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돌파 당하다
바다호스와 접경을 이룬 방어지역에 대한 경비를 맡고 있던 것은 105여단이었다.
105여단이 경계를 맡은 지역은 개활지도 많고, 대규모 병력이 진출 할 수 있는 길목들도 다수여서 180리(약70Km)에 달하는 경계지역에 고루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러다보니 여단본부가 예비대를 맡고, 나머지 4개 단이 경계임무에 투입되어 있었다.
각 단이 맡은 구역은 58리(약23Km)로 105여단 예하 각 단은 단본부 병력을 포함 3개 대를 예비 병력으로 삼아 7개 대를 경계에 투입했다.
그로인해 1개 대가 맡은 경계지역은 폭8리(약3Km)에 달했다. 이 지역을 각대는 주야로 감시, 경계해야 했기 때문에 평시 경계 병력은 1개 분대인 25명을 넘어설 수 없었다.
따라서 에스파냐군의 대공세가 집중 될 폭 3Km에 달하는 돌파 예정지역의 경계에 투입되어 있던 대한제구군의 병력은 1개 분대, 25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비행대의 야간탐망의 한계로 인해 에스파냐군의 대규모 이동을 파악하는 것이 늦었다.
완벽한 개활지로 1만 마리의 소떼를 몰고 나서는 3만의 병력을 비행대가 어둠속에서 확인한 것은 6시, 이제 11월에 접어든 겨울의 해는 아직 뜨기 전이었다.
비행대로부터 급보를 받은 105여단이 비상을 발령하고 모든 경계부대에 전투태세 강화 명령이 채 하달되기도 전에 에스파냐군이 들이닥쳤다.
가장 선두에서 밀어닥친 것은 페르디난트 공작이 이번 전투를 위해 히든카드로 삼은 1만 마리의 소떼였다.
그 많은 소떼가 폭 3Km남짓한 방향을 가득 메우며 밀어닥쳤다.
분대 지원하기인 현식총이 불을 뿜었지만 겨우 1정의 현식총으로 1만 마리의 소떼의 전진을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총소리에 놀란 대장이 뛰쳐나오고 곧바로 다른 분대들이 가세했지만 4정으로 늘어난 현식총의 사격으로도 달려오는 소떼의 전진을 막기에는 어려워보였다.
곧바로 대장의 지휘 하에 대 지원화기인 구포 2문이 비격진천뢰를 쏘아대면서 화력지원에 나섰지만 몰려오는 소떼의 기세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았다.
한발 만으로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던 사람과 달리 몇 발을 맞아도 달려오는 소떼의 돌진은 생각 외로 위협감이 높았다.
그러는 사이 소떼가 진지 코앞까지 돌입해왔다.
“지향뢰!”
대장의 명령에 진지 바로 앞에 매설되어있던 지향뢰에 불이 붙고.
콰과과광!
50여발의 지향뢰가 일제히 폭발하면서 천개가 넘어가는 쇳조각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앞에서 달리던 소떼가 우르르 무너졌지만 그것도 백여 마리를 조금 넘길 뿐이었다. 그 뒤로 새카맣게 몰려드는 소떼의 수가 너무 많았다.
몰려오는 소떼의 진행방향인 진지에서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대장이 곧바로 대원들을 진지에서 빼냈다.
곧이어 들이닥친 소떼는 진지에 쌓아놓은 흙주머니들을 밀어버리고는 참호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개중엔 떨어지면서 목뼈가 부러져 죽는 경우도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도 몰려드는 소떼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참호에 빠져 허우적대는 소들을 밟고 소떼가 그 위를 지나갔다.
소떼가 일으킨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나 사방을 가렸다. 그 속에서 막 떠오르는 햇빛에 무언가가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그게 무엇일지 소떼가 지나가며 일으킨 먼지구름 속을 바라보고 있던 대한제국군은 재빨리 알아차렸다.
“적이다! 전원 전투대비!”
대장의 고함에 대한제국군 병사들이 소떼가 지나가면서 엉망이 된 진지로 달렸다.
