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사투(死鬪)
조선군 전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최소한의 방어 병력을 제외한 조선 육군 전체가 기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완전 무장 상태로 대기하고 있던 조선 육군은 출정 대비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모조리 국경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태왕의 붕어 소식은 아직 병사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자칫 분노한 병사들이 명령에 앞서 전투를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따라서 집결이 끝나기 전까지 해당 소식은 단장급 이상의 고위 지휘관들만이 알고 있도록 통제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부3도를 담당하는 3전단이 명과의 국경으로 집결하고 있었고, 만주4도를 관할하는 2전단은 서부 3도를 통해 명으로 파견될 것에 대비해 집결을 시작했다.
이미 긴급전개 되어 있던 상해에서 남창으로 진격하기 시작한 72, 75병단을 제외한 제7기동전단의 나머지 병단들이 주둔지인 동래를 출발해 부산포로 향하고 있었다.
해외 5도와 북해도, 대만도를 비롯한 해외 영토들을 방어하는 5전단에도 비상이 걸려있긴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배치된 지역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명에 전력을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명령이 떨어지면 병력을 차출해 명에 파견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국경을 돌파해서 명나라로 진격할 채비를 갖춘 것과 달리, 본토를 방어하는 1전단만은 모두 정위치에 배치되어 경계 상태에 들어갔다. 만약에 가해질 수 있는 명군의 역공에 대비한 것이었다.
해군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기동전단을 태우기 위해 수송함대들이 일제히 기항지를 출발해 부산포로 향하고 있었다.
부산포가 모항이었던 11수송함대는 이미 병력탑승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기동전단 예하 병력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태왕이 탑승했던 왕실전용 수송선을 호위해 절강성까지 진출했던 초도분 일칠함대는 곧바로 절강성 앞바다 일대를 장악했다.
아울러 8척의 온조급 구축함들 중 4척을 항주까지 들여보내 항주항에 정박 중인 명나라 함대를 봉쇄했다. 그 작전엔 서해를 경비하는 연안경비단 소속의 장갑귀선과 판옥전선들도 합류했다.
복잡하고 수심이 낮은 지역이 많은 서해를 경비할 목적으로 아직까지 운용되고 있는 장갑귀선과 판옥전선들은 작은 돛 하나와 노를 추진력으로 삼고 있었지만 장비하고 있는 포는 이미 삼포로 모두 개장된 상태여서 화력은 왕무급 호위함에 필적할 정도였다.
아무리 발달한 선체인 왕무급일지라도 수심이 낮은 서해에서는 기동성이 유리한 장갑귀선이나 판옥전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이 명을 비롯한 제후국들에 왕무급 호위함이 배치되었음에도 구시대의 함선이 되어버린 장갑귀선과 판옥전선을 퇴역시키지 않고 운용하고 있는 연유였다.
그런 조선 해군의 움직임에 22척의 왕무급 호위함으로 구성된 명나라 함대는 영문도 모른 채 항주 항구에 발이 묶였다.
그런 일련의 상황에서 가장 먼저 출발한 본토 병력은 해병대였다.
유사시에 대비해 이미 1여단과 해병강습여단을 탑승시킨 채 대기하고 있던 까닭에 통합지휘소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출항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분노한 해병대 총사인 곽재우가 직접 탑승해 지휘하는 해병 강습함대가 이미 포항을 출발해 명나라를 향해 항진 중이었다.
그들은 항주까지 직접 들어가 상륙작전을 펼친 후, 곧바로 남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조선군에서 유일하게 일반 병사들까지 태왕의 붕어소식을 접한 해병대의 분노는 거의 극에 달해 있었다. 오죽하면 강습함대에 탑승해 있는 해병대원들이 자발적으로 철모에 ‘모조리 처 죽이자’라 적은 붉은 띠를 둘렀을 정도였다.
이처럼 조선군 전체가 요동치던 당시, 조선과 국경을 접한 명나라 절강군단 지휘관들은 속속 올라오는 보고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조선의 강소도와 마주한 국경지대로 대규모의 조선군이 집결하고 있으며 조선 해군 함선들이 항주 항구를 봉쇄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 원인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왕이 남창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움직임이 너무 급작스러웠다. 더구나 집결 시작시점이 어둠이 가득한 야밤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긴장도가 높았다.
곧바로 왕성이 있는 남창으로 전령을 보내고 절강군단도 집결을 시작했다. 이유를 모르더라도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짜로 조선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였다. 절강군단이 일전에 자체적으로 검토한 바에 따르면 조선군과 정면으로 대결을 펼쳤을 경우 절강군단은 단 1시진(2시간)의 전투로 괴멸된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강소도에 배치된 조선 육군 3전단 예하 34병단과의 단독 결전만 상정했을 때의 결과였다.
병력수로는 2만인 절강군단의 절반에 불과한 1만의 34병단이었지만 화력을 포함한 전투력은 절강군단의 5배를 상회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고대로라면 집결중인 조선군은 34병단만이 아니었다. 그것이 절강군단 지휘부를 긴장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사방에서 올라오는 전신들을 지휘소 요원들이 시각화 시켜놓은 대형 작전상황도를 바라보는 이순신의 눈빛은 여전히 무섭도록 차가웠다.
현재 대량의 병력이 부산포로, 대규모의 물자가 제물포로 몰리고 있었다. 근거리 교역을 위한 조선무역선들이 제물포를 거점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들을 상해로 이동시키기 위해 군수물자들도 제물포 항구로 집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실시하기 위해 근거리 교역단에 소속된 조선 무역선들에 대한 집결 명령도 하달되었다.
