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76화 (176/325)

제176화. 리스본 전투

포르투갈이 리스본에 2만이 넘는 지상병력을 집결 시켰을 때 이순신 함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차피 항구와 해안지대를 비운 채 내륙으로 물러난 포르투갈군은 해안 지대에 떨어지는 포격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 함대는 리스본 항구를 포격함에 있어 다른 항구와는 다른 형태를 취했다.

항구 인근의 건물을 포격하여 무너트리는 것은 같았지만 철저하게 접안시설은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 함대가 포르투갈 남부와 서부 일대의 해안 도시들을 포격하고, 포르투갈 함대와의 결전을 통한 전투를 지속하는 동안 격차를 줄인 조선의 범선 함대들이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일 이내에 2진을 구성하고 있는 71기동함대와 11수송함대가 도착한다는 연락을 선도함으로부터 받은 이순신 함대가 보다 효율적인 상륙을 위해 리스본의 접안 시설들을 그대로 둔 것이었다.

그렇게 선도함의 연락이 닿은 지 정확히 이틀 후, 71기동함대의 호위 하에 제11 수송함대가 리스본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2진을 구성한 함대는 리스본에 접근하자마자 곧바로 상륙작전으로 돌입했다. 이순신 함대가 비운 자리를 통해 리스본 항구로 바짝 붙은 제71기동함대가 상륙포격을 퍼부었다.

모조리 무너진 잔해위에 가해진 포격은 혹시라도 건물 잔해에 은폐하고 있을지 모를 포르투갈군을 격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상륙포격이 가해진 후 수송함대의 함선들이 접안시설에 붙어 병력을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해병대 제101여단과 제102여단으로 구성된 11수송함대의 탑승병력들이 마침내 포르투갈의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이 두 여단에 맡겨진 임무는 리스본 항구에 대한 상륙거점 확보였다.

도처에 진지를 구성하고 포를 배치하는 등 분주히 움직이는 대한제국 해병대를 멀리서 관측하면서도 포르투갈군은 접근하지 않았다.

여전히 리스본 항구 외곽에 정박해 있는 악마배들의 장거리 포격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군이 주저하는 사이 3진이 도착했다. 자체 호위함들을 거느린 13수송함대가 도착한 것이다.

이들마저 접안시설에 붙어 병력을 하선시켰다.

103, 104여단이 상륙하고 그들이 사용할 보급품들이 대량 하선되었다.

작전 계획에 의거하여 13수송함대가 상륙을 마치자 식수와 식량 등 기본 보급을 마친 71기동함대의 호송 하에 11수송함대와 13수송함대가 귀환길에 올랐다.

이들은 대량의 보급품을 싣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들이 돌아간 다음날, 본대를 이루는 30개의 조선 무역선단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수송단이 리스본에 도착했다.

자그마치 3백 척에 달하는 조선무역선에서 9만의 병력이 상륙하고, 대량의 보급품이 리스본 항구에 하역되기 시작했다.

온 리스본 항구가 대한제국 해병대 병력으로 북적거렸다. 이로써 11만의 병력을 확보한 조선군이 곧바로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조선군 및 제국군 편제 상 해병대 특유의 편제인 여단이 보유하는 이포의 수는 150문이다. 각 ‘단’ 포병대가 20문씩을 보유하고, 여단 포병대가 50문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대’ 단위 지원화기로 편성된 구포의 경우는 각 대에 2문씩, 또 여단 포병대에 20문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여단 전체로 보면 120문이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분대 지원화기인 현식총의 경우엔 2백 개 분대에 한정씩 배치되어 있으니 2백문의 현식총을 보유한 셈이었다.

선봉은 처음 리스본 항구에 발을 디딘 101여단과 102여단이 섰다.

양 여단이 보유한 3백문의 이포가 불을 뿜는 가운데 ‘대’ 단위로 산개한 해병대가 전진을 시작했다. 전투 전개 방식이 마치 현대전과 비슷했다.

이포를 통한 화력전으로 적의 공격의지를 말살한 가운데 보병이 구포와 현식총의 지원을 받으며 착실하게 전진했다.

과거 실제역사에서처럼 소총병들끼리 라인 베틀을 벌여 다수의 희생자를 내는 형태의 전투방식은 아예 조선군, 나아가 조선군에게 훈련받은 대한제국군에는 없었다.

약간의 화포, 대량의 화승총병을 동원해두고 있던 포르투갈군은 마땅한 대응 전략이 없어 힘없이 밀리고 있었다.

아무리 구시대적 군사지식을 가진 포르투갈 지휘관들이었지만 이포의 포격을 통해 무지막지하게 떨어지는 폭발탄의 세려 아래로 보병을 진격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연속적으로 퇴각한 끝에 왕궁까지 밀리자 결국 포르투갈군이 다수의 피해를 각오하고 포탄이 작렬하는 전방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산탄과 화염탄이 반씩 섞여 떨어지는 폭발탄 세례 속으로 진입한 포르투갈군이 사력을 다해 뛰었다. 그들이 진입하자 오히려 조선군의 포격이 멈추었다.

