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버려진 마드리드
북부로 향하던 5개 여단에서 원정군 사령부의 급보를 받은 해병 기마대가 동부로 방향을 틀어 급속 기동에 들어간 시점.
나머지 3개 여단은 곧바로 방향을 돌려 이스트모레스로 달렸다. 그간 느릿느릿 움직이던 속도와는 전혀 다른 고속 기동이었다.
이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에스파냐의 잔여 병력이 해병기마대에 대응해서 내륙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가 맡겨져 있었다.
이순신은 이미 이스트모레스에 전개되어 있는 105여단과 예비 병력으로 투입된 4개 여단이 전투 직후 잔탄 예비량이 바닥을 칠 것이라 예상했고, 따라서 그들을 곧바로 전투에 다시 투입할 수 없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이 북부로 향하고 있던 나머지 3개 여단을 이스트모레스로 가도록 명령한 이유였다.
다행히 그들은 해병기마대에 대한 소식이 자모라에 방어거점을 구축하고 있던 페르디난트 공작의 귀에 들어가기 이전에 이스트모레스에 도착했다.
직후, 3개 여단은 곧바로 이스트모레스를 출발 이전에 105여단이 경계를 펴던 국경까지 돌파해서 자모라 코앞에 진을 쳤다.
이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자모라를 공격하여 격멸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공성전에는 상당한 양의 포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대한제국 포르투갈 원정군에는 보급해줄 포탄의 여분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적이 자모라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3개 여단은 후방을 경계하던 일단의 에스파냐군을 격파하고 후방지역까지 진출해서 자모라를 3개 방향에서 포위했다.
그런 대한제국군의 움직임에 의해 페르디난트 공작이 지휘하는 6만의 대병이 자모라에 갇혀버리게 되었다.
자모라를 포위한 채 대기하는 동안 소위 해병 기마대라 불리는 110여단, 120여단, 시크수색단은 일체의 전투를 거부한 채 직선으로 마드라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소수의 병력과 충돌했지만 1만이나 하는 무장 기마대의 공격력을 막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2백보(약360M)거리에서 기마총을 마구 쏘며 들이닥치는 기마대의 충돌력을 이겨낸 에스파냐군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들에 대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은 마드리드의 펠리페 3세였다.
그는 대규모 기마대가 에스파냐를 관통하고 있으며, 그 방향 상 목적지가 마드리드일 것 같다는 보고에 당황했다.
어지간한 병력은 모조리 페르디난트 공작에게 주어 자모라로 내려 보냈던 터라 달려오는 대한제국군 기마대를 막아낼 병력이 없었다.
왕궁엔 3천의 근위대가 남아있었지만 그들로 방어가 가능할 지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펠리페 3세는 각지로 근왕군을 소집하는 전령을 보낸 직후, 왕궁을 떠나 동쪽 해안 도시인 발렌시아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5백의 근위기병대만을 대동한 채 심야시간에 비밀리에 이루어진 고속 이탈이었다.
나머지 2천5백의 근위대는 대신들과 왕실의 보물들을 실은 수레를 끌고 수백씩 쪼개져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마드리드 시민들에게 국왕의 피신 소식이 전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칫 시민들이 알았다간 함께 피난한다며 몰려나오기라도 하면 왕실의 이동에 문제가 생길 것을 걱정한 펠리페 3세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로인해 펠리페 3세가 왕궁을 떠난 다음날 까지도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국왕이 왕궁을 떠난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적군이 다가오는 시점임에도 시민들에 대한 동원령이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마드리드 시장이 근위대 고위 지휘부관을 만나기 위해 왕궁을 방문했다가 정문의 근위병 몇 명을 제외하고는 텅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사실이 알려졌다.
왕이 자신들을 버리고 홀로 도망갔다는 것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허탈감과 절망에 빠졌다. 아지만 그것도 잠시, 허탈감과 절망감은 분노로 변해버렸다.
분노한 시민들이 왕궁으로 몰려갔다.
국왕의 피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끝까지 왕궁 정문에 남아있던 충성스러운 근위대 병사 몇 명이 그런 시민들의 왕궁 침입을 막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들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이후 에스파냐 왕궁은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약탈되고, 불타올랐다.
