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방관자의 괴로움
델카로 제독이 지휘하는 에스파냐 별동함대는 먼 바다를 우회해서 비아나두카스텔루를 지나쳐 아랫부분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따라서 고속 기동을 통해 호세 백작의 본대와 조선군 함대가 교전하는 타이밍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무장상선들은 해당 항로를 제집 문턱 넘듯이 다녀본 이들로만 뽑았다.
그 덕에 예상보다 빠르고 기민하게 움직인 별동함대는 제때에 남쪽에서부터 조선함대를 향해 항진할 수 있는 위치를 취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순탄하다고 판단하던 그 순간 포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견시수로부터 본대가 공격당한다는 믿기지 않는 보고가 들려왔다.
직전에 견시수가 보고한 본대와 조선 함대의 거리를 생각하면 절대로 공격받을 수 없는 거리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델카로 제독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다.
“육지로 바짝 붙어서 그대로 종대로 밀고 올라가 적함들을 쪼개어 팬다.”
델카로 제독의 명령에 에스파냐 별동함대가 종대를 이루며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
함대의 우측 함선들이 거센 공격에 직면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변침을 명령한 호세 백작은 이내 기함을 포함한 함대가 방향을 틀어 좌측 사선 방향으로 진행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방향전환을 마치고나니 가깝게 다가온 육지가 보이면서 아차 싶었다. 추후 기동에서 제약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차피 조선군 함대도 전열을 구성한 채 정지 상태였다. 그러니 조금만 더 밀고 내려가면 에스파냐 함대도 조선 함대를 사거리에 넣고 전열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 완전히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위안을 삼는 순간이었다.
쐐애애애액.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소음을 이끌고 무언가가 날아든다고 느낀 순간.
콰쾅!
두 발의 작렬탄이 선수를 정확히 타격하며 폭발이 호세 백작의 기함 뱃머리를 휩쓸었다. 아울러 커다란 충격이 배 전체를 타고 울려 퍼졌다.
우지끈. 우당탕.
그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배가 순간적으로 뒤로 밀리고, 갑판 위의 선원들이 모조리 나동그라졌다. 선미루에 서 있던 호세 백작을 위시한 고위 사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화들짝 놀라 일어선 백작의 눈에 형편없이 부서진 선수부분이 보였다. 선수 상단은 완전히 날아갔지만 다행히 하부 선체는 무사했던지 침수되거나 배가 기우는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에 안도하는 순간 또다시 악마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쐐애애애액.
크게 확장되는 백작의 시선으로 기다란 포물선을 이끌며 기함으로 날아드는 포탄 두발이 보였다. 잠시 후, 그 두발이 부서진 선수 부분을 통해 배 안으로 들어갔다.
콰광!
거친 굉음과 동시에 백작은 몸이 떠오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호세 백작이 느낀 마지막 감각이 되어버렸다.
쿵!
어마어마한 굉음과 빛을 남기고 반쯤 바다위로 떠올랐던 에스파냐 본대의 기함이 그대로 폭발해 산산 조각이 나버렸다.
기함과 비슷한 일들이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피하고 자시고할 시간적 여유 따위는 에스파냐 함대에 주어지지 않았다. 한발만 맞아도 피격부위가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재수 없이 상갑판에 포탄이 떨어진 경우엔 참혹함 그 자체였다. 상부갑판을 휩쓸고 하갑판까지 번져나간 폭발화염이 선원들을 새카맣게 태워 죽여 버렸던 것이다.
포탄 안에 든 인화물질이 2차 폭발을 일으키며 폭발화염을 사방으로 확산시켰기 때문이다.
목선(木船)에 대한 9치 작렬탄의 파괴력은 치명적이고, 악마적이었다. 맞기만 하면 치명상을 당했다. 여기저기서 기우는 함선들 사이로 폭발을 일으키며 부서져나가는 배들로 가득했다.
수없는 훈련을 거치며 포격술을 다져온 이순신 함대의 포격은 무섭도록 정확했고, 사악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60척의 에스파냐 본대의 함선들이 일렬횡대를 내려온 탓에 피해를 입지 않은 배가 단 한척도 없었다.
