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와의 거래
애덤스 백작과 마주앉은 이항복은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애덤스 백작이 자신들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부 갈등에서부터 동인도회사를 통해서라도 조선의 함선들을 확보하고 싶은 실질적인 이유까지 모두를 솔직하게 내보였기 때문이다.
그간 보여 온 잉글랜드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잉글랜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조차 격식을 중요시 했고, 내부의 이야기는 함구하여 공개하는 것을 꺼려왔었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의 원인을 이항복이 물었다.
“이전과 다르게 행동하고 계시다는 건 아십니까?”
“조선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격식보다는 솔직한 것이 낫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고나 할까요? 지금처럼 도움과 이해가 절실할 때는 더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애덤스 백작의 답에 이항복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선택은 잘 하신 듯합니다. 맞습니다. 저희 조선은 솔직한 것을 더 선호하지요. 아무리 외교라 해도 감추고 속이는 것을 태왕 폐하께오서 극히 싫어하시는 터라······.”
“하면 이대로 상신하면 좋은 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결과는 태왕 폐하께오서 내시는 것이니 소관이 무어라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만 애덤스 백작의 진심에 대해서는 충분히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선식으로 고개까지 숙여 보이는 노 백작의 모습에 이항복은 다시금 빙긋이 미소 지어 보였다.
총독부 산하 영빈관으로 애덤스 백작을 보낸 이항복이 전신소를 통해 해당 내용을 가감 없이 전하면서 긍정적인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보냈다.
그 전신을 받은 광해가 피식 웃었다.
역사적으로 지금의 영국 국왕인 제임스 1세는 귀족들에게 큰 지지를 받지 못한 왕이다. 오죽하면 그 아들인 찰스 1세는 내환에 시달리다가 신하들에게 목이 잘린다.
현대시대에 역사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올리버 크롬웰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국 전체에서 신하들의 입김이 강해지는 시기라는 뜻이다. 그러니 그레이트브리튼에 목을 매는 제임스 1세의 반발은 그냥 묵살해도 좋았다.
물론 일부 대신들 중에서는 이일을 기화로 잉글랜드를 침공해서 복속시키자는 말들이 나왔지만 광해는 고개를 저었다.
유럽의 교두보는 포르투갈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영토가 넓어봐야 머지않은 미래에 시작될 시민운동에 휘말려 고생하게 될 것이 눈에 뻔했으니까.
그러니 조선이 제어가 가능한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신형 증기철선의 생산이 본격화되면서 어차피 퇴역시켜야할 범선들이었다. 과거처럼 분해해서 새 전선의 재료로 쓸 수도 없는 이상 폐기처분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파는 것이 이익이었다.
그렇게 팔기로 결정이 난 이상, 다른 나라들 보다는 그래도 잉글랜드가 낫다고 광해는 생각했다.
그가 막연히 잉글랜드가 그나마 유럽의 나라들 중에서는 ‘의리’ 엇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광해의 재가가 떨어졌다.
대신 광해는 이항복에게 최대한 높은 가격을 받아내라는 명을 내려 보냈다. 전신소를 통해 태왕의 명을 전해 받은 이항복은 난데없이 장사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쓰게 웃었다.
이항복의 전갈을 받고 다시금 총독부에서 마주한 애덤스 백작은 혼자가 아니었다. 갈색의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상인 한명을 대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관찰사 대감. 동인도 회사의 윌리엄 로버트라 합니다. 편하게 로버트라 불러주십시오.”
유창한 조선어로 관찰사 ‘대감’이란 호칭에다 조선식으로 성과 이름의 순서까지 바꾸어 자신을 소개한 로버트란 상인을 이항복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하긴 요즘 들어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조선어를 공부하는 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긴 했다.
포르투갈에 문을 연 왕실 상단들이 대부분 조선어 구사가능자를 우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에서 귀국한 포르들이 모두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렬한 조선 예찬론자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긴 시간 수용소에 갇혀있었다고는 해도 큰 해코지를 당한 것도 아니고, 이 시대 다른 나라처럼 위험한 강제노역에 동원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갇혀있다고는 해도 꽤 넓은 수용소 안에서는 자유로운 이동도 가능했고, 텃밭을 일구거나 목공일을 하는 등 간단한 생산 활동도 보장받았었던 까닭에 불만이 별로 없었다.
하긴 노예로 팔아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개중에는 귀국 후 조선어 학원을 차린 이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포로 생활 중에 고등학당까지 수료하여 훈장 자격까지 딴 이였다.
그런 그의 노력을 가상히 여긴 이항복이 그가 신청한 조선어 학원 개업허가를 내주고, 나아가 직접 그가 연 학원을 찾아 격려까지 했다는 이야기는 남포르투갈도에서는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관이 운영하는 철산학당들이 문을 열고 있었지만 그렇게 학원을 찾아 별도의 교육을 받을 정도로 포르투갈에는 조선어 학습열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사람까지 조선어를 이렇게 유창하게 익히고 있다는 것은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항복이오.”
“자자한 대감의 영명은 포르투갈 친구들로부터 귀가 따갑게 듣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를 부탁 드립니다.”
깊게 허리를 숙이는 인사까지 건네는 로버트를 바라보며 이항복이 빙긋이 웃었다.
타국의 사람으로부터 조선의 말과 격식을 보는 것은 왠지 뿌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에 미소 지은 이항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봅시다.”
“감읍합니다. 대감.”
거의 완벽한 조선어 발음에 말투까지. 이항복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백작께서 꽤나 대단한 사람을 동반하셨습니다. 그려.”
이항복의 웃음에 애덤스 백작도 마주 웃었다.
“하하하. 저보다 더 조선을 흠모하는 사람이지요. 오죽하면 이 친구 아들 이름이 조선이겠습니까.”