그렇게 군수물자 수송에서 자유로워진 수송함대들을 이순신은 모조리 병력 수송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그것을 통해 최단시간 안에, 최대치의 병력을 명나라에 투입해 완전히 끝장을 낼 각오였던 것이다.
일부 참모들에게서 예비군의 소집 요청이 있었다. 명나라 전역을 말살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병력이 필요하니 본토 방어를 예비군에게 맡기고 1전단까지 명나라로 투입하자는 의견이었다.
전역자들로 구성된 예비군의 현재 병력은 50만이다. 1년에 5일씩 2차례의 훈련을 받는 이들의 전투력은 현역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이들이 수년간의 군임무를 수행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수치였다.
참모들의 요청을 이순신이 심사숙고했다. 그리고 내려진 결정은 보류였다.
이순신은 예비군을 소집했을 경우 일게 될 사회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비군이 소집된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조선이 정규군을 최대치로 외정에 동원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할 터, 결국 태왕의 붕어소식을 백성들에도 알려야 하는데 사망한 태왕의 용체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 71, 72 기동 병단이 남창에 도착해서 상황을 파악한 연후에 다시 결정한다.”
이순신의 명에서 그 속내를 짐작한 참모들이 두말없이 고개를 숙여 복명했다.
그런 참모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작전상황도를 바라보는 이순신의 표정은 날카로웠다.
*****
죽어서라도 지키려는 자들과 죽여서 살길을 찾으려는 이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 전각 안마당에서 살벌하게 벌어졌다.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 구하려는 이들과 어떻게든 막아서 살길을 도모하려는 이들의 전투가 무너진 전각 담장부근에서도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미 화약무기를 재장전해 사용할 수 없을 만큼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는 양쪽 모두 다 창칼과 같은 육박전 병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 탓에 싸움은 더 거칠고 피는 더 많이 흘렀다.
지세창을 포함한 10여명의 내금위 병사들은 목숨을 도외시하고 싸움에 임했다. 마치 자신의 몸에 적병의 칼을 박아 넣어도, 적을 벨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듯이 굴었다.
자신의 안전을 돌보며 싸울 수 있는 여건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적을 줄이지 않으면 금방 뚫릴 정도로 방어선은 얇고 작았다. 그에 비해 사납게 달려드는 적의 수는 여전히 많았다.
그런 저돌적인 내금위의 전투방식에 휘말린 적병들의 시신이 쌓여갈 수록 내금위 병사들의 몸엔 상처가 늘어갔다.
그들이 흥건한 자신들의 피 위에서 사력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지만 너무 많은 상처들을 입은 데다 지쳐있었다. 그 탓에 적병과의 전투에서 쓰러지는 내금위 병사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그렇게 막아서는 이들의 수가 줄어들자 내금위가 형성한 방어선을 뚫고 뒤로 파고드는 적병들이 생겼다. 그들도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고든 적병들은 태왕의 곁에 바짝 붙어선 임경업을 위시한 자폭임무를 맡은 병사들이 연달아 총을 쏘아 사살했다.
그것엔 태왕도 참여했다. 순식간에 5발을 다 쏜 태왕이 여섯 발 째에서 멈추었다. 그 한발은 최후의 순간에 자신에게 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총에 이어 일권총까지 다 쏜 임경업이 칼을 빼들고, 자폭임무를 맡은 병사들이 심지를 움켜쥐었을 때 비로소 적을 뚫어낸 군사고문단의 일부가 안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성공했다.
필사적으로 막아서는 적병들을 모조리 깨부수고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릴 것이라 판단한 군사고문단의 지휘 장수가 전각 안으로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투입했던 결사대는 50명이었다.
그들이 동료들의 엄호를 받으며 적병들이 무너진 전각 담장 주변에 쌓은 방어선을 향해 돌진했다.
자신들이 살기위해서는 어떻게 하든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적병들도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방어선을 뚫어내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결사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전각 안마당까지 파고드는 데 성공한 결사대는 20명에 불과했다.
전투 와중에 말까지 잃고, 모두 상처투성이이긴 했지만 타국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될 만큼 모두가 전투 전문가들이었기에 군사고문단 병사들의 실력은 내금위 못지않았다.
그들의 합류로 안마당 방어선이 다시 단단해지자 적병들의 얼굴에 초조감이 들어섰다. 앞에선 철벽같이 막고, 뒤에선 도끼로 쪼개듯 후방을 무너트리며 돌진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든 태왕을 사로잡는 한 가지 방법뿐이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그런 그들에 맞서 안마당에 방어선을 펼친 내금위와 군사고문단 결사대 병사들이 처절하게 싸웠다.
촤악-!
사선을 그리며 휘둘려나간 칼을 따라 허공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악착같이 달려들던 적병의 마지막 한명의 목을 베어버린 지세창이 거친 숨을 내어 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살아서 숨 쉬는 적병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살아남아 움직이는 2백 남짓한 모두가 조선군이었다. 황급히 태왕을 찾아 건재함을 확인한 지세창이 주먹을 불끈 쥔 손을 하늘 위로 치켜 올렸다.
그 모습에 살아남은 내금위 병사들과 군사고문단 병사들이 피에 물든 주먹을 하늘 위로 치켜들고 함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그 함성을 밟으며 그때서야 정문 쪽을 간신히 정리한 명군 금의위가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