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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88화 (188/325)

제188화. 은폐 대 은폐

111여단장인 아원은 후방에 배치된 비행대의 사전보고로 적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에스파냐 국경을 넘어 선제공격이 허가되어있었다면 두말없이 선공을 취했겠지만 사령부의 지침은 에스파냐 국경을 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휘관들 사이에 난 소문대로라면 사령부의 지침은 가능한 전쟁의 확대를 억제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인근에 주둔하고 있는 점령군에 배치된 잉글랜드 지휘관들의 말로는 헛된 기대라고 했다.

그 탓에 전선 지휘관들의 불만이 높았다. 소용도 없을 제약을 걸어 전선 병력의 작전에 장애물만 가져왔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원의 생각은 달랐다. 이순신이라는 장수를 임진왜란 때부터 겪어본 결과, 그는 무심히 내딛는 한 걸음에도 쓸데없는 발길을 떼는 이가 아니었다.

그런 이순신 원수가 제약을 걸었을 때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적의 주공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전선에 배치된 대한제국군에 자율적인 선공을 허가하면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연히 그에 대응해야 하는 에스파냐군 병력도 사방으로 찢어진다.

아원은 이순신 원수가 그렇게 적군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17여단처럼 사령부의 지침에 상관없이 움직이자는 참모들의 의견을 단칼에 거부했다.

그가 아는 정충신이라는 장수는 움직임이 과감한 자였지만 머리가 모자라는 이는 아니었다.

그렇기는커녕 수하들로부터 덕장이라는 소리를 듣고, 동료들로 부터는 지장이라 평가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사령부의 지침을 어겼을 때는 그래야만 하는 어쩔 수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한 연유도 모르면서 단지 이순신 원수가 사령부의 지침을 어기고 움직인 117여단의 행보에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다고 묵인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령부의 지침을 그대로 지키기로 했다.

<선공을 받으면 격파하여 그 자리를 지킨다.>

사령부가 각 전선을 맡고 있는 여단에 내린 단 한가지의 임무였다.

그런 간단한 작전명령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군율이 엄하기로 제일인 조선군 출신 장수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 여단장의 결심 때문에 111여단의 참모들은 발만 동동 굴러야했다.

그렇다고 아원이 멍청하게 적이 야습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쪽은 낮에 깨어있고 밤에 병사들을 재운 것은 아니었다.

아원도 병사들을 낮에 재우고, 밤에 깨워 대비를 갖춰두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구름에 달빛이 완벽히 가려진 밤을 적장이 놓치지 않을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원은 평상시와 달리 병사들을 모조리 중무장 시켜서 진지로 투입했다.

대한제국 해병대에서 폭발성 화기를 가장 잘 다루는 부대로 111여단을 친다. 일전에 카바네야스가 지휘하던 이베리아 연합군과 벌인 전투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원과 그 휘하 지휘관들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은 그 누구보다 산악전투에 특화된 이들이었다. 여단장인 아원을 비롯해 상당수의 단장급 지휘관들이 조선군 산악전단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자율 전술 훈련 때 산악전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단들이 많았다.

특히 단장은 물론이고, 10명의 대장들 중 6명이 산악전단 출신인 3단의 경우엔 거의 부대 전체가 산악전에 특화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3단이 111여단의 예비대였다.

아원은 3단장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고, 곧바로 3단이 진지가 구축된 지역에서 1백M정도 떨어진 전방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111여단이 진지를 구축한 지역은 본래 숲이었다.

뭔 놈의 숲이 이리 길고 넓은지 국경지대가 온통 숲이었기 때문에 숲을 피해서 진지를 구축할 경우 수십 리를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 경우 곧바로 도시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곳에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없었다. 자칫 전투에 도시가 휘말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원은 아예 숲을 반 동강이 내버렸다. 폭 10리(약4KM), 길이 50리(20Km)에 달하는 숲의 중앙부, 그러니까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국경이 되는 지역의 나무를 1백M 거리를 이루며 모조리 베어내 버린 것이다.

