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네덜란드 사절단
벨링 조약으로 북미 지역에 대한 권리를 취득한 조선의 입장에서 신세계라 불리는 아메리카 대륙에 접근하는 방향은 서부다.
서부는 산악지와 사막지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어 평야 위주인 동부에 비해 접근은 물론이고, 개발도 쉽지 않았다.
따라서 서부에서 접근했다 해도 동부로 향하는 길을 내서 동부부터 개발을 시작해야 하는 난점을 안고 있었다.
또 하나, 방어적 입장에서 적어도 멕시코까지는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중남미로 내려가면 모두가 에스파냐 점령지라는 점이었다.
이당시만 해도 현대시대 멕시코 지역과 미국 남부 일부 지역이 에스파냐 점령지였다.
이 부분은 사실 광해가 간과한 지점이었다.
애초에 에스파냐와의 협상에서 북미대륙에 대한 권리를 양도 받았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하긴 포르투갈의 해외식민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지 못했었으니 그때의 부족함이란······.
그렇다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점령지를 인수하고 점령지역을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포르투갈에 전개된 병력을 아메리카로 전개해야 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이 생겼다.
그들을 조선으로 데려왔다가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로 상륙시키는 것보다는 포르투갈에서 직접 아메리카 대륙의 동부로 상륙시키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 떨어진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포르투갈과 아메리카 대륙을 왕복할 대규모 수송단과 호위 함대,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동부 해안을 지킬 별도의 전투 함대가 필요함을 뜻했다.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한 대서양 일대는 해적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서양과 북미대륙을 담당할 군사집단을 조성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우선 조선은 조선 무역선단들을 전부 조선과 포르투갈 간의 수송세력으로 활용하면서 거의 1년 간 마비되어 있는 유럽과의 교역을 더 이상 중단해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11, 12, 13 수송함대만으로 조선과 포르투갈 간, 또 아메리카 동부 해안으로 이어질 수송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광해는 거제 건선단지와 원수부를 비롯한 육군 및 해군, 그리고 해병 총사부 관계자들을 불러 종합 대책 수립에 나섰다.
신세계 개발 준비회의라 명명된 이 회의에는 재무부, 해토부는 물론이고, 외교부, 병무부, 국토부 그리고 무기 개발과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장원의 관리들도 참석했다.
아울러 제국의회 사무국의 관리들도 불려왔는데 이것은 향후 신세계 개발이 대한제국 관점에서 이루어질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자리에 왕립조선 종합병원 관계자들이 참여했다는 점이었다.
사실 신세계항이 건설 된 이후 그곳을 거점으로 국토부 산하 지리원이 중심이 된 북미 지역에 대한 탐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왕립조선 종합병원 관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풍토병에 대한 대책들을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다양한 이들이 참석한 회의에서는 수많은 사항들이 검토되고 토의 되었다.
그 결과 거제 건선단지에서는 대량보급형 증기 전투함과 초대형 증기 수송함의 건조 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
아울러 제국의회에서는 북미 대륙을 분할하는 방안을 토의해서 확정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각 제후국이 부담할 병력과 재정 투입을 분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정에는 광해가 현대시대 멕시코가 되는 지역까지 포함시키도록 했다.
태왕의 그 명령엔 신대륙에서 에스파냐 세력과의 전쟁을 상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관리들은 그에 대한 준비도 새로 갖추기로 했다.
포르투갈 안정화에 2년을 상정한 준비회의는 신세계 개척이 본격화되는 시점을 3년 후로 잡았다. 그 전까지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넘겨받기로 한 개척도시들을 접수해서 사전 준비를 갖추기로 했다.
그것을 위해 우선 포르투갈에 대서양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최소 1개의 전투함대와 2개의 수송함대, 그리고 2개의 해병여단과 2개의 육군 병단을 사전 배치하는 안이 수립되어 태왕에게 보고되었다.
광해는 그 안을 재가하면서 대한제국군을 적극 활용하도록 지시했다. 별도로 조선군을 투입하지 말고 대한제국군을 활용하라는 뜻이었다.