진지에 도착해 황급히 다시 방어태세를 갖추는 대한제국군 병사들이었지만 소떼가 휩쓸고 지나간 진지에 남은 엄폐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미 참호는 죽거나 다친 소들로 메워져 기능을 상실했고, 그 앞에 세워졌던 흙주머니 엄폐물은 모두 무너졌다.
결국 병사들은 엄폐물을 포기하고 바닥에 엎드려 사격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방어태세를 갖춘 대한제국군을 향해 소떼의 뒤를 따라 달려온 에스파냐군이 들이닥쳤다.
“사격!”
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탕, 타당탕.
곧이어 소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타라라라.
현식총들도 불을 뿜기 시작했다.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대가 전투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단장은 곧바로 돌파지점으로 휘하 대들을 소집했다.
해단 단이 맡은 경계면을 따라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한곳으로 집중하면서 다른 곳을 통해 또 다른 에스파냐군이 침투할 가능성이 거론되었지만 당장 수천단위의 병력이 돌파를 시도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대비해 병력을 산개해 둘 수는 없었다.
해당 지역을 맡은 단이 돌파지역으로 집결하는 동안 대한제국군 제105여단 본부대도 곧바로 예비 병력을 돌파지점으로 급파했다.
2개 대로 구성된 차단병력이 1개 여단 포대와 함께 돌파지점 배후 차단 기동에 나섰고, 4개 여단포대를 포함한 8개의 대를 이끈 여단장은 곧바로 에스파냐군의 공세가 집중되고 있는 돌파지점으로 달려갔다.
돌파지점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참호 등 엄폐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경계부대는 완전히 난전에 휩싸여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예비대가 구포와 현식총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전장으로 돌입했다.
후면에 여단포병대 소속 4개 포대가 포를 방열하고 발사 준비에 분주했다.
전선에 지원부대가 증강되었지만 전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에스파냐군의 병력 투입이 본격화되면서 이미 전선에 집중된 적군의 수가 2만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활지에서 소떼로 인해 진지가 무너진 상태에서 2천명 남짓한 병력이 만단위의 병력을 코앞에서 맞닥트린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에스파냐군은 수많은 피해에도 굴하지 않고 돌진해 들어왔다. 죽어나가는 숫자보다 돌진해오는 적군의 숫자가 훨씬 많다보니 전선에서 대한제국군과 에스파냐군 병력 간에 백병전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백병전에 휘말린 구포병들이 구포를 두고 총검으로 밀어닥친 에스파냐군 병사들과 격투전을 벌이는 실정까지 도달했다.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여단장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여단 포병대장에게 명령했다.
“확산탄, 진중 사격!”
“예?”
놀라는 포병대장에게 여단장이 다시 명령했다.
“뭐하나 진중 사격 실시해!”
여단장의 명령에 이를 악문 포병대장이 각 포대에 명령했다.
“장탄 확산탄!”
포병대장의 명령에 각 포병들이 황급히 산탄포탄을 꺼내고 확산탄을 장탄했다. 장탄완료보고가 모두 올라오자 포대장이 명령했다.
“진중사격. 방포!”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기에 포병대원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포를 쏘기 시작했다.
콰과과쾅!
40문의 여단본부 포병대의 이포가 확산탄을 백병전이 벌어진 진중을 향해 발사했다.
그와 동시에 여단장의 고함소리가 진중에 울려 퍼졌다.
“엎드려!”
고함소리를 들은 대한제국군 병사들이 백병전의 와중에 적을 밀어내고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그 순간.
퍼벙펑펑펑. 쏴아아아악.
폭발음에 이은 쇠비소리가 엎드린 대한제국군 병사들의 위를 지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든 쇳조각들이 미처 엎드리지 못한 대한제국군 병사들을 포함한 에스파냐군을 쓸고 지나갔다.
진중에 돌입했던 에스파냐군 병사들 수백 명이 무더기로 쓰러지면서 공간이 생겼다.
머리를 든 대한제국군 병사들이 아군이 쏜 확산탄에 벌집이 되어 나동그라진 동료 전우들의 시신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어서지 마라!”
여단장의 고함소리가 다시 진중에 울려 퍼지고,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이어가는 대한제국군 위로 연신 이포의 사격이 이어졌다.
