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무너진 발렌시아
수천도 아니고 십만이 넘어가는 병력을 단 며 칠 만의 전투로 괴멸시켰다는 소리에 경악했던 애덤스 백작이 놀람을 애써 가라앉히고 물었다.
“이제 어찌 할 생각입니까?”
“펠리페 3세를 사로잡아 전쟁을 끝내야겠지요.”
“그럼 에스파냐를 점령하는 것입니까?”
애덤스 백작의 물음에 이순신이 작게 웃었다.
“잉글랜드에서 20만 명만 지원해준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만이라는 수에 잠시 놀랐던 애덤스 백작이 이순신이 던진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쓰게 웃었다.
“어렵다는 말씀이군요.”
“병력이 부족합니다. 포르투갈보다 더 넓은 에스파냐를 현재의 병력으로 장악하기에는 어렵지요.”
이순신이 답에 애덤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나저나 에스파냐와의 전쟁이 아무리 습격으로 이루어진다지만 상당한 전력이 필요하실 터인데,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질문을 던져놓고 아차 싶었던지 애덤스 백작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참! 아국의 상황 상 병력을 더 이상 충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원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뭐가 필요하십니까?”
다시금 던져진 애덤스 백작의 물음에 이순신이 기대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화약입니다.”
이순신의 답에 애덤스 백작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부탁을 받은 까닭이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얼마나 더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실은 이번에 싣고 온 화약도 해군에서 말이 많았던 것이라······.”
잉글랜드에서 화약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집단은 역시 해군이었다. 그 다음이 무장상선들이다. 이시대의 잉글랜드 육군조차 아직 해군 정도의 화약을 소모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잉글랜드 해군의 불만을 애써 무시하며 가져온 화약이 이번에 리스본에 풀린 것이다. 잉글랜드의 입장에서는 거의 보관량의 절반에 달했을 정도로 대량이었다.
물론 대한제국 원정군 입장에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했지만.
사실 실제역사에서 유럽에 화약의 질적, 양적 팽창을 가져왔던 인도산 초석은 현재 조선이 독점 중이었다.
마드라스를 통해 무굴제국과 그 남부지역의 여러 술탄국들에게서 생산되는 초석을 조선이 전량 사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로의 반출은 용납되지 않았다.
조선 외의 나라와 초석 교역을 할 경우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조선의 압박을 무굴제국과 남부의 술탄국들이 모두 받고 있었다.
마드라스에 주둔중인 조선군과 몇 번의 전투를 치러본 경험을 가진 술탄국들은 조선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남부 술탄국들과 마드라스의 조선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들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던 데다 대한제국과 일부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무굴제국은 대한제국의 종주국인 조선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로인해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서라도 초석을 다른 나라로 수출하려고 하지 않았다.
화약생산량에서만 따지면 지금의 조선은 온 세상 모든 나라의 화약생산량을 합한 것보다도 많은 화약을 생산하고 있었다.
수십만에 달하는 군대를 모조리 화약무기로 무장시킨 조선이기에 막대한 화약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분쟁 지역에서 전투라도 치를 때면 어마어마한 화약이 소모되었고, 평시 훈련에도 상당한 화약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 화약의 소모량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은 온 나라에 염초밭을 운영했다. 그곳에서 나온 초석으로 염초를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금과 명을 아우른 이후엔 양 국에서 수입된 초석을 썼다.
이후, 마드라스를 통해 순도가 높은 인도산 초석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부터는 조선에서 만들어진 화약은 모두 인도나 후금, 그리고 명에서 들여온 초석을 그 재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여전히 조선 모든 마을에 염초밭이 있었지만 유사시에 대비한 전략 자산으로 관리되고 있을 뿐 더 이상 여기서 염초를 얻지는 않는다.
대신 염초밭은 대량의 퇴비를 생산했다. 염초밭에서 나온 퇴비는 굉장히 질이 좋아서 조선의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리는데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여하간 이당시 조선의 막대한 화약 생산량을 다른 나라의 화약 생산량에 빗대어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포르투갈 점령이 끝난 뒤에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인지했던 이순신은 잉글랜드의 화약 지원량이 저들의 입장에선 결코 작은 양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순신의 말투는 정중했다.
“가능한 만큼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이순신의 말에 애덤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 말을 남겨둔 애덤스 백작은 다시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직후 이순신은 잉글랜드가 지원한 화약으로 총탄과 포탄의 생산을 독려했다.
그렇게 생산된 총탄과 포탄을 이스트모레스에서 전투를 치른 105여단을 비롯한 5개 여단에 공급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
마드리드를 떠난 해병기마대는 고속으로 발렌시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에스파냐가 대부분의 병력을 페르디난트 공작의 부대에 몰아주었다고는 해도 에스파냐는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유럽의 대국이었다.
외국 군대에 쫓겨 왕이 왕궁을 버리고 도주하는 상태를 멀건이 그냥 지켜볼 정도로 엉망인 나라도 아니었다.
더구나 펠리페 3세는 마드리드를 떠나기 직전 많은 수의 전령을 각지로 보내 근왕군을 소집하는 명을 내려 보냈다.
그 명령을 받은 각지의 영주들이 병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들이 집결하여 대군을 구성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당장 발렌시아로 달려가고 있는 해병기마대의 앞길을 막아서는 에스파냐 병력의 출현 빈도와 규모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적은 소수여서 해병기마대의 공격력으로 충분히 돌파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도 해병기마대가 레케나(Requena)라는 도시를 지나면서 변해버렸다.
