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해외 식민지
멀어지는 펠리페 3세와 왕가의 사람들, 그리고 고위 귀족들과 그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서있는 이순신에게 한 고위 참모가 물었다.
“이 상황이 안정화 될 때까지 포로로 잡고 있는 것이 낫지 않았겠습니까?”
아쉬움이 묻어나는 그 물음에 이순신은 고개를 저었다.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어째서 입니까?”
“지난번에 다녀간 애덤스 백작에게 듣자하니 저들 말고도 에스파냐 왕실을 이을 이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에는 더 있다고 하더군. 새로 왕위를 이은자가 명분을 쌓기 위해 복수를 부르짖으면 전투만 더 길어질 테니 보급품이 부족한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겠지.”
“하나 우리 손에 들어왔던 왕실의 재물들까지 저리 고스란히 돌려보내는 것은······.”
“대한제국의 이름하에 폐하의 명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에스파냐의 영토를 얻는 것도 아니고, 막대한 배상금을 챙기는 것도 아닌, 겨우 그것을 빼앗아 굳이 저들과 감정의 골을 깊게 파고, 폐하의 이름에 먹칠을 할 필요는 없다.”
단호한 이순신이 말에 움찔하면서도 참모는 한마디를 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저리 보내는 것이 왠지 아쉽습니다.”
“과유불급이라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는 법. 우리가 애초에 원하는 것만 얻었으면 족함이다.”
이순신의 말에 참모들도 아쉬움을 접어야 했다. 그런 참모들에게 이순신이 명했다.
“모든 병력을 국경 안으로 불러들이고, 경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저들이 포르투갈을 포기하기로 하였다고는 하나 안심하지 말라.”
“예. 원수!”
참모들의 복명을 받으며 멀어지는 에스파냐 왕실의 마차들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수염이 차가운 리스본의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광무 6년, 서기로는 1608년 11월 17일을 기해 대한제국 황제의 직위에 포르투갈의 왕위가 추가되었다.
실제로는 해가 바뀐 광해 7년 3월에야 펠리페 3세가 서명한 포르투갈 왕위의 양도 조약서가 조선에 전해지지만, 역사서에는 포르투갈의 왕궁에서 펠리페 3세가 조약서에 서명한 날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조약이 마무리 되고 펠리페 3세가 리스본을 떠나 마드리드로 돌아간지 5일 후, 11수송함대와 13수송함대가 71기동함대의 호위 속에 대량의 보급품을 싣고 리스본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로부터 에스파냐와의 확전에 대비해 대규모 육군 병력을 실은 후발 함대가 뒤따라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태왕의 선견지명에 다시금 놀라야 했다.
만약 펠리페 3세의 생포가 실패했다면 지금쯤 에스파냐와의 전쟁은 어려운 국면에 들어갔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급함대의 도착으로 리스본 항구와 시내 전역에 보급물자들이 하역되어 쌓이고 있었다. 물자는 대부분 총탄과 포탄 등 군수물자였고, 소량의 식량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서도 원정군이 가장 필요로 할 물자가 군수품이라는 것을 꿰뚫어본 것이다.
거기다 대량의 석탄이 또한 함께 보급됨으로써 연료부족에 시달리던 이순신 함대에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참모들과 함께 보급품 분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 9만의 대한제국 육군 병력을 실은 대규모 수송단이 리스본에 도착했다. 이틀간 보급품을 하역한 11, 13수송함대가 포르투갈 전쟁 종료의 소식을 가진 채 71기동함대의 호위 하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간지 3일 만이었다.
리스본 전역이 대한제국군으로 바글거렸다.
병력 상륙을 마친 대규모 수송단에서 이순신이 1개 호위전대, 그러니까 1개의 조선 무역선단에 소속된 호위함들인 1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4척의 왕건급 호위함을 잔류시켰다.
