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아일랜드의 사절
조선 해군 운용정책의 변화에 따라 단 1척만으로도 전장을 압도하는 위력함의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광해는 막강한 화력을 보유한 전함의 개발을 명령했던 것이다.
그 명령에 따라 거제 건선단지는 초장대 철선의 기초설계를 반영하여 전함설계를 진행했는데 질적 초우위를 달성하기 위해 장착된 무장이 ‘헉’ 소리가 날 정도였다.
전장 7백 척(약212M), 전폭 1백 척(약30M)에 달하는 선체를 가진 이 전함은 선수와 선미에 공히 일속포 1문과 3연관 일장함포 2문씩을 탑재하고, 양측면에 2연관 삼포 16문, 일속포 24문을 나누어 장착하고 있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밀폐형 현식총좌 40문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근거리 화력까지 강화했다.
5천 마력 증기기관 8개가 4개의 구동축과 연결된 증기터빈을 구동해서 움직여지는 이배의 최고 속도와 순항속도, 순항거리 모두가 탈해급과 동일했다.
이것은 탈해급과 합동 작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아울러 탈해급을 포함한 모든 차기 증기철선들에는 별도의 발전용 증기터빈이 추가로 장착되어 있었다.
장거리 무선통신 및 선내 전구조명을 사용하기 위한 설비의 일환이었다.
또한 탈해급을 포함한 차기 증기철선들은 모두 일부에서 용접 공법이 쓰였다. 전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개발된 아크 용접 기법이 적용 되었는데 아직은 신뢰성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해 중요부는 여전히 리벳공법이 쓰였다.
그렇게 리벳과 용접 공법이 공히 적용되어 설계된 전함은 조선의 건국왕인 태조의 이름을 붙여 태조급이라 명명되었다.
전함이 아무리 강력한 능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 한척, 한척의 건조비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대량 보유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광해는 순양함급 전투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도록 했다.
그에 따라 개발된 신형 순양함은 5천 마력 증기기관 4개로 가동되는 증기터빈 2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2개의 바람날개를 돌려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및 태조급 전함과 같은 최고속도와 순항속도 및 순항거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함대를 구성했을 때 작전거리를 통일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것을 위해 대량의 석탄 적재량을 확보하느라 수병들이 사용하는 선실이 주몽급에 비해 다소 작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차기 순양함의 크기는 주몽급보다 커서 전장은 450척(약136M), 전폭은 60척(약18M)에 달했다.
무장도 주몽급에 비해 늘어서 선수에 2연관 일장함포 2문, 선미에 2연관 일장함포 1문을 주포로 탑재했다.
아울러 2연관 삼포로 구성된 부포 8문과 일속포 12문을 양측면에 나누어 배치해서 기존의 순양함이었던 주몽급에 비해 2배에 이상의 화력 보강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왕들의 이름을 쓰는 순양함급이었던 이 배에 붙은 이름은 유리급이었다.
태조급 전함에 비해 절반 가까이 크기가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이 배도 거함이라는 것에는 다를 것이 없었다.
거기다 무장이 강화되고 여러 가지 신형 장비들이 추가로 장착되면서 건조비가 주몽급 순양함보다 3할 정도 높아졌다.
따라서 조선이 필요로 하는 모든 전투함을 이 함선으로 건조하는 것은 아무리 막대한 재정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로인해 구축함으로 구분되는 중형 증기철선이 추가로 설계되었는데 이 배에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온조급 구축함은 진일보한 설계사상을 도입해서 전장 250척(약76M), 전폭 40척(약12M)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선수에 2연관 일장함포 1문, 선미에 2연관 삼포 1문을 주포로 장비했다.
부족한 화력은 추가로 양측면에 단장형 삼포 2문씩 4문, 일속포 2문씩 4문을 갖춰 주몽급 순양함의 7할에 달하는 화력을 갖출 수 있었다.
또한 5천 마력급 증기기관 2기와 2축 구동축과 연결된 증기터빈 2기를 장비해서 태조급 전함, 유리급 순양함, 그리고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과 함께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동일한 속력, 동일한 항속거리를 갖추었다.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석탄적재 용적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수병들의 선실크기가 유리급보다 더 많이 축소되어 신형 증기철선들 중에서 가장 열악한 수병거주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악평을 받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조선군 내에서의 이야기였고, 다른 나라의 수병들 생활공간을 생각하면 여전히 온조급 구축함의 수병 생활공간이 더 나았다.
이 모든 함선들의 설계안이 광해의 재가를 얻음으로써 8월 중순부터 거제 건선단지는 대대적인 건조에 돌입했다.
광해는 이순신 함대를 대체할 초도 분으로 태조급 전함 1척, 유리급 순양함 4척, 온조급 구축함 8척, 탈해급 초대형수송선 4척을 먼저 건조하도록 명령했다.
향후 조선 함대의 표준이 되는 일칠함대의 기본 골격이 세워진 것이었다.
