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제국 최고회의
이당시 이순신은 퀘벡을 인수한 해병대 병력과 이순신 함대와 함께 퀘벡에 머물면서 본격적인 신세계 점령에 대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는 점령전에 대비해 해병대 공병들을 동원해 대규모 전략창고를 건설하고 주둔지와 점령전 지원 시설들에 대안 건설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신 시험을 마친 통신시험선이 조선으로 귀환하기 전에 퀘벡에도 전신소를 설치한 덕에 이순신은 퀘벡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리스본에 주둔하고 있는 원정군을 지휘하는 것에 아무런 걸림돌도 없었다.
그런 퀘벡 전신소로 조선 해군 총사 이억기의 전신이 도착한 것은 조선과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 사이에 거래가 성사된 2월 말 경이었다.
이억기는 이순신에게 보낸 전신에서 신형 증기철선들의 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함선들의 매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큰 우려를 표명하고, 속도의 조절을 태왕 페하께 진언해 달라는 내용을 적고 있었다.
해군 총사인 이억기가 직접 나서지 않고 이순신에게 전신을 보내 도움을 청한 것은 그가 조선군 전체를 아우르는 원수였기 때문이었다.
이억기의 우려를 전달받은 이순신은 태왕에게 전신을 보내기에 앞서 거제 건선단지에 먼저 전신을 보내 신형 증기철선들의 인도 시점에 대해 문의했다.
이 당시 조선은 각 도의 감영에 전신소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현재는 각 시들로 전신소의 설치가 확산되는 중이었다.
따라서 중요 시설인 거제 건선단지에도 당연히 전신소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의 전신은 곧바로 거제 건선단지로 보내졌다.
이순신의 전신을 받은 거제 건선단지의 건선장 나대용이 답신을 보냈다.
그 답신에 따르면 초도분 일칠함대는 3월말 진수 예정이며, 1월부터 건조에 들어간 일칠함대 2개 분량의 신형 증기철선들은 9월까지 건조를 끝내라는 황명을 받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신세계 점령전에 소요될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30척은 4월말에 진수될 예정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답신을 받은 이순신은 리스본의 이항복에게 다시 전신을 보내 조선과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의 거래가 언제 이루어지는지 물었다.
이항복은 이순신에게 9월 인도 예정으로 다음 달 안에 인수를 위한 선원들이 잉글랜드에서 조선으로 향할 것이라는 답을 보내왔다.
조선과 포르투갈의 거리를 생각하면 적어도 6월, 늦어도 7월까지는 해당 함선들이 조선을 떠나야 함을 뜻했다.
거기다 사전에 통보받은 대로면 5월에 80척의 해모수급 전열함들이 71, 72 기동함대를 떠나 4개 제후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 말은 이억기의 걱정대로 대량의 해군 전력이 이탈된 상황에서 신형 증기철선들의 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뜻했다.
한참이 고심 끝에 이순신이 광해에게 전신을 보냈다. 매각과 배치의 시간차를 줄이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는 청원이었다.
그 청원이 도착한 다음 날, 광해로부터 이순신함대의 귀환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에는 원정군 사령관인 이순신에 대한 귀환 명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임 원정군 사령관이 도착할 때까지는 포르투갈 총독인 이항복에게 원정군 사령관을 겸하라는 광해의 황명이 떨어졌다.
자신의 도움 요청으로부터 이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에 해군총사 이억기가 당황했고, 조선 해군 전체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이순신 함대도 불안해했다. 이순신의 청이 항명으로 받아들여져 태왕이 분노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명을 받은 이순신은 담담하게 함대에 귀국 준비를 명했다. 그런 이순신에게 부관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이순신은 담담히 답했다.
“걱정을 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폐하의 명이 떨어졌으니 그 신하된 자로써 따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또한 폐하를 나는 믿는다.”
이순신의 답에 부관은 너무 안일하다고 생각했다.
24만에 달하는 병력의 군권을 한손에 쥐고, 병사들의 충성도 단단한 상황에서 본국과 수만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 태왕의 부름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지나 다름없을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이순신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라면 거병하여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관은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평소 보아온 이순신의 성정 상 그런 말을 내뱉었다간 본국이 아니라, 이순신의 칼에 목이 먼저 날아가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태왕의 황명이 떨어지자마자 리스본으로 귀환해 귀국 준비를 마친 이순신은 3월 초, 함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을 출발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 이순신을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항복이 리스본 항구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신임 원정군 사령관이 포르투갈로 향하는 조선 무역선단 편에 탑승하여 부산포를 떠났다.