그들에게 50척에 달하는 주몽급 순양함들의 포격이 연이어 날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죽음의 낫에 걸려든 에스파냐 본대에 일장함포를 퍼붓고 있던 이순신 함대의 기함 함교로 망루에서 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적 별동대 추정함대 남쪽에서 접근 중. 척수 40척. 거리 1만.”
견시수의 보고에 이순신의 감상평은 짧고 간단했다.
“느려.”
“어떻게 주포 분할할까요?”
부장의 물음에 이순신이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를 두들길 때는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 좋다. 적당하다고 느슨해지는 순간 다 죽어가는 놈이 목덜미를 물자고 달려들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주포는 적 본대를 모조리 격침시킬 때까지 그대로 둔다.”
“하면 적 별동대는 어찌 합니까?”
“주포를 못 쓰면 부포로 때리면 되겠지.”
담담한 이순신의 답에 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부포의 사거리는 주포에 비해 짧습니다.”
“그래봐야 5백보다. 그것으로도 충분해. 이 세상 그 어디보다 뛰어난 우리 조선의 화포 기술력을 믿도록.”
자신의 말에도 부관의 표정에서는 걱정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본 이순신의 눈매가 슬쩍 찌푸려졌다. 누가 생각날 정도로 질문도 많고 이해력도 빠른 편이었지만 이 어린 부장은 걱정이 너무 많았다.
손일원 이후, 이순신은 임관한지 얼마 안 되는 젊은 무관들을 부장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오래도록 붙잡고 있지도 않았다.
적당한 때가 되면 놓아 보내고 새로운 부장을 맞았기 때문이다.
변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고, 그 과정을 통해 이순신은 조금 넓은 시야를 갖춘 장수들이 조선군에 한 명이라도 많아지길 바랐을 뿐이다.
그로인해 조선군에는 이순신의 제자라 주장하는 장수들이 몇 있었다. 그들끼리 서신도 주고받으며 지들끼리 선후배를 따진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순신은 그 사태를 만들어낸 주범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실제로 부산포에서 출항 직전에 인사를 왔던 손일원이 부장에게 ‘스승님’ 보필 잘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보았고, 군기가 잔뜩 들어간 부장이 ‘알겠습니다. 대사형.’이라며 답하는 것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모습이 다시 떠오른 이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부장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귀관의 대사형에게 이야기 좀 해놔야겠군.”
농 삼아 던진 이순신의 그 말에 부장의 표정과 자세에 대번에 군기가 바짝 들어갔다.
“시정하겠습니다!”
얼마나 큰소리로 외쳤던지 함교 출입문을 경비하던 육전대원이 놀란 얼굴로 일권총까지 뽑아들고 뛰어들어 왔을 정도였다.
난감한 얼굴로 육전대원을 물린 이순신이 명령했다.
“부장의 시정의지는 알았으니 명령을 본함 포격 지휘소와 각함에 전달하게.”
“예? 아! 예. 스승님. 아니, 원수님!”
사령관 또는 장군으로 부르던 호칭조차 바뀐 부장의 음성이 확성관을 타고 하갑판의 포격지휘소로 전달되었다.
“적 별동대 대응은 부포로!”
곧바로 포술장의 복창이 들려오고, 명령을 전달받은 좌현의 부포들이 일제히 선회해서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에스파냐 별동대를 겨누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부장의 복창을 받은 신호수들에 의해 함대 각함에 명령이 전파되자 기함처럼 모든 순양함의 부포들이 남쪽으로 돌려졌다.
부포인 함포형 삼포는 3치(약90mm) 구경으로 주포와 마찬가지로 장약, 탄두 일체형의 금속탄피형 작렬탄을 쓴다.
주포에 비해 작다지만 시험사격에서 단 5발로 일반적인 범선구조를 가진 조선무역선을 완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포를 주몽급 순양함은 각 측면에 4문씩 장비하고 있었다.
“거리 5천(약9Km)!”
견시수의 보고에 이순신이 명령했다.
“표적획득 시 자율 사격을 허가한다.”
에스파냐 별동대가 육지 쪽에 바짝 붙어 일렬종대로 올라오는 탓에 각함에서의 사거리가 다르게 나올 것이기 때문에 취해진 조처였다.
부장을 통해 이순신의 명령이 기함과 각함에 전해지고 얼마 후, 견시수의 고함 같은 보고가 확성관을 타고 함교에 전해졌다.
