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신의주 천도(遷都)
광해는 제국의회에 포르투갈 분할과 통치 방법을 논의하라는 명을 내렸다. 광해의 명을 받은 제국의회가 모처럼 분주히 움직였다.
각국의 전권을 위임받아 온 이들이었지만 제국의원들은 결정과정에서 자국의 국왕에게 급보를 보내고 결정을 받는 과정을 거치느라 분할에 대한 결정은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포르투갈에서 이순신의 급보를 가진 왕건급 호위함 2척이 입항했다. 그들이 얼마나 서둘렀는지 자신들보다 일찍 리스본을 출발했던 대규모 수송단과 12수송함대보다 먼저 조선에 도착했다.
급보는 곧바로 광해에게 전해졌다.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에 대한 소식은 광해로써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는 곧바로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한동안 고심한 끝에 비답을 적은 서신을 파발에게 주어 포르투갈로 보냈다.
포르투갈에서 돌아왔던 왕건급 호위함 2척이 다시금 태왕의 서신을 가지고 부산포를 출발했다. 그들이 포르투갈에 도착하자면 적어도 다시 2달 이상은 더 걸릴 터였다.
그들이 출발한 며칠 후, 태왕의 명을 받은 해병강습함대가 포항을 출발했다. 그들은 태왕이 얻은 포르투갈 국왕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들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포항에서 해병강습함대가 출항한 직후, 대규모 수송단과 72기동함대의 호위를 받는 12수송함대가 귀환했다.
아울러 12 수송함대 편으로 도착한 이순신의 전략 창고 건설과 대규모 보급 청원을 적은 장계도 함께 도착했다.
그에 대해 광해가 화답했다.
수송함대들이 귀환한지 보름 후 인 4월 중순, 대량의 보급품을 실은 11, 12, 13보급함대에 대규모 수송단까지 합류한 일찍이 본적 없는 대규모 수송세력이 동원된 작전이었다.
450척의 조선무역선으로 구성된 이 수송세력은 71기동함대와 72기동함대에 의해 호위되며 부산포를 출항했다.
근거리 교역선들로 운용되던 5백 척의 조선무역선들은 모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간 경의선 철도가 완공되면서 신의주까지 화물수송량이 크게 증가하긴 했지만 여전히 물동량 부족으로 고생하던 상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시기, 천도를 위한 신의주에 대한 대규모 토목공사들이 하나둘 완료되었다.
도로는 물론이고, 영성궁(靈性宮)이라 이름 지어진 황궁과 대규모의 상업시설을 포함한 거주 지역까지 완공되었다.
현재의 단동시가 들어서 있는 지역에 대규모 연구, 제작 거점이 마련되어 장원이 이주할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각지는 물론이고, 대한제국 각 제후국을 연결하는 대규모 역마차 집중역과 경의선은 물론이고, 서경선과도 연결되는 철도역도 건설되어 있었다.
단동과 연결된 신도에 대규모 준설을 통해 항구를 건설했다. 신도항이라 이름 붙여진 이 항구는 홀수가 깊은 주몽급 증기철선도 입항 할 수 있도록 건설되어 있었다.
위화도엔 제국정부건물들과 제국의사당, 제후국들의 대사관, 그리고 조선 또는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들의 대사관이 들어설 국제 거리가 완공되었다.
그런 위화도를 황궁이 들어선 신의주 본시와 대규모 연구 제조단지가 들어선 단동을 연결하는 다리 2개도 완공되어 있었다.
신의주 본시와 압록강 건너 진흥을 연결하는 5개의 다리도 완공되었다.
철도가 지나는 철교가 1개, 마차들이 다닐 수 있는 교통교가 3개, 사람들만의 통행이 허가된 도보교가 1개였다.
그렇게 기반 시설까지 모두 완공됨에 따라 5월부터 대대적인 천도가 실시되었다.
*****
조선에서 한창 천도가 진행되고 있을 때, 한글과 포르투갈어로 함께 작성된 포르투갈 국왕의 명령서를 가진 해병강습함대가 마카오로 접근하고 있었다.