마치 숲에 국경선을 그은 듯 직선으로 틈이 생긴 모양새였다. 그것으로 아원은 진지를 구축한 곳에서 전방 1백M 거리의 시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무모한 일이라고 반대했던 참모들도 그렇게 베어낸 나무들을 후방 점령지역으로 보내 포르투갈 백성들에게 땔감으로 제공함으로써 큰 호평을 받았다는 것에서 쓰게 웃고 말았다.

요사이 포르투갈 점령지에서는 소요보다는 협력의 기운이 강하게 번지고 있었다.

대다수의 귀족과 영주들이 카바네야스가 지휘하는 이베리아 연합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전사하거나 살아남아 에스파냐로 도주했다.

간간히 자신의 영지에 남아있던 영주들도 대항의 와중에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포르투갈 내부에서 조직적인 저항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점령군이 오히려 이전보다 나은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반발에는 가차 없는 보복이 따랐지만 순응하면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삶이 보장되었다. 살인적인 세금도 대폭 낮아졌고, 백성들의 생업에 점령군이 개입하지도 않았다.

약탈, 강압, 위협, 살인, 방화 따위는 해병 기마대가 북부 지대에서 활개를 치던 개전 초기를 제외하면 일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령군은 무엇을 도와주면 좋을지 물어보고,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도우려 애를 썼다.

거기다 점령군엔 신부와 수녀들이 딸려있었다. 그들은 조선 교구에서 서임 받은 조선인 신부와 수녀들이었다.

의무병과 의무관의 팔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색 완장을 채운 이후 천주교 조선교구와 조선 황실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특히 천주교 조선 교구에서 신부와 수녀들을 조선군 야전병원에 보내 봉사하자, 조선 황실에서 그 보답으로 각지에 천주교 성당을 짓는 것에 크게 자금 지원을 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한층 더 좋아졌다.

물론 종교 지도자로 국한하는 교황에 대한 조선 황실의 입장은 그대로였지만 천주교에 대한 입장은 상당히 부드러웠던 것이다.

그것이 대한제국군 해병대 야전병원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이역만리 떨어진 포르투갈까지 파견되는 원정군을 따라온 신부와 수녀들이 있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유럽에서 가톨릭 세력이 가장 강한 나라중 하나가 바로 포르투갈이었다. 그것도 정통 로마 가톨릭이다.

전파된 지 얼마 안 되는 조선만큼 정통과 가까운 가톨릭도 드물다. 물론 로마 가톨릭 수사들과 신부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니 로마 가톨릭과 가까울 수밖에.

그들이 포르투갈 백성들과 점령군인 대한제국군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 백성들에게는 그들의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재물을 밝히고 지독히 고압적이었던 포르투갈의 성직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신부들과 수녀들은 헌신적인 봉사자였다. 거친 음식에 거친 잠자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환자와 병사들, 그리고 포르투갈 백성들을 다독이는 것에 모든 것을 할애했다.

그런 모습에 감명 받은 포르투갈 백성들 중에서 조선인 신부가 천주교를 믿는 대한제국군 병사들을 위해 여는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이 생겼다.

본류를 따르고자 하는 조선인 신부의 미사에 많은 포르투갈 백성들이 감명을 받았다. 그로인해 조선인 신부가 주관하는 미사에 참여하는 포르투갈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썩어있던 고위 신부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던 몇몇 포르투갈 성직자들이 그런 조선인 신부와 함께 미사에 참여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어떤 한 도시에서는 아예 성당의 주임신부가 감명 받은 조선인 신부를 초청해 미사를 맡기는 경우까지 생겼다.

점령군 입장에서도 그런 조선인 신부들과 수녀들의 위상이 점령활동에 도움이 되었기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전선에 주둔하는 야전 군인들이 대량의 땔감을 보내왔으니 그 평가가 더 좋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111여단의 후방 점령지역이 가장 평화롭다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 소문처럼 한 밤의 도시와 마을들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런 후방의 평화로움과 달리 접경지대에서는 긴장감이 박 터지고 있었다.

111여단이 맡은 180리(약70Km) 거리의 경계지역 중 대규모 병력이 이동 가능한 길목은 모두 세 곳,

숲에 진지를 구축한 것은 그 세 곳의 길이 모두 통과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11여단은 10리(약 4Km)에 달하는 숲을 반동강이 내면서까지 진지를 구축했던 것이다.

