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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07화 (207/325)

제207화. 황자 이호

이원익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전각의 주인인 어린 황자는 다행히 영특했다. 황자의 지도를 맡은 이들이 한결같이 영재라 입을 모을 정도였으니까.

그래서인지 어린 나이에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 열리는 제국 최고회의와 달리 후계자들이 모이는 미래 회의는 이미 3차례나 열렸다. 2년에 한 번씩 만나 보름 정도 함께하는 이 회의 덕에 제후국의 후계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유대관계가 형성 되어 있었다.

그런 미래회의에 작년부터 어린 황자가 참석하기 시작했다.

혹시 은근히 따돌림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들이 많았지만 8살의 어린 황자는 상당히 유연하게 녹아들며 제후국의 후계자들과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이처럼 순식간에 한 무리가 되었다.

제법 나이 있는 후계자들 사이에서 역시 제국의 후계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영특한 황자였지만 여전히 대신들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하간 대통을 이을 황자의 수가 혼자라는 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왕이 후궁을 볼 생각이 없으니 황자에게서라도 적통 황실 자손을 서둘러 생산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신하들 사이에서 어린 황자의 혼례를 서두르려는 움직임들이 일었다.

이 움직임에 제국 대사들이 합류했다.

미래회의에 참석했던 후계자들 사이에서 황자의 영특함이 전해진 까닭에 제후국 왕실들에 조선의 후계자는 황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들이 생겼던 것이다.

다시 말해 차기 조선의 태왕이었고, 대한제국의 황제였다. 그런 이의 배필이 자국에서 나온다면 그 덕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건 제후국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명만 보아도 분명했으니까.

명에는 매년 상당한 금액의 지원금이 조선 황실에서 지원된다. 명목도 ‘사돈의 번영을 위한 지원금’이다.

지극히 사사로운 자금이었지만 황실의 재산을 태왕의 마음대로 쓰는 것이니 누가 나서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당연히 다른 제후국들보다 명의 발전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과거 가장 먼저 무너질 것이라던 명이 요사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태정을 일삼던 명왕이 일전에 열렸던 제국 최고회의에 참석했던 이후,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지 정사를 돌보는 것에 열심이었다.

본래부터 비옥한 대지와 다량의 자원을 가지고 있던 명이었기에 북부의 대부분을 잃고, 남부의 일부도 빼앗겼지만 여전히 물산은 풍부했다.

그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의 규모는 제후국들 중 가장 컸다. 하긴 경제의 모태가 되는 인구수로는 대한제국의 종주국인 조선보다도 많았으니까.

그 많은 인구수가 모조리 노동력이 되어 산업 현장에 투입되고 있었다. 그것이 조선의 제도를 모방한 명나라 사회 전반이 무섭도록 빠르게 성장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그런 일련의 명나라 발전의 배후에 조선 황후의 조언과 지원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황후가 감추지도 않았고, 태왕이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기 태왕이 될 황자의 배필을 자국에서 낼 수만 있다면 지금 명이 누리는 덕을 그 나라도 누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제후국의 왕실들이 배필감을 뽑는다고 조선의 대갓집들보다 더 소란스러웠다. 오죽하면 제후국 왕실들의 소란이 조선의 황궁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그래서였던지 여느 때처럼 침전으로 불러들인 황자를 앞에 앉히고 광해가 물었다.

“호야.”

“예. 아바마마.”

“대신들 사이에서 네 국혼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예. 소자 들었나이다.”

“네 생각은 어떠하더냐?”

광해의 물음에 올해로 9살이 된 황자 이호가 답했다.

“소자는 아바마마의 뜻에 따를 것이옵니다.”

황자의 답에 광해의 입가로 미소가 깃들었다.

광해의 뜻에 따라 유모 상궁이 아니라 모후인 서안 공주의 손에서 직접 길러진 황자는 명나라 황실 예법과 조선 황실의 예법에 의해 훈육 받았다.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상당이 어려운 일이었지만 호는 제법 잘 따랐다.

그것이 안타까워 광해는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꼭 황자를 불러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만큼은 명나라 황실 예법도, 조선의 황실 예법도 아닌 그저 아이로 크길 바랐기 때문이다.

뒤에 시립해 있던 상선, 알지를 눈짓으로 내보낸 광해가 다시 물었다.

“진짜 네 속내를 이야기 하라고 녀석아.”

