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명나라 호남성 토호 유충헌
조선의 초기 군제를 모방한 명군은 지방 군단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왕도인 남창을 방어하는 중앙군단을 강서성에 두고 나머지 사천, 귀주, 호남, 절강의 4개 성에 4개의 지방군단을 두고 있었다.
한성 조약이라고도 불리는 대한제국 조약에 의거하여 제후국이 보유하고 있어야하는 대한제국군 3만의 병력 중 2만은 이미 동원되어 파견된 탓에 나머지 1만의 대한제국군도 중앙군단과 함께 남창에 주둔해 있었다.
이들 대한제국군은 조선이 공급한 일총으로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중앙군단도 다르지 않아서 2만의 병력이 완벽하게 일총과 홍이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방군단들은 그 사정이 조금 달랐다.
일단 화기의 보급이 부족했다. 조선에서 수십만 정에 달하는 대량의 일총이 제후국들로 보급되기는 했지만 제후국들이 보유한 병력을 완전히 무장시키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수량이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지방군단들 중 성능이 좋은 일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각기 5천에 불과했다.
그나마 일총을 보급 받지 못한 1만5천 중 5천은 조총과 홍이포, 거기다 총통까지 망라한 구시대 화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부족해서 1만의 병력은 창칼과 활 같은 전통적인 살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명나라가 보유한 무장병력은 10만에 달했다. 여기에 조선에서 사온 왕무급 호위함 30척으로 이루어진 함대가 명군의 수군을 이루고 있었다.
한때 백만 대군을 거느리며 동북아시아 일대 전체를 호령하던 명나라를 생각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현실이었지만 오히려 내실은 더 충실했다.
그 모두가 상비군으로 제대로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명나라 군대가 조선의 군제를 모방하여 따르고는 있다고는 하나 완벽하게 같은 것은 아니어서 군과 치안병력을 완벽하게 나누어 보유하고 있는 조선과는 달리 명은 그 구분이 모호했다.
왕도인 남창이 있는 강서성의 경우엔 나름대로 치안병력이 제법 기틀이 잡혀 완벽하게 별도로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가 존재했지만 4개의 지방성은 그렇지 못했다.
판소에 배속된 치안병력의 부족으로 자주 병영의 군단에 지원을 청했고, 그럴 경우 지방군단에서는 병사들을 내보내 판소의 치안임무를 도왔다.
그것은 어떻게 하든 상비군 수를 줄여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대한제국이 출범하면서 이전과 달리 명을 둘러싼 외적과 싸울 일이 없어졌기에 대군을 보유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사인 10만도 많으니 더 줄이자는 이야기가 명나라 조정에서 자주 나오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군사력을 줄이면서 지출되는 군비가 감소하서 상대적으로 경제 발전에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덕에 대량의 자금이 투입된 명나라 사회 전반에서 발전이 탄력을 받고 있었다.
다만 그런 사회발전의 열매가 과거부터 부호로 불리던 이들과 일부지방 호족들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선의 법을 모방하여 쓰고 있긴 했지만 사업장과 토지의 대부분을 황실이 소유하고 백성들을 근로자로 삼아 막대한 이익을 나누어주는 조선을 답습할 능력이 명나라 황실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처럼 소득분배법을 재정해 반포하여 실행하고 있긴 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도움으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면서 고질적으로 겪고 있던 대규모 실직사태는 사라졌다고는 해나 여전히 일할 수 있는 자리보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의 수가 더 많았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사업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나 지주, 토호들이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서류만 법대로 지급한다고 작성할 뿐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적은 돈을 주고 일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명나라 백성들의 삶은 곤궁했다. 명왕이 그것을 바로잡아야 했지만 고질적인 관리들의 부패가 여전해서 제대로 된 업무보고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관리들의 태반이 그런 지주와 토호의 자손들이거나 그들과 인척관계로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와 관련하여 명왕에게 보고되는 내용들 중에 절반을 넘어서는 것이 거짓으로 가득했다.
그것을 걱정한 서안 공주의 부탁을 받은 조필이 철산 상단들이 보유한 정보를 명왕에게 보내주어 그나마 바로잡아 버텨내고는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요사인 그것 때문에 일부 토호와 지주계층들이 반발하고 있었다. 충성스러운 명나라의 신하들인 자신들은 믿지 못하고, 외인의 말을 들어 자신들을 핍박하고 있다는 논리였다.
일부에서는 그 반발이 도를 넘어 간간히 왕명을 위반하는 경우에 까지 이르러 있었다. 특히 호남의 전통적인 토호인 유 씨 집안의 당대 가주인 유충헌이라는 자가 유독 반발이 심했다.
본래도 대지주였던 데다 경제 발전의 과실을 따먹으며 몸집을 불린 유 씨 가문의 장자가 호남군단의 군단장이 된 이후로는 그 위세가 더 높아져 호남에선 유충헌이 왕이란 말이 나돌 지경이었다.