이것에는 광해가 서부개척에 조선군을 투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병무부는 명과 남진, 그리고 나고야와 동일본에 추가 함대설립을 위한 왕무급 호위함의 추가 수출을 재가해 달라는 청을 올려왔다.
광해가 그 청을 허락했다.
이것을 기반으로 병무청은 명과 남진, 나고야, 동일본, 이 4개 제후국에 각기 20척 정도의 왕무급 호위함 수출이 가능함을 통보했다.
해군세력의 확충에 목이 말라있던 4개국이 쌍수를 들어 환영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병무청은 그 계약을 서둘러 진행하면서 반대급부로 각국에 남겨져 있던 기존의 왕무급 호위함 8척 중 6척씩을 대서양군 함대에 차출하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당장 눈앞에 20척의 새로운 왕무급 호위함을 두고 있던 4개 제후국은 그 조건을 수락했다.
그곳에 조선은 6척의 해모수급 전열함을 더해 대서양함대를 만들어내었다. 이 대서양 함대에는 포르투갈 주둔군을 태우고 이미 전개된 조선 무역선 1백 척을 편입시키기로 했다.
그로인해 근거리 교역선에서 비게 되는 수효는 철도 교통량을 늘여서 감당하기로 했다. 또한 대서양함대는 사전에 포르투갈 주둔함대로 파견된 연합전대까지 통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은 함대가 구성된 11월 말, 차가운 겨울바람을 헤치며 포르투갈을 향해 출발했다. 이 함대의 구성원들과 함선들도 왕복 기간을 포함해 3년간의 대서양 근무를 명받고 있었다.
그들이 출발한 시점에 주몽급 순양함 한척이 포르투갈에서 돌아왔다. 그 배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사절이 탑승해 있었다.
증기철선에 대한 외부 인사의 탑승 금지 지시를 어긴 행위였지만 광해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사신단 일행은 탑승해 있던 해군 육전대원들에 의해 철저하게 선실과 갑판에만 머물게 했다는 보고가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양국의 사신들은 태왕을 예방하고, 조선과 대한제국 양측과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을 청했다.
광해가 그 요청을 기쁜 마음으로 수락했다.
그 직후, 사절단에 포함되어있던 대사들이 업무를 즉시 개시하길 원했다. 그들에게는 광해가 위화도에 조성된 국제거리에서 사전 건설되어 있던 두개의 대사관 건물을 무상 할양해주었다.
무상인 이상 해당 국가가 조선, 또는 대한제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되어 퇴거하면 조선에 반납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신 그들이 머무는 동안은 해당 대사관은 각국의 영토와 동일한 취급을 약속받았다.
그런 조처에 양국의 사신들이 감사의 인사를 태왕에게 전했다. 또한 양국은 동일한 조건으로 런던과 파리에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사가 머물 대사관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광해가 그런 사신단의 귀환 길에 조선과 대한제국의 겸임대사를 임명하여 함께 보냈다. 그들 속에는 대사관 직원들은 물론이고, 경비대로 각기 해병 1개 대씩이 딸려있었다.
벨링 조약서를 가지고 사전에 도착해 있던 주몽급 순양함과 함께 그들을 태운 2척의 주몽급 순양함이 다시 포르투갈을 향해 출발했다.
국제거리에 들어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대사관이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제후국들이 아닌 외국의 대사관이 처음 개설된 것이었다.
가장 먼저 외교관계가 수립된 에스파냐가 여전히 대사관 설치를 미루고 있는 탓에 제후국들을 제외하면 가장 먼저 조선 및 대한제국에 대사관을 설치하여 운영한 나라가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된 것이었다.
그들은 부산포를 비롯한 대한 제국 각지의 항구에 건설된 자국의 상관들과 연계해 무역업무 지원부터 시작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대한제국과 연계한 무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계기였다.