광해의 말투가 달라진 것에 뒤를 흘깃 돌아보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황자가 단정하던 자세를 풀어 철퍼덕 주저앉더니 말했다.

“장가들면 엄마 같은 사람이 색시가 되는 거야 아빠?”

“웃기시네. 네 엄마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 줄 알아. 꿈 깨.”

“흠······. 그럼 난 장가 안 갈래.”

“왜? 또 예전처럼 엄마한테 장가간다고 그러려고?”

“에이, 내가 앤가. 그거 안 된다는 건 나도 이제 알거든.”

호의 답에 광해가 큭큭 거렸다.

광해는 황자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자신의 현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편하고 살갑길 원했다.

황자가 커서 다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에겐 어찌 대할지는 모르겠지만 광해 자신은 그렇게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모두가 우러르고 떠받들면서도 하지 말라는 것들 투성이인 황궁생활에서 이 조그마한 아이에게 작은 해방구가 되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어린 황자는 아비의 뜻을 아는지 그 시간을 참 좋아하고 잘 따랐다.

단둘이 있을 때는 투정도 부리고, 황실의 예법과는 상관없이 편하게 지냈다. 어떨 때는 방안에서 씨름도 하고, 베개를 공삼아 축구, 아! 지금은 축국이라 부르는 공놀이도 한다.

좁은 방안에서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을 황자가 무척 좋아했다.

뛰지도 못하게 하는 황실의 예법에 묶여 사는 어린 황자는 아비와 함께 구르고 뛰는 그 시간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황자에게 광해가 물었다.

“그럼 대신들한테 네 성혼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할까?”

“그, 그건······.”

자신의 말에 왠지 망설이는 듯 보이는 황자에게 광해가 물었다.

“왜? 가고 싶은 거야?”

“그게······. 장가가면 함께 있을 친구가 생기는 거니까······.”

미적거리며 황자가 내놓은 답에 광해의 마음이 콱 막혔다.

이 넓은 궁에 황자와 함께 놀아 줄 친구가 없었다.

대신들의 어린 자손들을 들여 시동으로 삼아 함께 지내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하들의 자손이었다.

그들이 황궁으로 들어오기 전에 어떠한 주의와 당부를 받는지 보고,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아마도 황자는 자신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 친구가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면 장가······. 갈래?”

살짝 물기어린 광해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황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것을 바라보며 광해도 마음을 굳혔다.

‘그래. 마음의 의지처가 된다면 이르다 해도 나쁠 것은 없겠지.’

“알았다. 그럼 진행하마. 그건 그렇고 오늘은 어때? 지난 번 내기는 네가 졌으니 오늘 복수전?”

“축국!”

대번에 눈을 반짝이는 황자에게 광해가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래. 이번에도 각자의 오후 간식을 거는 거다. 아빠가 이기면 네 간식은 내 차지, 네가 이기면 아빠 간식은 네 것이지.”

“좋아. 이번엔 절대로 안질거야!”

벌떡 일어서는 황자의 결의가 대단한 것이 며칠 전의 내기 축국에서 진 것이 꽤나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황자의 모습에 웃음을 머금은 광해가 베개를 들어 방 가운데 놓았다.

*****

3월말. 거제 건선단지에서 신형 증기철선들로 이루어진 초도분 일칠함대가 완성되어 진수되었다.

해군의 주력전선들이었던 범선들의 판매가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전배치를 서둘러야 해서 완성된 배들은 1달간의 시험운항만을 거쳐 곧바로 해군에 인도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로인해 해군 총사부에서 선발한 71기동함대의 장병들 중 일부가 해당 함선들로 자리를 옮겨 훈련과 점검을 거제 건선단지의 기술자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보름가량이 흐른 4월 중순,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출발했던 이순신과 이순신 함대가 예정보다 이르게 부산포에 당도했다.

제국 최고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광해가 조선을 떠나기 전에 당도하기 위해 서두른 덕이었다.

다른 함정들은 모두 부산포에 두고 이순신이 탄 기함만이 다시 부산포를 출발해 황도의 부속항인 신도항으로 입항했다.

그렇게 신도항에 도착한 이순신은 곧바로 신의주 황궁으로 발길을 잡았다. 그런 그를 광해가 궁문 앞까지 직접 나아가 맞이했다.