영토가 축소된 명에서 두 번째로 큰 경제력을 가진 호남의 경제를 한손에 틀어쥔 데다 장남인 호남군단장을 통해 호남의 군권까지 장악하면서 사실상 호남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세가 얼마나 드셌는지 최근엔 명나라 왕실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다.
따라서 명왕과 그의 심복 대신들은 제국 최고회의가 끝나면 유충헌과 그 추종세력을 손볼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실제로 명왕은 제국 최고회의 중 방문할 황제에게 유충헌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 최고회의가 명나라의 수도인 남창에서 열렸다.
황제인 조선 태왕을 비롯해 나머지 10개의 제후국 군왕들이 모두 남창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제후국의 군왕들에겐 왕궁 인근에 새로 지어놓은 영빈관들이 제공되었고, 황제인 조선의 태왕에게는 왕궁 한 편의 전각을 통째로 비워 내어주었다.
2백에 달하는 조선 내금위가 그렇게 배정된 왕궁 전각을 완벽하게 둘러싼 채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번 태왕의 외유에 동원된 내금위의 병력은 2개 대 2백으로 한명, 한명이 일당백의 최고 정예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이들을 내금위장인 지세창이 직접 지휘하여 지근거리에서 태왕을 호위하고 있었다.
평소 내금위는 검과 일권총의 휴대만이 허용되었지만 지금은 다총에 수탄까지 장비하는 중무장 상태였다.
뿐인가 2개 대의 내금위엔 구포 10문과 현식총 20정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거기다 특별히 제작된 열기구를 소지한 비행대까지 배속되어 있었다.
이 내금위 비행대가 보유한 열기구는 한 개로 1개 비행대가 2개의 열기구를 보유하는 것과는 다른 구성이었다.
이 비행대는 유사시 최단시간 안에 열기구를 띄울 수 있도록 훈련되어있었고, 그에 필요한 특수 장비도 갖추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열기구를 띄우기 위해서는 예열 등 1시간정도의 준비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들이 가진 장비를 동원하면 30분 만에 열기구를 띄울 수 있었다.
더구나 이들이 보유한 ‘01호 열기구’는 조금 특이해서 2마리의 말과 2명의 승객을 추가로 탑승시킨 채 상공으로 날아오를 수 있게 제작되어 있었다.
승객으로 예정 된 사람은 황제와 내금위장인 지세창이었다.
이 비행선을 운용하는 승무원 2명은 다른 비행대원들과 달리 지상과 연결된 줄을 끊고 바람을 따라 비행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상태였다.
최악의 경우 황제와 내금위장을 태운 채 위험지역을 이탈하기 위해서였다.
거기다 명나라로 전개된 내금위는 이동용 대형 발전마차와 전신마차까지 동행하고 있었다.
온통 철로 만들어진 발전마차에는 2백 마력짜리 소형증기관과 연동된 소형 증기터빈이 장착되어 전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서 발생된 전기로 전신마차의 전신기를 돌려 신의주의 원수부 통합지휘소와 연결하고 있었다.
그렇게 만반의 태세를 갖춘 전각 안쪽에서 광해가 명왕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명왕이 먼 길을 와준 광해를 위해 준비한 술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주로 다뤄진 것은 조선의 황후인 서안 공주의 이야기였다. 두 사람 공통의 화제이면서도 가벼운 대화가 가능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덕에 어린 시절의 서안 공주와 지금의 서안 공주를 비교해가며 웃음을 터트리는 광해와 명왕의 대화가 잔잔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
유충헌은 생각 외로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명나라 왕실에 자신의 끄나풀이 되어줄 환관을 심어놓을 정도로 기민했던 것이다.
그렇게 심어놓은 환관을 통해 명나라 왕실이 제국 최고회의가 끝난 후, 자신에 대한 토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전달 받았던 유충헌은 앉아서 당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과감하게 움직여 제국 최고회의를 위해 참석한 황제를 사로잡기로 결심했다.
명왕과 다른 제후국들의 군왕들은 관심 밖이었다. 조선의 태왕에 비하면 그들은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물론 태왕을 사로잡아 그것으로 제국을 도모한다든지 조선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란 나라의 강성함은 귀가 따갑게 듣기도 했고, 실제로 조선에서 건너온 무기들을 보면서 피부로 느끼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황제를 노린 것은 적어도 그를 확보해야 오히려 조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태왕이 갖는 권위와 중요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태왕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는 한 조선은 결코, 절대로 군대를 투입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이번 거사가 가능했던 것도 그 논리가 먹혔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앉아있다간 죽음만이 기다린다는 것도 작용했다.
속된말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제대로 한번 움직여보고서라도 죽자 라는 분위기였달까.
