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죽음의 낫
정방을 주시하고 있던 이순신에게서 짧고 묵직한 음성이 울려나왔다.
“에스파냐 함대를 적으로 규정한다.”
이순신의 명을 부장이 각 확성관에 대고 큰소리로 복창했다. 신호수가 함교 위 망루와 연결된 신호 깃봉에 적과 전투중임을 뜻하는 삼각형 붉은 깃발을 올렸다.
이로써 전함대가 상대가 적으로 규정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
이 당시 에스파냐의 함대를 지휘하고 있던 것은 그 유명한 산타크루즈 후작의 후손인 호세 백작이란 자였다.
그는 칼레 해전의 패배이후 하루가 다르게 세력이 축소되어가는 에스파냐와 에스파야 해군을 다시 일으킬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의 손에 펠리페 3세가 쥐어준 함선의 수는 1백 척으로, 전열함 10척과 갤리온 20척, 그리고 크고 작은 무장상선 70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호세 백작은 무작정 포르투갈 바다로 들어가 조선군 함대와 교전할 생각은 없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문투성이인 조선군 함대를 상대하면서 무작정 들이밀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포르투갈 바다와 인접한 에스파냐의 라코루냐(A Coruña)에 머물면서 포르투갈에서 수집되는 정보를 분석했다.
그러는 와중에 조선군의 악마배들이 비아나두카스텔루 앞바다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움직였다.
돛 없이 검은 악마의 연기를 뿜어내며 움직인다는 조선의 악마배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각양각색의 소문이 파다한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호세 백작은 그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뱃사람들의 소문을 전부 다 믿으면 수를 셀 수조차 없는 수많은 종류의 바다괴물이 사는 바다로는 나갈 수 없다.
수많은 선장들이 그렇듯 호세 백작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다.
그렇다고 소문을 완전히 무시하는 잘못도 벌이지 않았다. 소문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 악마배는 아닐지라도 그에 준하는 무엇인가는 있을 테니까.
따라서 호세 백작도 나름의 한수를 준비했다. 상대가 악마의 힘으로 움직인다면 이쪽은 신의 군대가 될 준비를 갖춘 것이다.
호세 백작은 에스파냐를 떠날 때 모든 함선에 사제들을 태웠다.
에스파냐가 가톨릭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와중이었기에 사제들의 호응을 얻기는 비교적 쉬웠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사제들이 축원을 하고 악마의 군대와 싸움을 독려하면 선원들의 두려움은 줄어들고 사기는 올라갈 테니까.
거기다 또 하나, 호세 백작은 속도가 빠른 무장 상선 40척을 별동대로 삼아 먼 바다를 우회해 비아나두카스텔루 앞바다의 좌측 뒤편에서 돌출하도록 했다.
한창 호세의 본대와 교전 중일 조선군 함선의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심정일 터였다.
그것을 위해서 호세 백작은 정교하게 본대의 속도를 조절했다. 별동대가 움직일 시간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칫 시간이 맞지 않으면 교전이 끝난 후에나 도착하게 될 테니까.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승리는 자신의 에스파냐 함대에 있을 것이라 호세 백작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자신들이 보유한 함포는 조선의 함포와 같은 초선포였기 때문이다.
함대함 포격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거리다. 그리고 포의 파괴력, 그러니까 구경이다.
초선포의 경우 사거리는 긴데 반해 구경이 5인치(약127mm)로 작아서 파괴력이 부족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18파운드(약8Kg)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잉글랜드가 함포전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칼레 해전 직후만 해도 유럽의 함대함 결전에서 장거리 포격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장거리 포격으로는 상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없다는 것이 그간의 결과로 증명된 이후 유럽은 근거리 포격전이 대세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최근 추세는 어떻게 하든 1백M이내로 접근해서 난타전을 벌이는 것을 선호한다. 상대에게 유효한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거리는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근거리 포격전 시대로 접어들면서 대구경 중량포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에게 보다 빨리 치명적인 파괴력을 안겨주기 위해서 포탄을 키우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최근 들어 잉글랜드 해군을 중심으로 소구경의 포를 다량 장비하여 대량 포격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대구경 중량포가 파괴력 면에서는 단연 최고로 평가받고 있었다.
따라서 현재 유럽의 함대교전에서 사거리는 그다지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 기류를 따라 에스파냐 해군도 대구경 중량포인 42파운드(약19Kg)포도 탑재했다. 사용화약이 초선포에 비해 훨씬 많이 들기는 하지만 구경이 7인치(약178mm)로 크고, 사거리도 5백M에 달하는 42파운드포의 파괴력은 초선포의 몇 배에 달했다.
물론 정확도라는 면에서도 초선포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어차피 함대함 포격은 길어야 2백M, 짧은 경우 수십M에서도 벌어지니 큰 상관은 없었다.
따라서 호세 백작은 이번 전투에서 조선군 함대를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괴력이 적은 초선포로 무장했을 조선의 함대에 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군 함대 발견! 육지를 우측으로 끼고 일렬횡대로 북상 중!”
돛대 위 망루에 올라가 있던 견시수의 고함에 호세 백작의 입가로 미소가 깃들었다.
정보대로 조선군 함대가 비아나두카스텔루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준비! 우리도 일렬횡대를 갖춰 맞서 항진한다.”
호세 백작의 명령이 에스파냐 함대로 전달되면서 그들도 좌측에 육지를 가까이 두고 일렬횡대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한데 잠시 후.
“도, 돛이 없다! 적함에 돛이 없습니다. 검은 연기를 내뿜습니다!”
