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초대 포르투갈 총독
태왕의 비답을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잉글랜드로 전갈을 보내 애덤스 백작을 청했다.
소식을 받은 애덤스 백작은 지체 없이 리스본으로 달려왔다.
그런 애덤스 백작과 마주 앉은 이순신은 태왕이 보내온 비답을 기반으로 협상을 시작했다.
우선 잉글랜드가 원했던 카보베르데 대신 기니비시우를 제시했다. 태왕은 섬들로 구성된 카보베르데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가 유리하다는 점에 입각해 이 지역을 조선, 나아가 대한제국의 보급거점으로 삼길 원했던 것이다.
대신 말라가는 잉글랜드의 요청대로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췄다.
말레이 항로의 길목에 위치한 말라가가 중요했던 것은 골목처럼 형성된 이 지점을 틀어막으면 상당히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을 향한 대규모 수송 작전 당시에도 말라가에 대한 제압 작전이 요구되었었다. 당시 말라가가 포르투갈에 반환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과 포르투갈의 조약에 의해 강제 병합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것을 조선은 대규모 함대를 통한 위력시위로 오히려 말라가 항구를 봉쇄함으로써 간단히 해결했다. 막강한 해군세력을 가진 조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경험상 말라가가 잉글랜드의 영토가 되더라도 조선이 잉글랜드를 넘어서는 해군력을 가진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더구나 말라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주변국들과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군사적 부담도 고려되었다.
물론 조선과 대한제국 군선 및 상선들이 말라가를 자유롭게 출입할 권리는 잉글랜드에 요구되었다.
반대로 잉글랜드의 대한제국 영토에 대한 자유로운 기항 자격에 대해서는 상선에 국한한다는 답을 주었다.
시대의 상황 상 무장상선까지는 인정되나 군함의 입항은 금지되었다. 다만 부득이한 경우, 사전에 조선과 합의되었을 경우에 한하여 군함의 입항을 허가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이 달려있었다.
그런 조건들에서 애덤스 백작은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였던 지역들을 모두 대한제국의 종주국인 조선이 차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덤스 백작은 조선이 제시한 조건을 그 자리에서 흔쾌히 수용하였다.
조선이 역제의 한 대부분의 조건들이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를 달고 있었던 데다 말라가를 넘겨준다는 것만으로 잉글랜드의 희망은 달성된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애덤스 백작을 포함한 잉글랜드 의회는 말라가를 얻는 것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유럽에서 말라가의 중요성을 모르는 나라는 아무 곳도 없었으니까. 따라서 절대로 대한제국이 말라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말라가를 덜컥 내어준다니 다른 것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애덤스 백작에게 이순신은 한 가지 제안을 더 건넸다.
바로 해외 식민지 교환이었다.
브라질의 절반을 줄 테니 북미지역에 대한 잉글랜드의 권리를 포기하고 사전에 개척한 지역을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같은 조건의 교환을 프랑스와 중개해 달라는 요청도 했다.
이순신은 이 모든 조건이 한가지로 움직여진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러니까 브라질의 절반과 북미지역의 잉글랜드 개척지와 권리를 교환하는 것을 거부하면 말라가와 기니비시우도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애덤스 백작은 다른 건 몰라도 식민지 교환의 경우엔 홀로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라 본국에서 결정을 내려서 다시 오겠다면서 돌아갔다.
브라질은 에스파냐가 차지한 다른 남미의 지역과 달리 이 당시 기술로는 채굴할 수 있는 지하자원이 미미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노예들을 동원하여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대규모 농장인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소위 ‘하얀 황금’이라 부르는 설탕 교역으로 상당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북해도를 거점으로 사탕무 재배로 시작한 조선의 설탕 사업의 경쟁자라고나 할까?
그로인해 포르투갈의 해외식민지인 브라질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광해가 잠시 설탕 산업의 독점을 생각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탕수수 농장이 브라질을 넘어 다른 곳에서도 계속해서 생길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던 광해가 브라질을 포기하는 대신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북미의 권리를 확보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애덤스 백작이 귀환한 잉글랜드는 비교적 짧은 논의 끝에 조선의 제의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큰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던 북미보다는 하얀 황금이 나오는 브라질이 더 이익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정이 떨어진 8월 말, 애덤스 백작은 곧바로 리스본으로 가는 대신 프랑스로 향했다.
조선이 프랑스와의 중계를 요청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애덤스 백작이 프랑스로 향하던 시기 450척의 조선무역선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송세력이 71, 72 기동함대의 호위 하에 리스본에 도착했다.
70만 톤에 달하는 보급물자와 20만 톤에 달하는 석탄이 리스본 항구에 하역되었다. 그 방대한 물자들 중 대부분은 이순신이 사전에 건설해 놓은 리스본 전략물자 창고에 보관될 물량이었다.
해당 물자들을 내려놓은 대규모 수송세력은 식수 등 필수 보급품만을 채운 후 곧바로 조선으로 귀환하기 위해 리스본을 출발했다.
그 때 애덤스 백작은 프랑스의 파리에서 프랑스 왕실의 유력자와 회담을 갖기 직전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국왕인 앙리 4세는 에스파냐의 왕가인 합스부르크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실제로 십 여 년 전쯤엔 전쟁도 치렀던 사이니 좋을 수 없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에 속하는 에스파냐와 새롭게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프랑스의 격돌은 예정된 수순일 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최근엔 프랑스가 에스파냐와 다시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렇다고 애덤스 백작이 앙리 4세를 직접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재상인 쉴리 공작이었다.