따라서 유충헌이 동원한 군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곳은 남창의 왕궁, 그것도 대한제국 황제이자 조선의 태왕이 머무는 전각이었다.
이 군사적 움직임에 동원된 병력은 호남군단 중 1만으로 모두가 화기로 무장한 병력들이었다. 이들을 비밀리에 이동시키기 위해 유충헌은 모두를 상인과 부랑자들로 위장시켜 제국 최고회의가 벌어지기 열흘 전까지 모두 남창으로 잠입시켜 두었다.
백만이 넘는 인구가 모여 사는데다 일자리를 찾아 하루에도 몇 천 명이 넘는 실직자나 거래를 위한 상인들이 드나드는 남창인 까닭에 그들의 잠입은 티도 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남창으로의 잠입을 서둘렀던 것은 제국 최고회의 개최 5일 전부터 남창성문을 닫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기 때문이다.
모두 최고의 경호를 위한 조처들 중 하나였다.
그것을 위해 2만의 중앙군단도 닫힌 성문 밖에서 성을 둘러싸고 완벽하게 보호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제국 최고회의가 개최되는 기간 동안, 남창 성내에는 대한제국군으로 편성된 1만의 병력만이 남아 성내의 방어와 경비를 책임지게 되어 있었다.
그들도 궁 밖의 경비일 뿐 궁내는 흔히 금의위라 불리는 명나라의 전통적인 금군인 친군지휘사사의 병력 2천이 도맡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외부와 단절된 남창으로 유충헌과 호남군단장이 들어섰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부패가 뿌리 깊은 명나라의 관부는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긴 군대를 동반한 것도 아니고, 호위무사 3명을 거느린 두 사람의 방문을 위험상황으로 보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관련한 중앙군단 소속 고위 장수들은 그저 제국 최고회의에 참석한 황제와 안면을 트고 싶어 방문한다는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을 위해 건넨 거액의 돈도 한몫 했지만.
그렇게 남창 성내로 진입한 두 사람은 객잔에 투숙한 채 황제와의 만남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비할 수 없이 축소되긴 했지만 여전히 최고위 사찰기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창의 요원들이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그렇게 단출한 인원만을 대동하고 남창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속내로는 반겼다. 제국 최고회의가 끝나면 곧바로 추포하여 목을 베어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창은 그들을 감시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행동을 특별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자칫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남창을 벗어나면 오히려 호기를 놓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 동창 고위직 환관들 중에선 괜히 시간을 끌다 낭패 보지 말고 그냥 지금 잡아들이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고위환관이 맡고 있던 제독동창은 명왕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제국 최고회의 기간 중에 불협화음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그 의견을 묵살했다.
그런 상황에서 5월 1일이 오자, 제국 최고회의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첫날, 제후국의 군왕들이 황제의 앞에 나아가 공식적인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일정이 개시되었다.
첫날은 가벼운 인사와 그간의 경과 등을 제후국의 군왕들이 신하로써 황제에게 보고하고, 그 노고를 황제가 치하하는 자리로 이루어졌다.
그날 밤 개최국인 명왕이 주최하는 연회가 열렸다.
왕궁 밖으로까지 연회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많은 이들이 그런 음악을 들으며 궁금한 표정으로 궁을 바라봤지만 두 사람만은 뱀처럼 차가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시작하시지요.”
아들인 호남군단장의 말에 유충헌이 고개를 저었다.
“이르다.”
“어찌······. 저처럼 연회를 열고 있을 때가 적기가 아닙니까?”
“저들의 마음은 풀어져 있을지 몰라도 회의가 막 시작된 터라 경비병들의 경계심은 오히려 지금이 최고조일 때다.”
“하오면 언제······?”
“시일이 지나면 경계심도 누그러지고 일상에 무뎌지는 법이다. 우린 그 때를 노린다.”
아비인 유충헌의 말에 호남군단장의 고개가 숙여졌다.
“알겠습니다. 아버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자신의 뜻에 수긍하는 아들과 함께 궁을 바라보는 유충헌의 눈매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미래회의와 마찬가지로 보름의 기한으로 열리는 제국 최고회의는 연일 회의의 연속이었다.
온 나라가 태왕에게 충성하는 조선과 달리 경호문제가 대두되어 외부 시찰은 일정에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의가 7일째 이어지던 날 밤, 유충헌이 아들인 호남군단장을 불렀다.
“시작하자.”
그 말 한마디에 조용히 호남군단장의 모습이 객잔에서 사라졌다. 사전에 마련해 놓은 비밀 통로를 통한 탓에 객잔을 감시 중이었던 동창의 요원들조차 눈치 채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2시간 후, 요란한 함성과 함께 일단의 무장병력이 명나라 왕궁의 정문인 오문을 향해 노도처럼 밀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