온전한 테르시오 방진을 구성한 에스파냐군과 조우한 것이다.
복장 무장상태 등으로 미루어 정규군 보다는 급조된 농민군에 가까운 이들이었지만 그들은 대량의 아쿼버스와 장창을 가지고 기동 중이던 해병기마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해병기마대로써는 처음 속도를 줄이고 포를 방렬하여 포격을 진행한 전투였다.
수는 3천 남짓했는데 이들은 언덕과 오래된 요새를 방패막이 삼아 해병기마대에 저항했다. 그로인해 소탕에 시간이 들었다.
포격으로 엄폐물을 모두 소거한 이후 해병기마대가 도보로 접근 기마총으로 제압했다. 일부 패잔병들이 도심으로 숨어들었지만 해병기마대는 그들을 모른 척 한 채 그대로 지나쳤다.
소탕한답시고 시간을 더 끄는 것이 오히려 손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발렌시아로 달려가는 해병기마대 지휘관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에스파냐의 저항이 조직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해병기마대는 결국 발렌시아에 도착했다.
발렌시아는 커다란 성채에 성문을 굳게 닫고 결사의 항전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해병기마대의 장기인 고속 기동과 충돌력을 발휘할 수 없는 공성전을 벌여야 했지만 지휘관들은 물론이고 기마대원들도 당황하지 않았다.
보병전술은 물론이고 공성전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히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말에서 포가 분리되어 방열되고 포격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포의 포각으로는 성벽을 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사거리 인근에 언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폭발탄을 성 안으로 직접 투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 훈련 받은 포병대는 곧바로 주변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깎기 시작했다. 숙련된 석공의 실력에는 모자랐지만 석포탄을 만들어내는 훈련을 받았던 포병들은 순식간에 사용 가능한 석포탄을 만들어 내었다.
소총탄의 야전 생산을 위해 가지고 다니던 화약과 종이로 장약을 재조한 포병들이 석포탄을 밀어 넣고, 장약을 채운 후, 포구에 흙을 넣어 다졌다.
석포탄이 포강과 밀착되지 않아서 가스가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전장식 포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후장식인 이포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전 방식이었지만 석포탄을 사용하자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장전이 끝난 석포 4백문이 불을 뿜었다.
두터운 발렌시아의 성벽도 수백발의 석포탄 세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럽 내 그 어떤 성벽도 이정도의 대량 포격에 대비한 방어력을 가진 성벽은 존재하지 않았다. 발렌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항구를 등지고 건설된 발렌시아의 성벽은 30분의 집중 포격에 성벽이 무너졌다.
놀란 발렌시아의 수비병들이 그렇게 무너진 성벽 주위로 모여들어 방어선을 구축했다. 2천 남짓한 수비대의 대부분이 몰려들어서야 간신히 막아 낼 정도로 성벽은 넓고 크게 무너져 있었다.
그런 발렌시아 수비대에게는 불행하게도 해병기마대 포병대가 이번엔 석포탄이 아니라 폭발탄을 무너진 성벽 너머로 대량 포격했다.
잠시간의 시간을 두고 폭발한 폭발탄의 화염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발렌시아 수비대 집결지역 일대가 화염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온몸에 불이 붙은 발렌시아 수비대 병사들이 사방으로 뛰며 지르는 끔찍한 비명소리가 사방을 채웠다. 그 비명소리가 잦아 들 때쯤 포병대의 이차 포격이 가해졌다.
이번에는 산탄 포탄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아있던 발렌시아 수비대가 산탄포탄의 공격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런 이들을 향해 해병기마대가 전격적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막아야 하는 발렌시아 수비대는 이미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2차 포격으로 날아든 산탄포탄에 휩쓸려 떼죽음을 당한 후였다.
거의 무혈입성한 해병기마대가 무서운 속도로 성내로 진입하며 펠리페 3세를 찾았다.
왕이 기거할 만큼 큰 건물은 다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펠리페 3세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내 시크수색단이 흩어져 온 도시를 뒤졌지만 역시 펠리페 3세는 고사하고 에스파냐의 고관대작조차 단 한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발렌시아를 점령한 해병기마대는 발렌시아 시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을 끌어다 정보를 캐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표정으로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여단장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을 시크수색단에 넘겼고, 시크수색단은 30분이 넘어가기 전에 정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렇게 얻어낸 정보가 해병기마대에게 곤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펠리페 3세와 대신들은 이미 이틀 전, 발렌시아를 떠나 북부 해안도시인 바르셀로나로 향했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지도를 펴놓고 거리를 재어본 해병기마대 지휘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거리가 대충 감안해도 760리(약3백Km)가 넘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크수색단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출발한 지 이틀이라면 보군의 속도 상 아직 도착 전이 아닐까요?”
그 말에 서로를 바라본 여단장들이 곧바로 해병기마대에 출병을 명령했다.
약간의 식량과 온 도시를 뒤져 확보한 화약만 마차에 싣고서 해병기마대가 황급히 발렌시아를 떠났다. 그렇게 해병기마대가 떠난 발렌시아는 무너진 성벽과 죽은 수비대 병사들의 시신들로 참혹한 광경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