연료부족으로 이순신 함대가 움직이기 어려울 때 운용할 수 있는 범선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남겨두고 대규모 수송단이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순신은 육군 병력을 모두 점령지 안정작전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그에 따라 먼저 상륙한 9만의 병력을 곧바로 투입하지 않고 일주일간 현지 적응 교육을 실시했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해병대가 주둔하며 얻은 정보들을 기반으로 포르투갈의 문화, 주의해야 할 사항 등을 교육하여 점령지 안정화 작전 중 포르투갈 현지인들과의 충돌을 가능한 방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처였다.
해당 교육이 끝나자 9개 병단, 9만의 병력을 먼저 점령지 안정 작전에 투입했다.
아울러 기존에 점령지 안정작전에 투입되어 있던 해병대 5개 여단, 2만5천을 임무해제해서 리스본으로 불러들여 예비대로 삼았다.
그러는 사이 72기동함대의 호위를 받는 12함대가 3만의 병력과 보급품을 싣고서 도착했다.
이순신은 추가로 도착한 병력도 현지 교육을 시킨 후 점령지 안정작전에 투입했다. 다수의 보급품이 추가로 풀리면서 일단 원정군의 보급품 부족현상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추가로 전쟁이 벌어졌을 때 보급물자의 부족현상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돌아가는 12수송함대 편에 대량의 보급품을 추가로 요청했다. 또한 리스본에 대규모 전략물자 창고를 건설하여 사전물자 전개를 검토해 달라는 청원을 적은 장계를 광해에게 올렸다.
아울러 잉글랜드에도 사람을 보내 지원해줬던 2만의 병력을 데려가라고 통보했다.
12만의 육군 병력이 풀리면서 점령지 안정 작전에 투입할 병력이 풍족해진 까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외국 병력을 안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 취해진 조처였다.
포르투갈에 12만의 대한제국군이 추가로 상륙했다는 것에 잉글랜드는 상당히 놀랐다.
이시기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24만이나 하는 대병을 수만 km 떨어진 외국에 투입할 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만한 수송함대도 없었고, 그 정도의 전비를 감당할 경제력을 갖춘 나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잉글랜드는 대한제국이란 나라에 대해 평가를 새로 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할 동방의 나라에서 적어도 절대로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나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름 후, 잉글랜드군이 귀환했다.
그들을 귀환시키기 위해 리스본으로 입항한 함대 편으로 애덤스 백작이 리스본에 입항 했다. 포르투갈이 확보하고 있던 동방무역거점들에 대한 양도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상황을 이순신이 인지했다.
바로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가 고스란히 대한제국으로 넘어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순신이 펠리페 3세에게 포르투갈 영토를 넘겨받은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 국왕을 양도받은 데 따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포르투갈 본토만 넘어온 것이 아니라 점령 당시 포르투갈이 확보하고 있던 해외 식민지까지 그대로 넘어왔음을 뜻했던 것이다.
애덤스 백작은 그런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들 중에서 다카르 앞바다에 위치한 카보베르데와 말라가를 원했다.
또한 대한제국이 확보한 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기항자격을 부여해 줄 것도 요청했다.
애덤스 백작의 요청을 통해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가 대한제국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한 이순신은 양해를 구하고 분주히 움직여야 했다.
당장 한 달 넘는 시간동안 해외영토에 관해서는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 어떤 변화가 벌어졌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바로 해당사실과 잉글랜드가 원하는 바를 적은 장계를 대규모 수송단에서 떼어내 보유하고 있던 왕건급 호위함들 중 2척에 실어 조선으로 급파했다.
애덤스 백작에게는 그 사실을 알리고, 본국의 결정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요청했다.
애덤스 백작은 이순신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좋은 답변을 기대한다면서 2만의 병력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
유럽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원정군이 포르투갈 원정을 사실상 완료하던 광해6년 11월, 조선에선 괄목할 만한 발명이 이루어졌다.
바로 무선통신이었다.
광해가 기억속의 마르코니의 무선전신기를 재현했던 것이 영 작동하지 않더니 비로소 해결된 것이다.