해병강습함대에 내려진 임무는 제법 복잡했다.
우선적으로 마카오에 명령서를 전해 마카오가 대한제국, 정확히는 조선의 영토가 되었음을 통보하고, 순응하면 일부 병력을 남겨 점령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럴 경우 원한다면 마카오에 기거하던 포르투갈인들은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허가 되어 있었다.
만약 조선으로의 이첩에 불응할 경우엔 무력을 통해 강제 점령하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되면 마카오에 거주하던 포르투갈인들은 모두 대역죄인으로 삼아 부산포의 포로수용소로 전원 압송할 예정이었다.
조선, 나아가 대한제국의 세력권 안에 속한 지역이었기 때문인지 다행히도 마카오는 포르투갈 국왕의 인장이 선명한 광해의 명령서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마카오에 주둔하고 있던 소수의 포르투갈 병력과 2척의 전함은 현지 징집되어 해병대에 소속되었다. 아마 조선군 내에 파란 눈의 해병이 처음 탄생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현지의 치안을 위해 홍콩 주둔군에 전갈을 보내 일단의 점령군 병력을 전개시킨 해병 강습함대는 곧바로 마카오를 떠나 동티모르로 향했다.
동남아시아 향신료 수출의 거점인 동티모르도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우습지만 동티모르에 도착한 해병강습함대는 포르투갈군이 아니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함대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어느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본국의 지원이 끊긴 동티모르를 집어삼킨 것이다.
6척에 달하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함대를 격파한 해병강습함대는 동티모르에 상륙작전을 전개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병사들을 모조리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 상황에서 해병강습함대의 지휘관은 결단을 내렸다.
본래 해병강습함대에 내려져 있던 명령은 포르투갈의 해외식민지들을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해외 식민지 중 하나인 동티모르를 점령하는 것만이 해병 강습함대의 임무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냥 동티모르만 탈환하고 떠나면 다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침공해 올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해병강습함대는 말레이 일대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점령지 전체를 장악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에는 과거 포라중 주둔군을 공격한 전례도 고려되어 있었다.
해병강습함대는 말레이 일대에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거점으로 활용되던 암본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룬섬을 포함한 반다제도까지 공략하여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20여척이 넘는 크고 작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장상선들이 격침되거나 나포되었다. 또한 3백 명이 넘는 네덜란드 포로가 발생했고, 2백 명이 넘는 포르투갈 포로를 구출했다.
포르투갈 포로들은 자신들을 구한 이들이 포르투갈 국왕의 명을 받은 조선 해병대라는 것에 환호했다. 그것이 조선 해병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던지 현지 징병에 대해 반발은 나오지 않았다.
현지 징발된 포르투갈 출신 해병대원들에게 네덜란드 포로의 감시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을 마카오에서 징발한 2척의 전함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전투에서 노획한 5척의 크고 작은 함선들에 나누어 태운 채 해병강습함대를 따르게 했다.
암본과 반다제도에는 포라중 주둔군에 소식을 전해 포라중 주둔군 중 일부 병력을 전개해 점령군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그것을 확인한 해병 강습함대는 다음 기착지인 말라가로 향했다.
*****
해병강습함대가 말라가를 향해 출발하던 시점에 조선에서는 천도 작업이 한창 진행 중 이었다.
천도를 위해 가장먼저 떠난 것은 각 지방에서 신의주로 이주하겠노라 신청한 이들이었다. 수가 너무 많아서 추첨으로 뽑은 이들의 수는 15만 호로 약 5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의 이주가 마무리된 시점에 황실이 이전했다.
신의주로 들어서는 황실을 먼저 이주한 신의주 백성들이 도로로 몰려나와 환호로 맞았다.
황실이 영성궁으로 이주를 마치자 곧바로 대소신료들과 제국의원, 제국대사들이 이주했다. 신의주에서 다시 조선과 대한제국의 행정, 군사, 외교, 사법의 지휘부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성에서 신의주로 이주하겠노라고 신청했던 백성들의 이주가 실시되었다.