대사관 업무가 시작된 지 얼마 후, 양국의 대사와 그 직원들에게 조선의 문물을 견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은 몇 곳의 사업장과 철산 제철단지, 그리고 왕립조선 종합병원을 둘러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태왕의 지시로 인해 두 사람을 학당들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두 나라의 대사와 그 직원들은 발전된 조선 산업시설과 의료체계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특히 신의주에서 철산 제철단지를 방문하기 위해 기차를 탔을 때의 충격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수십 명의 인원이 백여 대가 넘는 방직기를 관리하면서 대량의 원사와 옷감을 만들어 내는 방직소를 방문했을 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노동력의 감소는 물론이고, 그 대량의 생산량은 감히 현재 유럽의 생산력으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증기 기관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직감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식식거리며 돌아가는 증기기관은 소문처럼 악마의 힘을 내는 장치가 아니었다. 검은 돌을 태워 물을 끓이고 그 힘으로 움직이는 기계장치였던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한 조선이 기술력에 두 나라의 대사와 직원들은 찬탄을 금치 못했다.
더구나 왕립조선 종합병원에서 시행되는 수술들과 그 치료 장면을 목격하고는 난리가 났다.
여전히 유럽에서는 죽음의 병으로 취급되는 홍역을 예방할 수 있으며, 수술로 인한 염증을 효과적으로 낫게 하는 것은 물론, 매독을 치료할 수 있는 멸농이란 항생제의 존재는 충격 이상의 것이었으니까.
거기다 소학당과 중학당, 고등학당과 대학당까지 견학한 후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교육수준이 이미 자국의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고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까닭이었다.
실제로 두 대사는 물론이고 실무관리들 조차 조선의 고등학당에서 가르치고 있는 수학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양국의 대사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단순히 군사력만 강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들의 나라가 조선처럼 발전되기 위해서는 보고 배우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한 두 대사는 견학이 끝난 직후, 태왕을 알현하여 양국의 인적교류를 넓혀줄 것을 청원하였다.
광해가 그 청원을 허락했다. 그것을 지원하기 위해 고등학당 수준의 외국유학생 전담 학당을 추가로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향후 세계적인 교육기관으로 성장하는 신의주 고등학당의 출발이었다. 그런 광해의 조처에 양국 대사가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분주한 가운데 광무 7년이 저물어 갔다.
광무 8년, 서기 1610년이 밝았다. 조선에서는 신세계 접수를 위한 준비로 정신없이 바쁠 때 포르투갈은 초대 포르투갈 총독을 맞았다.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재회한 이항복을 이순신이 기쁜 마음으로 맞았다.
이항복은 그의 노고에 대한 광해의 절절한 고마움을 이순신에게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이순신이 군모와 칼을 벗어두고 조선이 있을 동쪽을 향해 구배를 하여 감사의 인사를 대신했다.
이항복은 이순신과 상의한 후, 상륙한 포르투갈 주둔군은 물론이고, 관료들까지 모두 현지교육을 실시했다.
이전에 육군에게 실시했던 것보다 길고 많은 양을 교육하기 위해 2주일간 실시되었다. 그 교육엔 이항복이 직접 참가하였기에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그 교육을 마친 주둔군과 관리들이 각지로 부임하기 시작했다.
점령지 안정화 작전을 펼치고 있던 대한제국 육군 병력은 주둔군에 해당 임무를 인계하고 단계적으로 리스본으로 철수했다.
예비 병력으로 리스본에 대기 중이던 대한제국 해병대 14개 여단과 합쳐 물경 19만에 달하는 대한제국 병력이 리스본에 바글거리게 된 것이다.
나머지 해병대 10개 여단은 여전히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국경에 경비 병력으로 투입되어 있었다.
너무 과도한 여분의 병력이 리스본에 모여 있게 됨으로써 사소한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지만 그들에 대한 회군 명령은 아직 본국에서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네덜란드의 사절단이 리스본을 방문했다.
그들은 포르투갈 총독인 이항복을 만나 조선이 불법적으로 장악한 자국의 영토를 돌려달라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