“거리 3천5백(약6.3Km)!”
그 목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사거리를 확보한 부포들의 포격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쾅.
자신들이 공격받을 거라 예상하지 못한 거리에서부터 포탄이 날아오자 칼레도 제독의 에스파냐 별동함대는 당황했다.
더구나 맞는 순간 폭발하는 포탄으로 인해 포격을 받은 함선들의 선체 파손이 심각했다. 거기다 피탄 부위의 화재가 급속도로 배전체로 번져나갔다.
폭발탄을 사용하는 조선군과의 교전이었기에 선체에 물을 잔뜩 먹여놓았음에도 포탄에 담겨있는 인화물질로 인해 거침없이 불길이 번졌다.
피해를 견디지 못한 함선들이 좌선회하며 바다 쪽으로 나가려 했지만 조선군의 포탄들은 그런 에스파냐의 함선들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때렸다.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유폭을 일으켜 산산이 부서지는 함선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배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는 배들까지 늘어갔다.
하지만 조선군 함대까지는 아직도 2.5Km나 남아있었다. 에스파냐 함선들이 장비한 그 어떤 포도 닿지 못하는 거리였다.
압박을 이기지 못한 일부 무장상선들이 함렬을 이탈해 도주를 택했다. 조선군 부포들이 그런 에스파냐 함선들에 대한 포격을 중단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무장상선들이 함렬을 이탈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렇게 도주하는 배를 놓아두고 악착같이 접근해 오는 배들에 이순신 함대 부포의 포격이 집중되었다.
포격 조밀도가 높아지고 당연하게 함렬을 유지하던 배들의 피해는 폭증했다. 그 와중에 함렬 가운데 위치해 있던 칼레도 제독의 기함이 포격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굉음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
기함마저 폭발하자 망설이던 무장상선들마저 뱃머리를 돌려 도주에 동참했다. 문제는 함렬이 붕궤되었다고 판단한 부포들이 도주하는 배들을 다시 포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에스파냐 별동함대에서 조선군 순양함들의 사거리 밖으로 무사히 살아서 도주한 배는 5척에 불과했다.
이순신은 그들조차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마침 에스파냐 함대의 본대도 모조리 격침 된 것을 확인한 이순신이 낫이 시작되는 부분에 위치한 2척의 순양함에게 추적격멸을 명령했다.
공교롭게도 그 명령을 받은 순양함들 중에 손일원의 027함이 끼어있었다. 신호수에 의해 기함의 명령을 확인한 손일원이 명령했다.
“좌현전타. 기관 전속.”
손일원의 명령을 복창한 부장에 의해 함장의 명령이 확성관을 타고 기관실로 전달되었다. 그것을 확인한 기관장이 기관병들에게 외쳤다.
“증기사출구 모두열고, 석탄 더 넣어!”
곧바로 기관병들이 분주히 움직이자 집채만 한 3천 마력 증기기관 4개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몽급 순양함의 최대속도는 20노트다. 증기기관 치고는 가속도 빨라서 정지 상태에서 15분이면 최대속도에 도달한다.
그에 반해 도주하는 에스파냐 무장상선들은 잔잔한 바람에다 돛마저 손상을 입어서 9노트 이상을 내는 배들이 없었다.
그들을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한 주몽급 순양함 2척이 추격해 나가기 시작했다.
도주와 추격은 겨우 30분 만에 끝이 났다. 에스파냐 무장상선들의 입장에서는 20노트라는, 이 시대에서는 단 한 번도 마주쳐 보지 못한 고속으로 달려온 주몽급 순양함들의 추격을 따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7Km에 달하는 거리가 떨어졌음에도 조선군 순양함의 포격은 정확했고, 무시무시했다.
단 몇 발만에 명중탄을 내더니 곧바로 포격을 퍼부어 도주하던 함선들을 하나, 하나 모두 격침시켜버렸던 것이다.
에스파냐 본대와의 전투 시작에서부터 별동대의 격파, 도주함의 격멸까지 한 시간 만에 끝난 해전의 부산물들이 비아나두카스텔루 앞바다에 가득 찼다.
온 바다에 에스파냐 함대의 잔해와 시신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사이에서 생존자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었지만 순양함에 외부인을 탑승이 금지되어 있었기에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군 장병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