나머지 담당 구역엔 10리마다 경계초소를 건설해 경계 병력을 투입했고, 유사시를 대비해 그 후방지역에 지원부대를 배치해 두었다.

그것을 위해 1개 단이 투입되어 있었다.

따라서 숲에 구축된 10리의 진지에 투입된 병력은 3개 단, 3천의 병력이었다.

숲이 가진 땅의 높낮이를 이용하여 2단으로 구성된 진지의 가장 상층부에는 포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예비대를 포함한 4개 단과 여단본부가 보유한 포까지 130문의 이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참호를 파내면서 나온 흙을 담아 마련한 흙주머니로 강화한 진지에 투입된 병사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1백M는 나무를 베어내 시야를 확보했다지만 그 이후는 그대로 숲이 남아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병사들의 긴장도를 올렸다.

숲에 대한 포격과 총격은 허락되지 않았다. 숲으로 들어간 3단 때문이었다.

숲 안쪽으로 깊게 들어간 3단은 나무 위에 은신처를 만들어 숨었다. 그렇게 3단이 숨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이 숨어있는 나무 밑을 한스의 용병대가 조용히 지나갔다.

얼굴과 손에 온통 검은 재를 발라 눈만 초롱초롱한 3단 병사들이 그렇게 아래를 지나가는 용병대를 지켜보았다.

충실한 무장을 갖추었든, 아니든 적군의 수가 1만에 달한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적군이 모두 지나가자 3단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나무에서 조용히 내려왔다. 그리고는 마치 뒤를 쫓듯 방금 지나간 적군의 뒤를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달빛이 없다는 것은 아군의 움직임을 적군의 시야에서 가려주기도 하지만 적군의 동태를 아군이 파악하는 것에도 영향을 준다.

더구나 대한제국군의 진지는 공터처럼 휑하니 비워진 벌목지가 끝나고 다시 숲이 시작되는 초입에 구축되어 숲의 그늘에 가려져있었다.

그것이 관측을 더 어렵게 했다.

결국 1백M에 달하는 벌목지는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함을 뜻했다. 이것을 위해 용병대원들은 빛을 반사하는 모든 철제 갑옷을 진지에 벗어두고 출전했다.

가죽 갑옷 위에도 재를 바르거나 진흙을 발라 빛 반사를 최대한 억제했다. 무기에도 천이나 가죽을 감아서 쇠가 밖으로 보이지 않게 했다.

그 상황에서 이리저리 풀을 꺾어 온몸을 치장한 용병대원들이 조심스럽게 벌목지로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구름이 달을 완벽하게 가려 감춰주고 있었다.

대한제국군이 시계 확보를 위해 나무를 베어냈다고는 하나 바닥에서 자라나는 수풀까지 어쩔 수 없었다. 시야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는 매번 베어내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라는 것이 존재했다.

더구나 나무가 베어져 나간 숲의 비옥한 토양의 양분을 혼자 빨아들이게 된 잡초들의 성장세가 놀랍도록 빨랐다.

따라서 자고 일어나면 자라나 있는 잡초의 특성상 사람 종아리 정도 까지는 언제나 자라있었다.

용병대가 그것을 이용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들의 바다가 기어서 이동하는 용병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감춰주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벌목지를 주시하고 있는 대한제국군 병사들 중 누구도 용병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실제로 벌목지를 기어가는 용병들의 입장에선 마치 적군 앞에 발가벗고 나서는 느낌이라 긴장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긴장감에 흔들려 작은 실수라도 나오는 날에는 야습은 실패한다.

그래서 한스는 벌목지를 기어가는 이들 속에는 에스파냐군의 신분으로 참여한 4천의 용병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숲 가장자리에서 대기하다가 스위스 용병대가 적진지의 코앞에서 일어나 돌격하는 순간 달려 나오도록 명령해 두었다.

그렇게 4천의 용병을 대기시킨 채 한스도 벌목지를 기어가는 용병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그런 스위스 용병들과 저만치 있을 대한제국군 진지를 긴장어린 시선으로 집중해 바라보느라 에스파냐 용병대는 자신들의 뒤로 검은 그림자들이 조용히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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