값비싼 물건들은 이미 모두 다 근위대가 싣고 떠나버려서 남겨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남겨진 모든 것이 약탈되거나 불타버렸다.
마드리드의 에스파냐 왕궁이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불타오른 다음 날, 해병 기마대가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약750리길(약295Km)을 3일 만에 주파한 급속 기동에 따른 결과였다.
그런 대한제국 해병 기마대를 마드리드는 백기를 걸고, 성문을 열어둔 채 맞았다.
활짝 열린 성문 앞에 나선 마드리드 시장에게서 에스파냐의 국왕이 발렌시아라는 동쪽 도시로 도주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해병 기마대 지휘관들은 허탈해했다.
확인을 위해 시크수색단을 마드리드 시내로 들여보내 상황을 살피고 불타버린 왕궁까지 확인한 해병 기마대는 불안해하는 마드리드 시민들에게서 약간의 식량만을 얻어낸 후 곧바로 발렌시아를 향해 다시 달려갔다.
포르트갈 북부에서 살인, 약탈, 방화로 흉성이 자자했던 해병 기마대의 행동치고는 너무나 절제된 모습이었다.
오죽하면 마드리드의 시장이 이당시 경험담을 남긴 저서에선 해병 기마대가 정중하고, 신사적이었다는 평가를 남겼을 정도였다.
마드리드를 떠난 해병 기마대는 다시 고속 기동을 통해 발렌시아로 직행했다. 리스본을 출병할 때 확보한 에스파냐 지도가 그렇게 이동하는 해병 기마대의 길잡이로 톡톡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해병 기마대가 도주한 펠리페 3세를 따라 마드리드를 떠나던 시점, 리스본의 원정군 사령부는 잉글랜드의 지원군을 맞이하고 있었다.
약속된 2만이 아니라 1만이 리스본 항에 내려섰다. 그들을 이끌고 온 애덤스 백작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미안해했다.
“아일랜드의 상황이 매우 급박해져서 병력을 더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잉글랜드가 대한제국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에스파냐가 막대한 자금을 아일랜드 독립군에 지원하면서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격화된 것이다.
그로인해 포르투갈로 파병하기 위해 집결 시켰던 병력 중 절반인 1만의 병력을 잉글랜드는 아일랜드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대한제국과의 동맹보다는 영국을 통합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제임스 1세는 2만의 병력 모두를 아일랜드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동방의 무역거점이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잉글랜드 의회는 그런 제임스 1세와 격렬한 토의를 벌여 절반인 1만만 아일랜드 전선으로 보내는 것으로 결론을 냈던 것이다.
여하간 약속이 틀려지는 것은 다를 게 없어서 잉글랜드 의회는 부족한 병사들 대신 사전에 약속했던 것보다 많은 화약을 실어 보냈다.
이순신과 원정군 지휘부로써는 실제로 1만의 병력보다 그렇게 리스본 항구에 내려지는 화약통들이 더 반가웠다.
이순신은 그렇게 하역된 화약들을 활용해 곧바로 총탄과 포탄들을 생산하도록 명령했다. 그간 부족한 화약량 때문에 놀고 있던 포탄 생산 기술자들이 모처럼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양의 화약이 잉글랜드로부터 전달되기는 했지만 포탄을 대량으로 생산할 정도로 풍족한 양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포의 포탄에 들어가는 화약의 양만 30냥(약1.1Kg)이다.
본래 1개 여단이 장비한 이포의 수는 150문이다. 대한제국 해병대의 경우엔 포르투갈 원정에 대비해 2백문으로 강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1개 여단이 보유한 이포를 한 번씩만 쏠 수 있는 포탄을 구비하는 것에 만도 2백Kg의 화약이 들어갔다.
잉글랜드가 큰마음을 먹고 지원한 10톤의 화약 중 포탄 제조로 돌려진 화약은 절반인 5톤, 이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포탄의 수는 으로는 4천5백발 정도다.
실제로는 구포탄으로 사용되는 비격진천뢰도 생산해야 했기에 3천5백발만이 생산될 예정이었다.
숫자만 들었을 때는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산된 양은 1개 여단이 평시 휴대하는 6천발의 포탄보다 작은 양이었다.
