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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201화 (201/325)

제201화. 조선 해군 정책의 변화

네덜란드 전쟁이 끝난 2월 말부터 식민지 교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은 기니비사우와 말라가, 그리고 브라질에 건설된 정착지들을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넘겨주고, 반대로 북미지역에 건설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정착지들을 넘겨받아야 했다.

이미 동방 무역로에 걸쳐있는 포르투갈 식민지의 점령 또는 인수가 끝났다는 통보는 연초에 조선 해병 강습함대로부터 받았다.

따라서 기니비사우와 말라가에 대한 인도 작업은 잉글랜드의 함대가 해당지역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터였다.

하지만 신세계 지역은 달랐다.

아직 브라질에 건설된 포르투갈 정착지에 대한 인수 및 점령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시작하기 위해 포르투갈 총독인 이항복이 포르투갈 원정군 총사령인 이순신에게 부탁을 했다.

이순신은 곧바로 포르투갈 주둔 함대에 배속되어 있던 1백 척의 조선무역선과 이순신 함대를 동원하여 그 임무의 수행에 동원되었다.

대한제국 해병대원들이 탑승한 조선무역선들이 이순신 함대의 호위 하에 처음으로 신세계 동부지역을 향해 항해에 나섰다.

이들이 브라질 해안가에 도착한 것은 3월 하순이었다. 살바도르를 포함해 서류에 기록된 포르투갈 정착지를 순회하며 모조리 인수 점령했다.

대규모 함대와 대량의 병력을 본 때문인지, 아니면 네덜란드에서 벌어졌던 전투의 소식이 이미 브라질까지 전해진 것인지 정착민들의 반발은 크게 나오지 않았다.

항의가 다소 있긴 했지만 해병대원들의 상륙에 곧바로 수그러들었다.

해당 작전이 마무리 된 4월 말 사전계획대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함대가 브라질로 접근했다.

이순신 함대가 그들을 맞아 벨링 조약에 의거하여 브라질 내 포르투갈 정착지를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인도했다.

해당 임무가 끝난 이순신 함대와 대한제국 해병대는 반대로 북미지역에 대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정착지를 인수하기 시작했다.

해당 임무가 끝난 시점은 5월 말이었다.

*****

포르투갈 총독부와 포르투갈 원정군이 네덜란드 전쟁과 벨링 조약에 의거한 해외식민지 교환에 분주하던 시기 조선에선 일대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한 발명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우선 개발에 난항을 겪었던 진공기술이 완성되었다. 공기를 빼내는 펌프와 밀봉기술의 발달로 이룩한 성과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구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확인한 광해가 증기기관을 활용한 발전소의 건설을 명령했다.

이 당시 증기연구소는 광해의 적극적인 조언과 지식 전수에 힙 입어 증기터빈을 개발한 상태였다.

이 장치에 증기터빈이라는 본래의 명칭이 붙은 것은 개발당시 무심코 광해가 증기터빈이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터빈은 영어가 아니라 한글로 된 고유명사로 기록되어 있었다.

성능을 향상시킨 선박 추진 기관의 일환으로 개발을 시작한 증기터빈이지만 처음 상용화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발전기였다.

신의주 외곽에 건설된 발전소는 신형 선박용 증기기관으로 개발된 5천 마력짜리 증기기관과 연결된 증기터빈 3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발생한 전기는 황궁인 영성궁과 주변에 위치한 주요 관공서에 공급되었다.

한밤에 환하게 전구로 밝혀진 황궁과 관공서의 모습에 백성들이 찬탄을 금치 못했다.

광해는 아직 대대적인 전기의 보급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아직도 전류의 전송기술이나 전압 승압 기술 등, 개발하거나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 기술들이 개발되어 완비되기 전까지 황궁과 주변 관공서에만 전구를 켤 수 있을 정도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거리 무선통신에 대한 기술 개발은 지속했다. 진공기술이 확보됨으로써 진공관의 생산이 가능해졌다.

장거리 통신에 필수적인 전파증폭 및 검파가 가능해지는 순간이었다.

현대의 지식이 가미된 탓에 1890년대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사용했던 진공관보다 훨씬 발달한 진공관이 사용된 조선의 무선전신기는 상당한 장거리 통신이 가능해졌다.