애덤스 백작의 말에 이항복이 놀란 표정으로 로버트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시선에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첫째 아들 녀석의 이름을 그리 지었습니다. 조선 윌리엄. 조선식으로는 윌리엄 조선입지요. 제 아들 녀석도 훗날 조선으로 가서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몇 살입니까?”
“올해 열한 살입니다.”
“영특한 아드님을 두셨구려. 기회가 닿는다면 한번 데려오세요. 우리 조선이 한번 보십시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이항복의 모습에 로버트는 물론이고 애덤스 백작도 밝은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나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 속에 애덤스 백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 폐하의 답은 온 것입니까?”
“아! 예. 폐하께오서 백작의 청을 가납하라 하셨습니다. 이참에 그냥 잉글랜드를 밀어버리자는 몇몇 대신들의 청을 물리고, 허락하신 것으로 보아. 백작의 솔직함에 대해 기쁘게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은근슬쩍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대해 조선 정부에서 의견 교환이 있었다는 점을 끼어 넣어 긴장을 불어넣은 것이다.
조선의 결정이 쉬운 것이 아니었음을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항복의 말에 잠시 낯빛이 당황으로 물들었던 애덤스 백작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절대로 결코, 양국 간에 무력 충돌이 발생해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 잉글랜드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저와 조선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조선의 편에 설 것입니다. 그러니 총독께서도 저와 조선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애덤스 백작이 계시는 한 저도 조선이 잉글랜드를 먼저 침공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리 우애를 다지다보면 결국엔 지금보다 좋은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럼요. 저도 그런 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이 자리에서 주님께 맹세하겠습니다.”
맹세를 언급할 정도로 애덤스 백작은 조선의 침공 가능성에 커다란 압박을 받은 모양새였다. 그런 그에게 이항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또한 천신께 맹세하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독.”
애덤스 백작의 감사 인사 뒤로 매각 협상이 시작되었다. 주로 협상은 이항복과 로버트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는 조선이 내놓은 50척의 해모수급 전열함 중에서 20척을, 159척의 왕건급 호위함 중에서 30척을 구매하기로 했다.
아울러 그들은 50척의 조선무역선을 추가로 구매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은 잉글랜드가 보유한 상선들보다 더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년에 걸쳐 인수하기로 한 그 배들의 값으로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가 치르기로 한 금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는 그 막대한 금을 칠레 일대에 존재하는 에스파냐 금광의 채굴권을 강제로 빼앗아 충당할 요량이었다.
잉글랜드는 그것을 가감 없이 밝혔다.
“그러니까 에스파냐의 금광을 빼앗겠다는 말씀이시오?”
“예. 대감. 현재 에스파냐는 신세계의 정착지를 도울 만큼의 함대를 보낼 수 없습니다.”
조선 함대와 지난 몇 번의 해전으로 에스파냐의 함대 대부분이 박살났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에스파냐는 함대의 재건보다는 육군의 증강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장 국경을 맞댄 포르투갈에 24만에 달하는 대한제국 병력이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신세계와의 교역량이 크게 줄었다. 격파된 함대에 포함되어 있던 무장상선들의 수가 너무 많았던 까닭이다.
그 탓에 신세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에스파냐의 경제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많은 상단들과 상인들이 다시금 배를 만들고 선원들을 모집하고 있었지만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생각인 듯 했다.
“저항이 격렬할 것인데, 감당할 수 있는 것이오?”
“다수의 용병들과 함대를 모집해 두었습니다. 그들을 투입해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파냐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만.”
“현재 상황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 위협이 될 정도의 함대나 군대를 보내자면 가까운 시기에는 어려울 것이고, 빨라도 올해 말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예. 조선에서 구입한 전열함으로 강화된 우리의 함대가 그렇게 나올 에스파냐의 함대를 신세계 앞바다에서 수장시킬 것입니다.”
로버트란 자의 답에 이항복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현재 총독부가 확보한 에스파냐의 실정이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면 물건의 인도를 서둘러야 하겠구려. 어쩌면 돈을 받기 전에 일부는 먼저 건너가야 할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기대감으로 가득한 로버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항복이 미소를 그렸다.
“폐하께 상신하여 허락을 받아 보겠소. 초도분은 얼마나 생각하시오?”
“10척의 전열함과 10척의 호위함, 그리고 20척의 조선무역선이면 충분할 것이라 판단합니다. 대감.”
“그렇게 진행해 봅시다.”
이항복의 답에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를 대표한 로버트는 물론이고, 애덤스 백작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들과 헤어진 이항복은 해당사항을 다시 조선으로 보냈다.
전신을 통해 도착한 이항복의 보고에는 그 가당치도 않은 거래를 하려는 이유에 대해서 소상히 적고 있었다.
<에스파냐가 차지하고 있는 남미의 금광들을 잉글랜드가 차지하게 두는 것은 우리 조선에게도 득이 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이참에 에스파냐가 다시 일어날 힘을 아예 빼버리는 기회로 삼고자 합니다. 또한······.>
이항복의 뜻을 광해는 수긍했다. 일부 대신들이 차라리 조선군을 보내 조선이 차지하자는 의견을 내었지만 광해는 거부했다.
그것을 위해 지루한 전쟁을 벌여야할 남미에 조선군을 파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항복의 말대로 그곳에서 벌어들인 금의 대부분을 배나 수출품을 팔아 조선으로 가져오면 일은 잉글랜드가 하고, 득은 조선이 보는 일이니 손해 볼 것도 없었다.
그 생각에 동의한 광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바로 초도분 전열함과 호위함, 그리고 조선무역선들의 선별이 진행되었다.
급속도로 일이 진행되어가자 조선 해군에 위기감이 감돌았다. 아직 신형 증기철선들의 배치는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함선들의 매각이 서둘러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