이미 사전에 천도 계획이 발표된 이후, 태왕과 함께 한성을 떠나기로 신청한 이들이었다. 5만호 20만 명에 달하는 대인원의 이동이었다.
그들이 떠난 한성엔 지방에서 이주해오길 원하는 이들을 받아 채웠다.
황도가 떠난 한성이지만 수많은 편의시설이 갖춰진 한성으로 이주하길 원하는 지방 백성들의 수도 적지 않아서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천도가 마무리된 광무 7년, 서기1609년 7월 1일. 광해가 영성궁에 천단을 쌓고, 천지신명께 천도를 알리고, 조선과 대한제국의 부흥을 기원하는 천제를 올렸다.
이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무지개가 떠서 백성들이 하늘이 영험한 기운을 내려 축복한 것이라며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것은 태왕이 하늘이 내린 신인이라는 소문이 한층 더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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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천제가 열렸던 7월 1일, 해병강습함대는 말라가에 접근하고 있었다.
말라가는 이순신 함대가 이곳을 통과할 때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그 봉쇄 작전을 유지하고 있던 것은 포라중에 주둔 중인 21원정 함대 소속 전대였다.
그들의 존재 때문인지 말라가는 해병강습함대가 제시한 포르투갈 국왕의 명령서에 순순히 응했다. 말라가에도 포라중 주둔군 중 일부가 전개하여 점령지 인수를 진행하는 것을 확인한 해병강습함대는 말라가를 떠나 모잠비크로 향했다.
마드라스를 거쳐 마다가스카르의 최북단인 디에고수아레스 기지에 기항한 해병강습함대는 주둔 함대로부터 모잠비크에 대한 정보를 취득했다.
디에고수아레스가 자리한 마다가스카르와 모잠비크가 서로 마주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포르투갈은 모잠비크 해변에 도시를 건설해 보급거점으로 운영 중이었고, 아직 내륙지방에 대한 개발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모잠비크라는 지역명의 시작이었던 모잠비크 섬을 비롯해 마푸토, 미칭가, 베이라, 팔마, 포르토아멜라 등 여러 개의 해변 항구 도시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해병강습함대는 그 지역들을 차례차례 점령하는 것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많이 걸린다고 판단, 동시 다발적 점령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물론 그 작전 실행 이전에 현지 징집된 포르투갈 출신 해병대원을 보내 모잠비크 총독에게 포르투갈 국왕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제시하고 따르도록 통보했다.
하지만 모잠비크 총독은 포르투갈인 해병대원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명령서를 갈가리 찢어 버리며 불복을 선언했다.
그 소식을 가지고 포르투갈 출신 해병대원이 귀환하자 곧바로 해병강습함대의 모잠비크 점령 작전이 실시되었다.
6개의 주요 항구도시를 향해 동시 다발적으로 진행된 이 상륙작전엔 디에고수아레스 기지 주둔 병력과 함대도 참여했다.
6시간에 걸친 이 상륙작전으로 모잠비크 총독이 추포되고, 수많은 포르투갈 병사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과정에서 항구에 정박해 있던 무장상선들이나 포르투갈 전함들이 파괴되거나 나포되었다.
왕명에 반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힌 포르투갈인들은 모조리 네덜란드 포로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일부 병력을 남겨 해당 도시들에 대한 점령 및 안정화 작전을 지속하도록 한 해병 강습함대가 모잠비크를 떠나 앙골라로 향했다.
이들에겐 희망봉과 앙골라, 카보베르데, 그리고 조선군이 사전에 보급기지로 점령했던 상투메 섬 이외의 상투메 프린시페 전역에 대한 점령임무가 남아있었다.
그렇게 해병강습함대가 모잠비크를 떠나던 7월 말, 태왕의 비답을 가지고 부산포를 떠났던 왕건급 호위함 2척이 리스본으로 입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