접지된 공중도선과 진공관을 활용한 검파기를 사용한 조선의 신형 무선전신기는 최초의 실험에서 1백리(약40Km)의 거리를 건너뛰어 전신이 닿았다.

실험 성공이후, 광해와 통신 연구조의 연구자들은 진공관의 성능을 높이고, 검파장치를 개량한데 이어 대형 안테나를 만들고, 초보적인 주파수 공조장치까지 만들어 부착하는 개량을 거쳤다.

지구의 대기에 전파를 반사하는 전리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광해로써는 전파도달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광해가 집중한 것은 전파의 출력을 증가시키는 방법이었다.

아직 전기공학, 또는 전자공학이라 불릴만한 기술이 전무한 상태에서 아주 기초적인 아마추어 무선 기술만을 가진 광해가 도달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려운 난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면서 만들어진 조선의 무선전신기는 아주기초적인 장치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으로 광해는 5천6백리(약2천2백Km)정도 떨어진 홍콩과 통신을 주고받는 것에도 성공했다.

광해는 곧바로 통신시험선의 건조를 명했다.

석탄운반선의 설계를 기본으로 대형수송선으로 건조 되어있던 함선을 개조하여 만든 이 배에는 1개의 증기터빈이 추가로 설치되었고, 그것에서 만들어진 전기를 활용해 전신장치를 구동하게 제작되었다.

통신 시험선이라 명명된 그 배가 장거리 통신을 시험하기 위해 다수의 통신연구조 기술자들과 함께 부산포를 떠난 것이 바로 북미지역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정착지를 인수한 직후인 5월 말이었다.

그 시기 거제 건선단지에서 초대형 수송선의 설계가 완성되어 태왕에게 제작 승인을 요청했다.

사실 거제 건선단지는 석탄운반선의 설계를 활용한 대형 수송선의 설계를 확정하여 광해의 승인 하에 20척의 초도 물량을 건조했거나 건조 중이었다.

통신 시험선으로 개조된 배도 그런 대형 수송선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대량의 화물수송선이 필요하다는 확대 문무백관회의의 결정에 따라 거제 건선단지는 시험선에 머물고 있던 초장대(超長大) 철선을 현실화하기로 결정하고 설계를 진행했다.

초장대 철선이란, 수년간 거제 건선단지가 실험해오던 것으로 길이만 7백 척(약210M)에 달하는 초대형 선박이었다.

사실 배의 길이가 길어진다는 것은 선박을 제조하는 철판의 강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앞뒤물결의 방향, 강도, 높이 등이 달라지는 상황에서도 배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선체의 강도만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드럽게 충격을 완화하면서 움직여주는 유연성이 더 필요했다. 그렇다고 무른쇠만 쓸 수 없는 것이 그랬다가는 각기 다른 물결의 힘에 뒤틀려 배가 부서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 난제들을 해결해가면서 만들어진 초장대 철선이 바다에서 실제 운항 시험에 나선 것은 채 2년이 되지 않았다.

그 만큼 축적된 기술이 부족함을 뜻했다.

그럼에도 초장대 철선의 건조를 선택하게 되었던 것은 연초에 열렸던 확대 문무백관회의가 요구한 수송능력 때문이었다.

이당시 확대 문무백관회의가 요구한 수송능력은 1만 톤 이상의 화물적재량 또는 완전무장한 1천명의 병력을 유럽까지 운송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수송선이었다.

이 요구에 호응해 거제 건선단지가 제안한 초대형 수송선의 수송능력은 두 가지 종류였다.

첫 번째는 화물 2만 톤, 또는 완전무장병력 2천명을 싣고 5천 해리(약9천2백Km)를 무보급으로 운항할 수 있는 선체.

두 번째는 화물 1만 톤, 또는 완전무장병력 1천명을 싣고 2만 해리(약3만7천km)를 무보급으로 운항할 수 있는 선체.

사실 말이 두 가지 종류이지 6백 척(약181M)에 달하는 전장을 비롯한 크기와 추진체 등 외형과 구동장치의 능력은 동일했다.

단지 석탄보관량과 식량창고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의 차이 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광해가 석탄보관창고와 식량창고의 크기를 선택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지시했다.

한마디로 투입되는 운송거리에 따라 적재화물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뜻이었다.

방법도 제시했다. 화물창고의 격실화를 제시한 것이다. 각각의 화물 창고를 몇 개의 구획으로 만들어서 필요에 따라 용도를 변경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의미였다.