참호를 정비할 시간도 없었고, 포대의 포격을 위해 병력을 포각 밖으로 빼낼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전투는 그렇게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2시간의 전투가 지속되면서 105여단은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모조리 소집해 돌파지점으로 투입하고 있었다.
여단 경계지역의 경계망이 뚫릴 수 있다는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수만에 달하는 적군이 돌파지점으로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병력을 분산 배치해 두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05여단이 총력방어로 나서는 상황에서 전투는 3시간을 넘어갔다. 전투시간이 길어지면서 105여단이 보유한 여분의 탄약들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보유탄이 가장 적었던 구포탄은 진즉에 떨어졌고, 포탄도 바닥을 드러낸지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최대한 아껴서 사용하던 현식총마저 탄창이 떨어지면서 오로지 소총으로만 방어에 임해야 하는 105여단의 위험도가 너무 높아졌다.
에스파냐군은 사전에 바다호스에 전개해 두었던 3만의 병력을 모두 잃고서도 계속해서 전선으로 병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변 도시에서 밤새 달려온 병력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대한제국군의 예비대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예비 병력이 전개되어있던 지역과 105여단이 배치되어있던 지역 간의 거리를 생각하면 적어도 내일 오후는 되어야 증원 병력이 도착할 것이 분명했다.
병력의 열세도 문제였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총탄의 부족이었다.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보급지원을 청하는 전령이 원정군 사령부로 달려갔으니 조만간 마차들로 이루어진 긴급보급대가 달려오겠지만 그것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인근 여단들에서 긴급하게 보내주고 있는 탄약 지원 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따라서 긴급보급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총탄 잔량을 확신할 수 없었다.
따라서 105여단장은 퇴각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자칫 총탄이 떨어진 상태에 도달하면 퇴각도 원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참모들의 설득에 결국 결정이 떨어졌다.
아끼고 아끼던 수탄들을 일제히 던져서 진내에 들어와 있던 적을 일소한 105여단이 일거에 진지에서 이탈했다.
마치 도주하는 것 같이 느껴진 해병대원들이 이를 악물었다.
전선에서 이탈하는 105여단의 전령들이 인근 여단들과 원정군 사령부로 퇴각 결정을 담은 소식을 가지고 달려갔다.
105여단이 퇴각하면서 곁을 지키고 있는 여단들에 부하가 걸리겠지만 당장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면 철수를 택한 105여단이 그간 사수하고 있던 진지에서 물러나 퇴각하자 수만의 에스파냐군이 그런 105여단의 뒤를 쫓아 포르투갈 영토로 진입했다.
틈을 벌인 에스파냐군이 인근의 다른 여단들의 배후를 공략할 것이라던 대한제국군의 예상을 뒤집고 페르디난트 공작은 곧장 리스본을 향해 병력을 진군시켰다.
아울러 진군지역의 모든 도시에서 마구잡이 징집을 시작했다.
각지의 점령군들이 그런 에스파냐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한 도시에 많아야 1개 대, 적을 땐 분대나 심지어 오 병력밖에 진주 할 수 없었던 점령군은 수천, 직후 만 단위가 훌쩍 넘어가는 병력을 투입하는 에스파냐군에 밀려 퇴각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대의 점령군들과 합류한 105여단이 방어선을 구축한 곳은 돌파지점에서 120리(약47Km)정도 떨어진 이스트레모스(Estremoz)라는 도시였다.
돌파지점에서 리스본으로 향하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었기에 선택한 곳이었다.
에스파냐군의 공세로 밀려난 점령군들의 합류로 3개 대 병력이 증원된 105여단은 이스트레모스의 성벽을 진지로 삼아 방어선을 구축했다.
전령을 후방으로 보내 달려오고 있을 긴급보급대와 증원군도 모두 이스트레모스로 유도하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05여단이 방어선을 공고히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에스파냐군의 공세가 밀어 닥쳤다.
페르디난트 공작은 여전히 속도전을 중시했고, 지속적으로 병력의 대량 투입을 통한 진공작전을 유지했다.
그에 따라 이스트레모스에서 105여단이 마주한 에스파냐군의 병력은 5만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이 5만의 병력에는 에스파냐군이 주변 도시들에서 마구잡이로 징집한 2만의 농민병이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