비록 10리(약3.9km)에 불과한 거리에 음성도 아니고 모르스 부호처럼 간단한 신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거리가 떨어진 곳에 대한 통신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광해는 도달거리를 확대하기 위해 벼락 연구소에 통신 연구조를 별도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해외 영토가 많아지면서 몇 달씩이나 걸리는 연락체계의 개선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이 당시 사람들보다 실시간으로 소식이 전해지던 현대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광해로써는 매우 답답했던 것이다.
아울러 1800년도 초에나 만들어지는 모르스 부호를 대체할 조선의 신호 체계에 대한 연구를 명했다. 해당 연구에는 학술기관인 홍문관과 연계하도록 지시했다.
일종의 언어체계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모르스 부호처럼 단락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광해가 요구했다.
한글의 자음과 모음, 그리고 숫자를 표현하는 방식이 될 터였다.
전구의 개발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진공상태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의 전구의 수명은 너무 짧았다. 불실(필라멘트)이 너무 빠르게 끊어졌기 때문이다.
텅스텐으로 필라멘트를 만드는 기술은 이 시대에는 아직 불가능했고, 질소나 아르곤 가스를 주입하는 것도 실현 할 수 없었다.
당장 진공상태를 만드는 것에도 실패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사실 진공기술은 전자, 또는 전기 기술의 발전에 필연적인 기술이었다. 진공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진공관을 만들 수 있다면 음성을 전달하거나 다수의 전자기기의 개발이 가능해진다. 당장 무선전신의 거리를 늘리는 것에도 진공관이 필요했다.
따라서 광해는 통신 연구조에 진공기술 개발자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에 따라 안 어울리게도 전구 개발자들이 소속된 곳도 통신 연구조였다.
모든 연구들이 이처럼 서로서로 맞물리고 있었다. 그런 연구들의 연계를 위해 통합 연구 협력처를 조선만물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조선의 각 연구소들이 연구하는 사업들을 공개하고 그 정보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한쪽에서는 해당기술을 개발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스는 그 기술이 없어 개발이 지연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조선 만물연구회는 정식명칭 보다는 ‘장원’으로 더 많이 불리는 조선 신문물개발원 예하로 두었다. 그 기관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조선의 기술 개발이 한층 더 탄력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광무 7년, 서기 1609년 1월에 열린 확대 문무백관회의에서 장원이 요청한 연구시설의 집중화가 승인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 각지에 나누어져있던 각종 연구소들이 장원이 있던 지역으로 모두 이전 조치되는 일대 혁명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조선 기술대학당이 처음 개설되었다.
기술고등학당을 졸업한 인력들 중 그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만이 진학 가능한 이 대학당은 연구 인력을 길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수진도 각 연구소의 핵심 연구자들이 맡았다.
문무백관회의의 결정에 따라 올해도 신세계항 건설 이후 중단 된 신세계 개척은 계속 보류하기로 했다.
유럽에서 전개되고 있는 포르투갈 전쟁과 병행 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은 포르투갈 원정이 사실상 종료되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까닭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아울러 확대 문무백관회의에서 천도열도와 웅다 반도, 현월열도, 그리고 신세계에 처음 건설된 신세계항을 모두 조선의 강역으로 선포하고 이들을 북해도에 관할시켰다.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와 관리를 위해 북해도를 비롯한 일본 전 해역을 관장하는 3함대의 증강 계획이 수립되었다.
현재는 다른 함대와 마찬가지로 1척의 해보수급 전열함과 30척의 왕건급 호위함으로 구성되어 있는 3함대에 차기 증기철선으로 설계되고 있는 함선들을 배치시키기로 한 것이다.
아울러 해병 6여단에 북해도 방어를 전담하도록 하는 안이 결정되었다.
그런 결정이 내려진 석 달 후인 3월 말. 71기동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제11, 13수송함대가 포르투갈 전쟁의 종료소식을 가지고 부산포로 돌아왔다.
조선을 포함한 온 대한제국이 그 소식에 환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