상당히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쉴리 공작이 프랑스와 전통적인 앙숙 관계인 잉글랜드의 귀족을 만났던 것은 그가 포르투갈을 점령한 조선과 강하게 연계 되어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에스파냐와 조만간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는 프랑스의 입장에서 에스파냐를 꺾고 포르투갈을 손에 넣은 조선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이의 방문을 거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쉴리 공작은 조선의 제의를 듣고는 꽤나 놀랐다.
북미, 실제 역사에서 캐나다 일부 지역에 간신히 발을 디딘 프랑스의 입장에선 하얀 황금을 생산하는 브라질은 훨씬 큰 이익을 줄 땅이었기 때문이다.
애덤스 백작을 기다리게 만든 쉴리 공작은 앙리 4세에게 보고하고 조선의 요청에 대한 허락을 얻어 심복인 다니엘 백작을 애덤스 백작과 함께 포르투갈로 보냈다.
그로 인해 조선의 대표자격인 이순신과 잉글랜드의 전권대사인 애덤스 백작, 그리고 프랑스의 국왕 대리대사인 다니엘 백작이 모여 신세계 식민지 교환 조약을 맺었다.
9월 중순 리스본의 해안가 요새인 벨링탑에서 맺어진 조약이라 하여 벨링탑 조약, 또는 벨링 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으로 조선은 포르투갈이 갖고 있던 브라질을 포기하는 대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갖고 있던 북미 대륙의 정착지들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아울러 북미 지역에 전체에 대한 영구한 권리를 인정받고, 양국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는데 성공했다.
이 자리에서 프랑스의 다니엘 백작은 조선, 나아가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길 원했다. 이순신은 본국으로 외교사절을 보낼 경우 호위해 주겠다는 제의를 건네 다니엘 백작을 기쁘게 했다,
아직 이렇다 할 정식 외교관계가 없던 잉글랜드도 외교관계 수립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동맹국인 잉글랜드를 위해서는 증기철선을 내어줄 수도 있다는 뜻을 피력하여 애덤스 백작을 기쁘게 하고 다니엘 백작의 프랑스와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온 유럽에 악마배라고 소문난 증기철선의 속도는 현 시대 그 어떤 범선보다 빨랐다. 그 배를 내어준다는 소리는 프랑스보다 잉글랜드의 대사가 먼저 조선에 도착함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곧바로 외교사절을 준비해 오겠다면서 각자 자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자 이순신은 이순신 함대에 배속되어 있던 주몽급 순양함 한척을 선발해 조약서를 최단시간 안에 조선으로 전달하도록 했다.
그날 오후, 주몽급 순양함 한척이 리스본 항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해당 함선은 석탄보급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속도를 내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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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서 벨링 조약서를 소지한 순양함이 출발하던 시점에 조선에서는 대한제국 내 제후국들의 포르투갈 분할 합의가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의 18개 주 중에서 리스본이 포함된 리스보아 지역 이남의 7개주를 조선이 갖고 나머지 중북부 11개 주를 대한제국의 11개 제후국이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이었다.
포르투갈 총독은 대한제국의 황제가 임명하여 보내고 각 지방 행정관은 각 제후국이 선별하여 보내기로 했다.
지방 행정관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명에 따르되 총독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양측의 명이 상반될 경우 일단은 총독의 지휘를 우선으로 하고 추후 제국의회에서 해당 사항을 논의하여 결정한 것을 따르게 하였다.
포르투갈 주둔군은 조선이 7개 단을 내고, 각 지역을 맡은 제후국에서 1개 단, 그러니까 1천 명씩을 파병하여 구성하기로 했다. 그렇게 구성된 1만8천의 주둔군의 총지휘관은 조선군 장수가 맡도록 했다.
주둔군과 함께 포르투갈을 방어할 함대는 조선과 명, 남진, 나고야, 동일본이 차출한 함대로 구성한 연합전대가 맡기로 했다.
주둔군과 연합전대는 2년마다 교대하기로 했으며 그 수송은 조선군이 맡기로 했다.
포르투갈 각지에서 나오는 이익은 대한제국에 공히 3할을 세금으로 납부하고 나머지 7할은 각 제후국의 재량에 맡겨졌다.
물론 그렇게 거둬갈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개발 및 투자는 각국의 재량에 맡겨졌다.
광무 7년, 서기 1609년 9월. 부산포에서 포르투갈 주둔군 1만8천과 수백 명의 행정 관료들을 태운 조선무역선 1백 척이 부산포를 출발했다.
이 조선 무역선들은 근거리 교역선들 중에서 동원되었다.
이 함대의 호위는 조선 해군에서 차출된 해모수급 전열함 1척과 왕건급 호위함 4척, 그리고 명과 남진, 나고야, 동일본에서 각기 2척씩 보내온 왕무급 호위함 8척으로 이루어진 연합전대가 맡았다.
그들이 출발하기 전 광해는 조선의 몫으로 정해진 7개 주를 묶어 남포르투갈도라 칭하여 조선의 강토로 편입시켰다.
아울러 포르투갈 총독으로 부임하는 이에게 관찰사의 직을 겸하게 했다. 초대 포르투갈 총독에 부임한 이는 좌찬성 겸 도승지였던 이항복이었다.
광해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심복을 보냄으로써 포르투갈 총독의 위상을 정립했다.
2년의 부임기간과 1년 가까운 왕복 이동기간을 상정하면 3년이나 조선을 떠나 있어야 하는 일임에도 일종의 번왕과 같은 위치인 총독에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것에 이항복은 굉장한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떠난 다음 달인 10월 말, 리스본을 떠난 주몽급 순양함이 부산포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구를 떠난 지 43일 만에 도착한 것으로 이 구간에 대한 최단시간 항해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