본토를 떠나 해외영토에 부임할 경우, 운송수단은 조선 무역선단이나 보급을 위해 떠나는 수송함대를 이용한다는 조선의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그렇게 출발한 신임 사령관을 선발하는 것에 광해는 꽤나 고심을 해야만 했다.
사실 몇 해 전, 실제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조선의 의료기술에도 불구하고 권률이 사망한 이래로 조선 육군 총사를 맡고 있는 신립에게 원정군 사령관의 직책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이 있었지만 그러기엔 신립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올해로 일흔한 살인 신립이 맡기엔 너무 원거리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새로 부임할 원정군 사령관으로 거론된 이들은 해군 총사 이억기와 해병대 총사인 곽재우였다.
하지만 해군 지휘관 출신의 장수를 계속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에 대한 육군의 반대로 이억기가 탈락하고, 곽재우의 경우엔 내년 후반기에 대한제국 해병대 2기의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광해가 그를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그러고 나니 2품 상장군 급에서는 선발할 인원이 없었다.
그에 따라 3품 대장군 직품에서 선발이 이루어졌다. 총사급인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된다는 것은 병단장 또는 함대 제독들에 해당하는 대장군들에겐 승진을 예약하는 것과 같아서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 중에서 태왕의 낙점을 받은 이는 왕도방어를 담당하는 11병단이 속한 제1전단을 맡고 있던 김경서였다.
임진왜란 당시 아와지섬 점령 작전을 성공리에 펼쳤던 그는 올해 마흔여덟으로 해외영토를 방어하는 제5전단장을 거쳐 기동전단장을 역임한 뛰어난 야전지휘관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낙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대다수의 군지휘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향후 전개될 신세계 점령전을 사실상 이끌게 될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의 임기는 상당히 길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대규모 병력의 군권을 한손에 쥐게 되는 자리였기에 실제역사에서 청나라에 포로가 된 후로도 적정을 적어 본국으로 보내려 했을 정도로 충절이 뛰어났던 그를 믿고 광해가 맡긴 것이었다.
먼 거리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자리로 나가는 김경서를 위해 광해가 이순신 외에는 누구도 받아본 적이 없는 어검을 하사해 그 위엄을 세워주었다.
그것에 김경서가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렇게 김경서가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떠난 이후, 공석이 된 1전단장은 내금위장인 태평이 맡아 나갔다.
야전지휘관 경험이 없던 이에게 너무 중책을 맡긴 것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광해는 긴 시간 자신의 곁에서 황실을 수호해온 태평을 신임했다.
그런 태왕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 태평은 수하들에게 묻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야전군 지휘관으로써 갖추어야할 것들을 충실하게 채워가고 있었다.
태평이 야전군 지휘관으로 나가면서 비게 된 내금위장 자리는 왕립군관학당 교장을 맡고 있던 지세창에게 주어졌다.
왕년에 조선 제일검 소리를 들었던 이였던 데다 지금은 해체된 산악전단을 성공리에 이끌었던 전적까지 있었기 때문인지 그의 발탁에는 아무런 불협화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일련의 인사가 마무리 된 시점에 총리대신인 이원익이 광해에게 독대를 청해 마주 앉았다. 근래에 없던 독대를 청해온 탓에 걱정이 들어선 광해가 이원익이 들어서기 무섭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광해의 물음에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감히 태왕 폐하께 여쭙고자 하는 것이 있어 존귀한 시간을 내어주십사 청하였사옵니다. 용서하소서.”
사설이 긴 것으로 보아 무언가 자신의 정책들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군신 간에 삼가여야 할 것들이 많다하나 그대와 내가 논하지 못할 것은 없다. 하니 편히 말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깊게 읍을 해 보인 이원익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순신 원수를······. 용서해 주소서. 그가 감히 태왕 폐하의 황명을 고쳐 달라 청하긴 하였으나 그간 세운 공이 적지 않으니 그것을 참작하시어 처벌에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그게 무슨 소린가? 처벌이라니? 내가 이 원수를 왜 처벌한단 말인가? 황명을 고쳐 달라 했다라 말했으니······. 설마 군선 판매를 늦춰달라는 청을 했다고 내가 이 원수를 처벌 할 것이라 생각한단 말인가?”
황당해 하는 광해를 반응에 이원익도 당황해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니옵니까?”
“짐을 천고의 충신에게 죄를 주는 망군으로 만들 셈인가?”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 원수를 불러들인 것 때문인가?”