대형함의 건조가 늘어날 것에 대비해 거제 건선단지의 선거 개장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해당 개장 공사가 마무리되면 곧바로 본격적인 신세계 원정에 쓰일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 30척에 대한 일제건조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렇게 개장공사로 분주한 건선단지에는 두 개의 기밀 구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한곳은 잠수함 개발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현재 잠수함 개발조는 평소엔 수상함처럼 항해하고 작전 시에만 잠수하는 형태의 잠수함을 개발한 상태였다.
평시 항해는 증기기관으로 하고, 잠수했을 경우에는 인력으로 바람날개를 돌려서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외형은 광해가 제시한 초기 유보트의 형태였는데 그로인한 용적의 제한으로 적재되는 석탄량이 적어서 장거리 항해가 불가능 했다.
특히 잠수했을 때 인력구동으로 얻는 속도는 가히 충격적으로 느려서 실제 전투에 참여할 수 있을지 확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더구나 외부공기 흡기용 장치를 물 밖으로 내놓아야 해서 잠수함의 생명인 기밀성을 보장받지도 못했다.
그로인해 잠수함 무용론은 여전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잠수함 개발조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전기를 연구하는 벼락연구소에서 최근 공기 없이 구동이 가능한 전기모터의 개발에 성공한 까닭이었다.
더구나 벼락연구소에선 축전지까지 개발해 냈다. 잘 깨지지 않도록 강화된 이중도기와 외부충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얇은 금속판으로 만들어진 이 축전지는 가장기본적인 납축전지였다.
거기다 전기 생산이후 물을 분해해 산소와 수소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산소보관도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그렇게 분리해낸 산소와 수소를 농축, 그러니까 액화압축 시키는 기술이 한창 개발 중이었다.
잠수함 개발조에서는 이러한 신기술들을 활용해서 잠수함의 성능을 끌어 올리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개량작업이 성공을 거둘 경우 실전 투입이 가능한 잠수함의 개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거제 건선단지의 또 다른 기밀 시설에서는 평평한 갑판을 가진 초대형선박이 개발되고 있었다.
승강기라 부르는 대형 탈것을 만들어 내부 갑판에서 상갑판으로 무엇인가를 이동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 대형선의 정확한 용도에 대해선 배를 만들고 있는 기술자들도 알지 못했다.
단지 광해의 요구에 부합되는 선박을 만들어 나가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사실 광해는 수소의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비행선 개발을 시작하려 했다. 이 당시의 기초적인 원유추출 기술과 정제 기술로는 헬륨가스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소 위험해도 수소를 활용한 비행선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수소 비행선과 연계하여 운용할 항공모함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수소 비행선 개발은 중단되었다. 수소를 주입 중이던 비행선이 도중에 폭발한 까닭이다. 그로인한 사상자도 나와서 광해가 곧바로 개발을 포기했다.
대신 항공모함의 개발은 지속했다. 언젠가는 활용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거기다 약간의 개량을 거치면 상륙모함으로의 변경도 가능하리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조선에서 벌어지던 9월, 통신시험선이 리스본에 도착해서 조선과 전신을 연결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시험에 성공한 통신시험선의 기술자들은 곧바로 싣고 간 장비들을 동원해서 포르투갈 총독부 건물에 전신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높이 50척(15M)의 송수신탑이 건설되고, 1천 마력 증기기관과 연동된 증기터빈을 채용하여 제작된 발전기와 검파기와 증폭기들이 부착된 신형 전신기도 설치되었다.
그것을 통해 조선의 황궁 전신소와 포르투갈 총독부 전신소 간에 첫 전신을 주고받은 것이 10월 12일의 일이었다.
전신 매개체는 모르스 부호처럼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를 신호로 전환한 단락 부호였다.
이로써 조선은 본토의 황궁, 또는 관공서와 수만리 떨어진 해외 식민지가 거의 실시간으로 통신이 가능해졌다.
이 시대로 보면 일대 혁명에 준하는 기술 발전이었다.
포르투갈 총독부에서 조선과 전신을 주고받는 것에 성공한 통신 시험선은 전신 가능자 2명을 남겨 포르투갈 전신소에서 근무할 이들을 교육시키도록 하고는 조선에서부터 따라온 2척의 해모수급 전열함의 호위를 받으며 곧바로 퀘벡으로 진로를 잡아 항진해 나갔다.
퀘벡에서 다시금 통신 시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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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포르투갈에 진주해 있던 대한제국 해병대는 부산포를 떠난 지 2년 7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대한제국 육군도 2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포르투갈로 전개된 이래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던 데다 주둔군이 배치된 이후로는 점령지 안정화 작전 임무에서도 해제된 까닭인지 육군 병사들 중에서 일탈행위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흥미 있는 것은 육군보다 더 오랜 시간 머물고 있는 해병대에선 그러한 문제가 거의 발생하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차이에 대해 심도 있는 조사를 명령했던 이순신은 조선을 출발하기 이전에 실시했던 교육에 차이가 있었다는 결과 보고를 받았다.