그것으로 온 천하에 이순신에 대한 태왕의 신임이 예전과 같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이후 대전에서 열린 회의석상에서 이순신에게 충무공이란 훈작이 정식으로 수여되었다.

살아서 ‘충무공’이라 불리게 된 이순신을 바라보는 광해의 눈에 감격의 감정이 서려있었다.

그런 태왕의 진심이 전해진 것인지 이순신은 자신에게 내려진 훈작에 정말로 감격하고, 감사해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이순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광해가 말했다.

“그간 수많은 원로에 노고가 많았소. 이제 적어도 외정에 장군을 내보내 곤란을 겪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하니 국내에서 짐을 도와 군정을 잘 살펴주시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깊게 허리를 숙이는 이순신에게 광해가 말을 이었다.

“함께 귀환한 함대 전체에 짐의 치하를 전하고 한 달간의 특별 휴가를 베풀어 그 노고에 보답하게 하시오.”

“감읍하옵니다. 폐하.”

다시 허리를 굽히는 이순신의 얼굴에 감격의 기운이 더 커졌다. 제 몸에 내려지는 황은보다 병사들에게 내려진 휴식의 시간이 더 중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이순신의 변함없는 모습에 빙긋이 미소를 지은 광해가 그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그 연회에서 태왕이 이순신을 곁에 앉히고 친히 술을 따라 주며 각고의 관심과 애정을 드러냄으로써 대신들의 우려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다음 날, 신의주 황궁 바로 옆에 위치한 조선군 원수부로 이순신이 출근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연회의 후유증에다 원로의 피곤함이 가득할 터인데도 그는 원수부로 나왔다. 한 달간의 휴가는 병사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귀환한 이순신 함대에 속함 모든 장수들에게도 해당되어 이순신도 한 달간의 휴가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와 일하는 것을 택했다. 그것을 아뢰는 상선의 이야기에 태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게 휴가 중 출근한 첫날, 이순신이 한 일은 지난 밤 연회에서 광해와 나누었던 이야기들 중 한 가지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바로 새로 만들어진 일칠함대의 소속을 정하는 것이었다.

다수의 사람들은 보유범선들의 판매로 인해 함선들의 수가 급감할 71, 또는 72기동함대에 배치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순신은 새로 만들어진 일칠함대를 대서양함대로 증강 배치하는 안을 만들어 태왕에게 재가를 청했다.

태왕은 곧바로 그 청원을 재가하였다.

지난 밤 연회에서 이순신과 대화를 나누며 이미 결정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곧 시작될 신세계 점령전으로 리스본에서 대규모 병력이 빠져나가게 되는 유럽에, 강력한 함대를 계속 상주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두 사람이 동의한 까닭이었다.

이 일칠함대는 훈련 삼아 곧 있을 광해의 명나라 방문을 호위하는 것에 동원된 직후, 곧바로 포르투갈로 출발하여 대서양 함대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마무리 된 4월 20일, 광해가 제국 최고회의 참석을 위해 신의주의 영성궁을 출발했다.

그런 태왕을 내금위가 검과 일권총만을 휴대하던 평소와 다른 중무장 상태로 호위에 임했다.

또한 이 시간을 기점으로 조선 전군에 2급 전투대기 상태가 발령되었다. 장병들의 휴가와 외출은 금지되었고, 모든 장수들은 각자의 위치에 정위치 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특히 조선의 내해가 된 서해를 담당하는 해군의 연안경비단, 절강성 앞바다로 긴급전개 된 71기동함대의 1개 전대, 신조된 일칠함대, 그리고 서부3도를 관할하는 육군 3전단에 1급 전투대기 태세가 발령되었다.

그 모든 것을 원수부 통합지휘소에서 이순신이 지휘하고 있었다.

태왕이 자리를 비운 이상, 조선의 모든 군권은 황실규범 상 조선군 원수인 이순신에게 자동으로 위임되었다.

27만 육군과 9만 해군, 그리고 4만의 해병까지 도합 40만에 달하는 조선군 전체의 지휘권이 이순신에게 넘어온 것이다.

긴장된 표정의 이순신이 각지의 전신소를 통해 실시간으로 수집되는 정보를 표시하는 작전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전쟁이 아닌 일로 태왕이 조선의 땅을 떠난 초유의 상황을 조선군은 그렇게 긴장된 시선으로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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