견시수의 고함소리에 눈가를 찌푸린 호세 백작이 서둘러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에스파냐 해군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상선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 편리한 물건도 조선상단을 통해 유럽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니 조선의 물건이 조선의 함대를 공격하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셈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며 망원경에 눈을 바짝 가져다댄 호세 백작의 눈에 수평선 너머로 검은 연기가 보였다.
아직 배는 보이지 않아 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소문처럼 검은 연기는 나는 것이 확실했다.
망원경을 눈에서 뗀 호세 백작이 곁에 서 있는 부관에게 명령했다.
“선원들이 겁을 먹지 않도록 사제들을 배위로 불러올려 축원을 시작하게. 악마의 힘에 맞서는 우리는 용사라고 말이야. 나름대로 효과가 있겠지.”
“예. 백작님.”
명령을 받은 부관이 움직이고, 이내 기함을 비롯해 전 에스파냐의 함선들 위에서 사제들이 선원들을 축원하기 시작했다.
그때 견시수의 고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적함대 거리 10Km!”
*****
서로를 향해 다가갈수록 함교의 긴장도가 올라갔다. 그런 상황에서 견시수의 음성이 다시 확성관을 타고 울렸다.
“적함대 거리 5천(약9Km)!”
견시수의 음성과 거의 동시에 육안으로 적함대가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함교 투과창을 통해 주시하고 있던 이순신의 명이 떨어졌다.
“기동 시작!”
대기하고 있던 신호수의 수신호에 함교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나팔수가 고동을 잡고 길게 불었다. 아울러 깃발수가 전투개시를 뜻하는 붉은 사각형 깃발 두개를 올렸다.
이후 좌측단에서 운항 중이던 기함을 시작으로 이순신 함대가 좌측 사선방향으로 항로를 변침했다.
이쪽의 기동을 확인했는지 에스파냐 함대도 이내 마주 기동을 펼쳤다. 범선의 경우 전열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평행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마주 오는 함선들은 사선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전타하여 평행을 맞추는 것이 범선들의 일반적인 기동 방식이다.
다만 한쪽이 육지로 막혀있으니 사선방향으로 이동할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순신의 의도대로 에스파냐 함대도 자신들의 우측, 그러니까 이순신 함대와 동일한 방향으로 사선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졌다.
“함대 전타! 일자 종대.”
이순신의 명을 부장이 복창하고 곧바로 신호수가 깃발과 북을 쳐 알리자 가장 좌측에 위치한 기함을 따라 모든 함선이 좌측으로 전타하여 일렬종대 진형을 구성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견시수의 외침이 확성관을 타고 울렸다.
“거리 4천(약7.2Km)!”
주몽급 순양함이 장비한 일장함포의 사거리 안에 적함대가 들어온 것이다.
“함포 조준.”
이순신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장의 복창이 이어지고 이내 신호수들이 분주하게 그 명을 전했다. 이내 기함을 시작으로 이순신 함대의 순양함 50척의 일장함포들이 선회하며 우측으로 돌려졌다.
하지만 아직 자신들이 장비한 포들의 사거리에 훨씬 미치지 못한 에스파냐 함대는 사선 항해를 계속 이어갔다.
이들은 함포 사거리에 접어들면 전타하여 수평을 맞출 계획이었다.
한데 그 상황에서 조선군 함대에 변화가 생겼다.
“니은자 기동 개시! 낫을 펼친다.”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지자 낫 부분을 맡은 순양함 10척이 기함을 따라 빠른 속도로 우측으로 선회하면서 펼쳐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다 좌측 선두의 기함이 속도를 올리면서 옆 동료함을 추월해나갔다. 이것은 마치 카드를 밀어 올리는 것처럼 번져서 10척의 순양함들이 모두 우측의 동료함을 추월해 앞으로 나서는 형상이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니은자 대형이 갖춰졌다.
조선군의 이해 못할 기동을 바라보는 호세 백작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아군 함대의 진로를 방해하겠다는 뜻인가?”
“어떻게······. 선회할까요?”
부관의 물음에 고심하던 호세 백작이 결심을 굳히고 말했다.
“우측 함선들에게 돌파하라고 명령······.”
호세 백작의 명령은 이어지지 못했다.
쿠궁.
이순신의 명령을 받은 기함과 낫 부분을 맡은 함선들에서 일장함포가 발사된 것이다.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들려온 커다란 폭음에 놀란 호세 백작의 눈으로 자신의 함대 맨 우측함선들의 주변으로 포탄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 와중에 직격당한 함선 두 척에서 화염과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직격당한 배중 한척이 물위로 튕겨 올라오는가 싶더니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외벽을 부순 작렬탄의 화염이 전투를 대비해 포갑판에 잔뜩 꺼내놓은 화약통을 유폭 시킨 것이었다.
그 어마어마한 광경 사이로 연이어 우측 함선들을 향해 쏟아지는 포격이 보였다. 저 상태로 돌파를 명령했다간 함대 우측 전부가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선회! 좌선회 하라!”
호세 백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내 부관을 통해 명령이 전파된 에스파냐 함대가 급히 방향을 바꿔 좌측 사선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것을 확인한 이순신의 입가로 잔인한 미소가 깃들고.
“전함 방포!”
이순신의 명을 부장이 복창했다.
“전 함선 방포하랍신다!”
이내 명령을 전달받은 이순신 함대의 모든 일장함포가 발사되었다.
쿠구구쿵!
비아나두카스텔루 앞바다가 온통 이순신 함대의 일장함포 포격소리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