장거리 원정임무를 상정한 해병대의 경우, 광해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던 곽재우가 상당한 훈련 시간을 할애해서 거의 세뇌에 준하는 정신교육을 실시했다.
하지만 육군의 경우는 통상적인 조선 육군의 훈련 교리에 의한 정훈교육만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이들에 대한 강화된 정신 교육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아울러 이순신은 병사들이 돌아갈 기약이 없다는 것에 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해결 방안을 마련해 줄 것을 태왕에게 청했다.
이전이었다면 그런 간단한 의견 교환조차 수개월이 걸렸겠지만 전신소를 통한 통신으로 이순신이 태왕의 비답을 받은 것은 3일 만이었다.
그 3일도 광해가 마땅한 해결책을 찾는데 소요된 시간일 뿐, 양측의 통신은 전파가 도달하는 약간의 시간 차이밖에 벌어지지 않았다.
여하간 그렇게 도착한 태왕의 비답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을 전신수들이 사전에 기밀자료로 배포된 비화책을 활용하여 해독을 한 후에야 이순신에게 전달되었다.
아직 장거리 무선전신이 가능한 나라가 조선 밖에 없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중요 사안이나 군사명령에 관해서는 암호로 전달되는 체계를 미리 갖춰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태왕의 비답은 비교적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원정군의 경우 이동시간을 제외하고 해외 근무기간을 5년으로 정한다는 규칙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태왕, 대한제국 해병대와 육군의 입장에선 대한제국 황제인 광해의 선언을 공개하자 리스본이 ‘황제폐하 만세’를 외치는 병사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돌아갈 기한이 정해지고, 정신교육이 강화되자 육군 병사들의 일탈 행위도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원정군의 안정화가 이루어지던 11월, 프랑스에서 새로운 국왕으로부터 임명받은 주(駐) 포르투갈 영사가 새로 리스본으로 부임해 왔다.
포르투갈 총독과 조선의 남포르투갈도 관찰사를 겸임하고 있던 이항복은 그렇게 새로 부임한 프랑스 영사로부터 주(駐)조선 대사도 새로 임명되어 조선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지난 5월 앙리 4세 사후, 현대시대에 삼총사의 무능한 왕으로 더 많이 알려진 루이 13세가 조선식으로는 10살에 불과한 어린나이로 프랑스 국왕에 등극했다.
그런 어린 나이로인해 실제 통치는 피란체의 그 유명한 메디치 가문 출신인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으로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급귀족 출신인 콘시노 콘시니를 앞세운 그녀의 통치는 여러모로 프랑스 내부의 반발에 부딪치고 있었다.
여하간 그런 국내 사정으로 말미암아 프랑스의 해외 원정이나 식민지 개척은 주춤거리게 되었다.
거기다 일평생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전쟁 준비를 갖춰가던 앙리 4세의 정책들도 다소 주춤거려서 에스파냐가 대한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가장 약해졌을 때를 덧없이 흘려보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북쪽의 골칫거리였던 네덜란드마저 대한제국과의 충돌로 경제와 사회가 무너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침으로써 절호의 영토 확장 기회를 상실 했다.
이런 일련의 정책들로 인해 섭정을 맡은 마리 드 메디시스는 프랑스 왕실의 수장 중 하나였던 앙리2세 드 콩데 친왕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다.
하긴 그녀의 통치 방식을 지지하는 프랑스의 고위 귀족들이 드물긴 했지만.
그렇게 혼란스러운 프랑스와 달리 잉글랜드는 적극적인 해외 영토 확장에 나섰다.
특히 포르투갈이 차지하고 있던 인도의 보아 지역을 조선으로부터 추가로 양보 받은 잉글랜드는 실제역사에 비해 훨씬 적은양이긴 했어도 보아 지방에서 나오는 질 좋은 인도산 초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작은 양만으로도 잉글랜드는 기존의 화약 생산량을 두 배로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일랜드에겐 안타깝게도 그렇게 늘어난 화약 생산량을 기반으로 잉글랜드군의 아일랜드 독립탄압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헨리8세의 정복활동 이후, 지리멸렬해 있던 독립 세력들이 다시 활기를 띄었던 것은 잉글랜드와 전쟁을 벌였던 에스파냐가 지원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그것도 병력지원 등 현실적인 지원이 여러 가지 이유로 번번이 실패하면서 무력화 되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 에스파냐가 발을 담그면서 상황이 또다시 변화했다.
당시 대한제국을 돕고 있던 잉글랜드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에스파냐가 다시 아일랜드 독립 세력에 대규모 자금지원을 하면서 꺼져가던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다시금 불이 붙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일랜드 무장독립 투쟁을 벌이던 이들이 보낸 사절이 잉글랜드 해군의 경계망을 뚫고 리스본에 도착했다.
다사다난 했던 광무 8년, 서기로는 1610년이 저물어가던 12월 27일에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