말에 유충헌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리 구라파로 도망가면 무얼 하고 살고?”

“적지 않은 금원을 마련해 배에 실어놓았으니 호구지책에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호구지책이라······. 겨우 먹고살 걱정이 없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더냐?”

“예?”

의아하게 묻는 호남군단장에게 유충헌이 말했다.

“사내가 산다는 것은 그리 먹고사는 것만이 다가 아니니라. 그럴 것이었다면 애초에 이리 떨쳐 일어서지도 않았겠지.”

“하오시면······?”

불안하게 흔들리는 호남군단장에게 유충헌이 말했다.

“호남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서 최후까지 싸워 볼 것이니라.”

“제국까지 갈 것도 없이 명군만 동원되어도 정면 대결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지.”

“아버님!”

“나는 그리 할 것이다. 그러니 촌부로라도 살아남길 원한다면 너는 떠나거라.”

그 말을 던져두고 휘적휘적 어둠속으로 걸어가는 아비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호남군단장이 결국 그 뒤를 따라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두 부자가 남창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둘을 비밀리에 들여보내주었던 수문장과 병졸들이 다시 그 둘을 내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로써는 두 사람이 사로잡히는 것이 더 큰일이었던 까닭이다.

자칫 그 둘이 남창에서 사로잡히고, 봉쇄된 성문을 어찌 통과해 들어올 수 있었는지 밝혀지면 수문장과 병사들은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그 덕에 두 사람은 몇몇 호위병들과 함께 무사히 남창을 빠져나가 호남으로 향할 수 있었다.

남창 내부의 혼란을 수습한 명군은 왕궁의 내외를 철통같이 방어하는 것은 물론, 왕궁 자체를 아예 병력으로 둘러싸버렸다.

다행히 공격은 정문과 태왕이 머무는 전각에 집중되어 다른 제후국의 군왕들이 머무는 영빈관은 공격을 받지 않았다.

그 덕에 털끝하나 다치지 않은 제후국 군왕들이 오히려 제국 최고회의를 중단하고 돌아가길 원했다.

그들의 청을 조선의 태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광해가 단호히 거부했다.

적도들은 격퇴되었고, 명왕이 명군을 완벽하게 통제하여 호위하고 있으니 괜찮다는 이유였다.

가장 먼저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던 황제의 생각지 못한 반응에 제후국 군왕들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후금의 누르하치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폐하께오서는 명왕을 믿으시옵니까?”

“내 제후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겠는가?”

“하면 후금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 해도 돌아가지 않으셨겠나이까?”

그 성정만큼이나 직설적인 누르하치의 물음에 광해가 빙긋이 웃었다.

“명왕만큼이나 내 그대를 믿으니 당연하겠지.”

감히 황제와 눈을 맞추고 한참을 바라보던 누르하치가 고개를 숙였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소신은 폐하의 뜻에 따르옵니다.”

누르하치의 말에서 그 속내를 짐작한 광해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 황제와 감히 눈을 맞춘 방종에 대해선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호통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졸이던 다른 제후국 군왕들의 눈이 커졌다.

뭐랄까, 누르하치와 황제 사이에 무언가 결속이 생겼다는 느낌이랄까. 제후국들 중 가장 강성한 나라를 꼽자면 명과 후금이다.

그 둘이 황제와 결속을 맺은 상황에서 돌아가겠노라고 나설 수 있는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제후들의 청원은 흐지부지되고 제국 최고회의는 속행되었다.

남은 기간, 회의가 진행 되는 동안 황제와 제후들의 관계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단단해졌다.

뭐랄까?

황제가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제후들을 믿으려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제후들이 인지했다고나 할까.

그 작은 인식이 커다란 변화를 이끌고 있었다.

특히 제국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가장 먼저 시작할 것이라 모든 제후들이 예상했던 후금의 누르하치의 태도 변화가 극명했다.

그렇다고 이전보다 공손해졌다거나 고분고분해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뻣뻣한 것도 이전과 마찬가지였고, 제 할 말 다 하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눈빛이 변했다. 거칠고 사납기만 했던 과거의 눈빛은 사라지고 담담해졌다.

그러게 담담해진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는 누르하치가 황제가 하는 모든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다도 따위 겉과 속이 다른 명나라 돼지들이 겉치레로 삼는 것이라 치부하며 관심을 두지 않던 그가 황제에게 직접 다도를 청해 배우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 누르하치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가, 수행해온 후금의 한 대신이 영빈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르하치에게 조심히 물었다.

“어찌 조선의 태왕을 따라하십니까? 또한 어찌 그런 눈으로 황제를 보십니까? 제가 아는 그 눈빛은 대왕께서 아버님을 대할 때 지으시던 눈빛과 같았나이다.”

대신의 물음에 크게 웃은 누르하치가 답했다.

“그랬던가. 하긴 이전까지 내가 존경하는 이는 아버님이 유일했으니.”

“조, 존경······. 설마 전하!”

“큰 소리 낼 것 없다. 저만한 사내를 어찌 존경하지 않을까. 나 같으면 제국이고 뭐고 없었다. 돌아가 군병을 이끌고 돌아와 명을 피로 씻어 무릎 꿇리고 내 발밑에 두었겠지.”

“하온데 어찌 그러지 못하는 황제를 존경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럴 힘이 없는 이의 인내는 굴욕이나 그럴 수 있는 힘이 차고 넘침에도 참는 자의 인내는 노력이다. 자신의 꿈을 향해 진력으로 다하는 노력. 그런 자를 어찌 존경치 않겠는가.”

“하면 대왕을 믿는다는 황제의 말도 믿으시는 것이옵니까?”

“적어도 그러려 노력한다는 것은 믿을 수 있겠지.”

그 답을 하는 누르하치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어있는 것을 보며 대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왕도 황제를 믿으십니까?”

“믿음이라······. 재미있는 단어지. 내게 향하는 상대의 마음을 표현할 때도 그렇지만 내가 상대에게 향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어도 난 신의 없는 돼지새끼가 되고 싶지는 않다.”

누르하치의 말에 대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며칠 후, 보름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던 제국 최고회의가 끝이 났다.

무장반란에 의해 왕궁이 공격받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황제를 비롯한 제후들은 끝까지 남아 회의를 마무리 했다.

그럼으로써 제국 최고회의를 흔들려는 외부의 그 어떠한 압력이나 방해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회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황제와 제후들을 경호하기 위해 대한제국군으로 편성된 1만과 중앙군단이 모두 동원되었다.

특히 황제의 귀환 행렬에는 명왕이 직접 호종하였다. 그런 황제의 귀환 행렬을 이미 집결해 있던 절강군단이 강서와 절강의 경계까지 나와 맞이했다.

그렇게 2개 군단이 철통같이 에워싼 황제의 어가 행렬은 항주항구로 이어졌고,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황실 전용 수송선에 올라탄 황제를 10여척에 달하는 조선 해군 함선이 호위해 바다로 나아갔다.

바다엔 일칠함대와 71기동함대가 대기하고 있다가 그렇게 바다로 나선 황실 전용 수송선을 둘러싼 채 신도항으로 향했다.

신도항에 도착한 황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순신을 비롯한 고위 장수들과 중무장한 내금위 병력이었다.

외국도 아니고 조선 내에서 중무장이라니······. 조선에서 기다리던 대신들이 이번 일로 얼마나 놀랐는지 여실히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 모습에 광해는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광해가 신의주의 영성궁으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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