광해의 지시에 따라 거제 건선단지가 설계변형에 들어갔다.

그 사이 장원에서 신형 함포의 개발 소식이 들려왔다. 새로 개발된 포는 구경을 줄이는 대신 발사속도를 높이는 형태로 개발되었다.

장원은 이 신형포를 현식총의 원리를 차용해 개발했는데 포신은 두개였지만 구동은 각각의 포신이 개별로 움직였다. 발사는 양쪽에 달린 회전식 운동방향 전환기(크랭크)를 돌려 공이가 탄의 뇌관을 때려서 하게 만들었다.

그로인해 포탄도 현식총과 마찬가지로 뇌관형 포탄을 썼다.

일형 속사포라 하여 일속포라 이름 붙여진 이 신형포의 구경은 1치(약30mm)로, 5척(1.5M)의 포신을 가졌으며 최대사거리는 3천보(약5.4Km), 유효사거리는 2천5백보(약4.5Km)에 달했다.

한개 총신의 분당 발사속도는 10발 정도로 2개의 총신으로 구성된 일속포의 분당 발사속도는 20발에 달했다.

포탄은 상부에 6발들이 개방형 탄창이 있어서 지속적으로 탄창에 포탄을 채울 경우 이론상 무한 발사가 가능했다.

함포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수랭식을 채택한 이 포는 사실상 냉각수만 제대로 공급되면 사격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다른 함포들과 마찬가지로 밀폐식 회전형 포탑을 채용했음에도 크기가 부포로 사용되는 삼포에 비해 절반도 안 되기 때문에 다수가 장착될 수 있어서 증기철선의 부족한 근접전 화력을 메우는 용도로 개발되었다.

이 일속포용 포탄을 개발한 이래 일장함포의 작렬탄도 뇌관을 사용한 금속탄피 일체형 포탄으로 개량되었다. 이것으로 조선 해군이 사용하는 모든 포탄이 뇌관을 사용하는 금속탄피 일체형 포탄으로 교체되었다.

심지를 심고 불을 댕겨 발포되는 함포가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아울러 상갑판에 마련된 개방형 현식총 총좌가 실전에서 피탄 위험이 높다는 보고에 따라 밀폐형 총좌(銃座)로 개량되었다.

함상용으로 개량된 이 현식총 총좌는 적포탄의 직격으로부터의 방호가 아니라 갑판에서 터진 폭발탄의 파편으로부터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 개발된 것으로 장갑판이 다른 포탑들에 비해 얇았다.

이것은 포탑의 선회를 수동식으로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바닥을 딛고 선 사수가 어깨에 걸쳐진 포탑축을 짊어지고 좌우로 돌리는 것으로 포탑의 선회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무거운 무게를 지탱하면서도 선회가 부드럽게 되도록 돕는 구슬회전자(베어링)가 개발되었다.

따라서 포수는 포탑의 무게를 지탱할 필요 없이 포탑을 선회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신형 무기체계들의 개발이 끝난 8월, 설계변경 된 초대형 수송선의 설계안이 제출되었다.

탈해급으로 명명된 이 초대형 수송선의 설계안은 기존 설계보다 크기를 키운 전장 7백척(약212M), 전폭 1백20척(약36M)에 달했다.

이 탈해급 초대형 수송선은 5천 마력 증기기관 8개와 연결된 4축의 증기터빈으로 구동되어 최고속도 25노트, 순항속도 15노트로 완전무장한 병력 2천명 또는 2만 톤의 화물을 싣고 순항속도로 운항할 경우 5천 해리(약9천2백Km)를 항해할 수 있었다.

아울러 거제 건선단지는 3가지 전투함용 차기 증기철선들의 설계안도 함께 제출했다. 이중에는 광해의 특별지시로 개발이 진행된 전함의 설계가 포함되어 있었다.

증기철선의 경우 척당 건조비는 물론이고, 운용비도 범선의 수배에 이르렀다.

따라서 광해는 이전처럼 막대한 양의 함선을 증기철선으로 운용할 경우 불어나게 되는 막대한 군비를 조선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로인해 광해는 조선 해군의 운용 정책을 수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존의 조선 해군 운용 정책은 상대에 대한 질적 및 수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광해는 수적우위를 포기하고, 대신 질적 초우위를 지키는 것으로 정책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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