6천발은 각 포가 30번 사격할 수 있는 포탄으로, 평균적으로 조선군이 한 번의 전투에 소모하는 탄의 양을 기준으로 책정된 예비탄수였다.
조선군의 직제를 대다수 그대로 채용한 대한제국군 해병대도 똑같은 예비탄수를 운용했고, 실제로 포르투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비슷한 소모율을 보였다.
물론 생산 장비의 수나 기술자들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어서 3천5백발의 포탄을 생산하기 위해서 리스본에 전개된 포탄 생산시설은 상당히 분주히 움직여야만 했지만 말이다.
이순신은 미안해하는 애덤스 백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리스본에 추가로 도착한 1만의 병력을 나누어 각지의 점령군을 지원했다.
병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점령군들이 반겼지만 여전히 수는 부족한 상태였다.
애덤스 백작은 대한제국이 잉글랜드군을 위험한 전장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고마워했다.
일반적으로 지원군의 경우 대부분 위험한 전장에 내세워 총알받이로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에 잉글랜드 의회에서도 그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처음에 지원된 2만의 병력들 대부분이 농민들을 급조하여 만든 농민군이었던 이유도 그것에 있었다. 보내봐야 곧바로 죽을 것이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 제국군이 그렇게 지원된 잉글랜드군을 점령군으로 배치하면서 잉글랜드는 상당히 놀랐다. 거기다 약간의 창피함을 느껴야 했다.
점령군으로 배치된 잉글랜드군이 제대로 된 임무 수행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고가 대한제국군도 아니고 함께 보내진 잉글랜드 지휘관들을 통해 수도 없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군사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병들이 예민한 점령군 임무를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리스본으로 보내진 병력은 정예 소리를 듣기에 충분한 병력이었다.
하긴 이순신이 보기에도 이동 간 정렬형태, 명령전파 속도, 움직임에 따른 절도 등이 이전에 보내주었던 오합지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정도였으니까.
그것에 만족해하는 이순신에게 애덤스 백작이 물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현재 마드리드 공략이 진행 중입니다만······.”
“마, 마드리드! 벌써 에스파냐의 중심부까지 밀고 들어갔다는 소립니까?”
미처 알지 못했던 소식에 놀라는 애덤스 백작에게 이순신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전면적인 공격이 아니라 습격에 준하는 공격입니다. 현재 기마대 2개 여단이 마드리드로 진격 중입니다.”
“에스파냐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현재 에스파냐군 주력이 펼친 공격을 격파하고 나머지 병력을 자모라라는 에스파냐의 도시에 가둬두고 있습니다.”
이순신의 말에 애덤스 백작의 눈이 커졌다.
“이미 에스파냐의 주력을 격파하였단 말입니까?”
“예. 몇몇 조공을 비롯해 며칠간의 전투로 대략 14만의 에스파냐군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시, 십사만이요!”
“예. 보고에 올라온 대로면 그 정도입니다.”
“부, 부풀려진 것은······?”
조심스러운 애덤스 백작의 물음에 빙긋이 미소를 지은 이순신이 고개를 저었다.
“대한제국군에게 있어 보고는 생명입니다. 고의적인 과대, 과소 보고는 심할 경우 총살될 수도 있는 중범죄로 다뤄집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것도 조선군의 군법에 따른 것이다.
광해는 한 번의 소식이 전달되는 데도 빠르면 몇 시간, 늦으면 며칠씩이나 걸리는데 그렇게 도달한 소식이 부풀려지거나 축소되어 있는 경우 대책에 커다란 차이가 발생된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것을 없애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대부분의 보고가 과대 포장되거나 축소되는 이유는 전공을 부풀리거나 아니면 자신의 책임을 축소시키려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추후 전공에 대해서는 면밀한 조사를 실시해 부풀린 것이 확인되면 그 부풀림의 정도에 상관없이 모조리 목을 베어 효수하겠노라고 공표했고, 축소보고의 경우는 그 죄를 밝혀 10배로 처벌하도록 했다.
그런 광해의 노력에 의해 전공을 부풀리던 조선군의 고질적인 폐해를 끊어낼 수 있었고, 그 기조를 대한제국군이 그대로 내려 받은 것이었다.
그런 자신감이 이순신으로 하여금 수하들의 보고를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확인에 애덤스 백작의 놀라움은 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