“너무 갑작스러운 명을, 그것도 그가 청을 넣은 이후에 내리신 터라······.”
“그의 전신을 받고 불현듯 너무 오랜 시간 외지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네.”
광해가 그 생각을 하게 된 연유는 전신에 그간 이순신이 써오던 ‘소신’이 아니라 ‘노신’이라 자신을 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이순신의 나이가 올해로 예순 일곱이었다. 원정에 나서있기엔 너무 고령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조선 최초의 유럽 원정이라는 임무의 특성 때문에 가장 믿을 만한 장수를 보낸 것이었지만 이젠 불러들일 때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그런 것을 외부로 밝히기가 어려웠다. 온갖 고생을 다한 노장에게 너무 늙어서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신호를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굳이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않고 이순신에게 귀환명령을 내렸던 것인데 아무래도 뜻이 잘못 전달 된 듯 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혹시 이순신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귀환하는데 걸리는 2달가량을 그런 마음고생 속에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
광해는 그 자리에서 신임 도승지인 허균을 불러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폐지했던 훈작을 다시 부활시켜 이순신에게 하사했다.
그에게 하사된 훈작은 외란에서 공을 세웠다하여 성무공신(宣武功臣) 1급이었고, 그 공을 치하해 ‘충무공’이란 존칭을 내렸다.
살아서 ‘공’이란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정식 훈작 수여는 이순신이 귀국하면 이루어질 예정이었지만 광해는 전신을 통해 조선의 강토 모든 곳에 그 소식이 전해지도록 했다.
보급을 위해 다카르나 광무항에 들렸을 때 이순신의 귀에 그 소식이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광해의 명을 받은 도승지 허균이 바삐 물러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는 총리대신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가득했다. 그는 자칫 외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단지 태왕의 의중과 다른 청원을 했다고 내쳐서 군심의 이반을 불러오는 것이 아닌지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걱정이 마무리 되자 물러가려는 총리대신에게 광해가 물었다.
“참! 제국 최고회의 준비는 잘 되어가는 것인가?”
광해의 물음에 물러가려던 이원익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 명으로 출발할 준비를 여러 곳에서 계획대로 진행하고 있나이다.”
그랬다. 올해는 포르투갈 전쟁 등 외국에서의 전쟁이 계속 됨으로 인해 미루어져 왔던 제국 최고회의가 예정대로 명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조선의 태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광해를 비롯해 각 제후국의 군왕들이 모두 참여하는 제국 최고회의였다.
그것을 위해 명은 준비로 분주했고, 각국의 군왕들은 회의의 참석을 위해 출발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내금위도 이미 명과 태왕의 경호문제로 교섭을 시작한 상태였다.
“출발이 언제였지?”
“5월 초 개최 예정이기 때문에 4월 20일에 궁을 출발하시는 것으로 계획 되어 있나이다.”
아직 2달이나 남아 있었지만 이미 군은 움직이고 있었다. 벌써 절강성 앞바다에는 조선의 함대가 배치되고, 명의 왕궁이 있는 남창과 가까운 강소도엔 비상이 걸렸다.
하긴 강소도만이 아니라 서부 3도를 관할하는 3전단 전체에 2급 전투대기 태세가 발령되었다. 광해가 궁을 출발하면 그것은 1급 전투대기 태세로 전환될 예정이었다.
거기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기동전단 소속 2개 병단이 강소도로 긴급 전개되고 있었다. 유사시 남창으로 진격해서 태왕의 안전을 확보하게 될 전력이었다.
준비상황을 확인한 광해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원익이 침전을 물러나왔다. 그렇게 물러나온 침전을 돌아보는 이원익의 얼굴엔 안도의 표정이 가득했다.
아직 태왕의 판단력이 흐트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궁에서 물러나오던 이원익이 황자가 머무는 전각을 지나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대한제국 출범이후 황후 책봉을 받은 서안 공주는 더 이상의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황실에서 후계구도의 분란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신하들은 걱정이 많았다. 적통 황자가 한명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여전히 후궁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지 않았지만 광해는 요지부동이었다.
태왕의 행보가 그래서인지 요즘 조선에선 첩실을 들이는 일을 금기시 했다. 태왕이 후궁을 들이지 않는데 신하들이 첩을 여럿 거느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전통적인 의식 때문이었다.
거기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광해가 처첩을 여럿 거느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기에 그런 기조는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그로인해 뜻하지 않게 조선 여인들 사이에서 광해의 인기가 좋았지만 신하들의 걱정은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