그것에 환호하며 달리던 포르투갈군이 조선군 포병대로부터 1천보(약1천8백M), 조선군 최전선으로부터 5백보(약9백M) 거리에 도달했을 때였다.

쐐애애애액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이끌고 날아온 포탄들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팡.

작은 폭음들이 연달아 들리고 이내.

쏴아아아.

조란탄을 대신해 만들어졌던 확산탄이다.

과거 몽골기마대를 상대로 맹위를 떨쳤던 대인살상무기가 돌격중인 포르투갈 보병대를 향해 발사된 것이다.

한발의 확산탄에 든 쇳조각의 수는 많게는 40개에서 적게는 30개 정도다. 3백문의 이포에서 발사된 3백발의 확산탄이 터지면서 일거에 전방으로 뿌려진 쇳조각의 개수가 1만개를 훌쩍 넘었다.

그것들이 2천 남짓한 포르투갈 선봉대를 헤집고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선봉대 2천이 동시에 뒤로 튕겨나가듯 나동그라지는 모습은 전율, 그 자체였다.

뒤따라오던 포르투갈 병사들이 황급히 되돌아 도주했다. 그런 병사들을 독려해야 할 장교들까지 놀라서 함께 도주했으니 포르투갈군의 놀람은 충분히 설명될 것이었다.

조선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포르투갈군이 결국 리스본을 내주고 물러섰다.

왕궁은 물론이고, 수도인 리스본을 내주고 물러섰다는 것에 포르투갈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이 당시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연합을 이루며 에스파냐와 한 군주를 모시고 있었다. 당연히 에스파냐가 이 전쟁에 발을 담갔다.

우선 잉글랜드와의 전쟁 이후 가장 많은 함선이 동원되어 1백 척의 대규모 함대가 결성되었다. 상륙군을 태운 것이 아닌 순수 해전을 상정한 함대였다.

이 함대가 에스파냐 북부 항구인 산탄데르에 집결하여 출항 한 것은 포르투갈이 리스본을 빼앗긴지 3일 후였다.

아울러 에스파냐는 3만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포르투갈로 진입시켰다. 또한 포르투갈 전역에서 마구잡이식 징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럽은 조선의 포르투갈 침공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몇 백, 또는 몇 천이 아니라 만 단위가 넘어가는 대군을 투입했다는 것에도 놀랐다.

오죽하면 몇몇 나라는 십만이 넘는다는 포르투갈의 이야기를 엄살이라 치부했을 정도였다. 당시 소국들이 많았던 유럽의 특성상 그 정도 병력을 모으지 못하는 나라도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과 유럽의 거리 상 본격적인 전투라는 건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나라들이 많아서 전쟁 초기만 해도 정확하게 조선의 포르투갈 침공의 영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이라는 나라의 저력을 실감했던 잉글랜드는 재빨리 이 사태의 위험성을 인식했다.

더구나 침공 당사자가 단순이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최근 들어 대한제국의 정보를 취합한 잉글랜드는 이 제국이 자그마치 12개 나라로 이루어진 동맹체이며 그 중심에 조선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였다.

더구나 아시아의 맹주라고 확신했던 명이 조선의 힘에 눌려 하나의 제후국으로 참가했다는 것만으로도 잉글랜드가 충격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이 상황에서 잉글랜드 정부와 왕실은 어떻게 반응할지를 두고 상당한 논쟁을 벌였다.

바다건너 이야기인데 굳이 관심을 둘 필요가 있냐는 방관파에서 부터 시작해서 아시아의 유럽침공이니 포르투갈을 도와야 한다는 유럽 옹호파와 조선을 도와 포르투갈을 이참에 갈아엎자는 적극 개입파가 각자의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잉글랜드 의회는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조선을 도와 포르투갈을 갈아엎자는데 동의했다.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었다.

포르투갈이 일궈놓은 동방 무역거점들을 먹어치울 수 있을 거란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돈이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선과 나누어먹어야 하겠지만 하나도 갖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제임스 1세는 이 전쟁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합하는 것에 오히려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제임스 1세에게 잉글랜드 의회는 강력하게 전쟁 개입을 요구했다. 당장 돈이 되는 일을 왕이 소홀히 한다는 볼멘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잉글랜드 저변에 에스파냐에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국왕이 저버리려 한다는 소문까지 무성하게 나돌았다.

결국 제임스 1세가 ‘조선의 동의가 있다면’ 이라는 조건을 걸어 개입을 허락했다. 당장 잉글랜드 의회에서 조선파로 통하는 애덤스 백작이 배를 타고 조선군이 진주한 리스본으로 향했다.

에스파냐와 접경한 프랑스는 일단 관망세를 취했다. 아직 조선군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와의 국경을 넘지도 않았는데 위협론을 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저마다 사태를 평가하고 유심히 지켜보는 가운데 5진인 12수송함대가 72기동함대의 엄호 하에 포르투갈의 북부 해변도시인 포르토(Porto)에 상륙했다.

온통 리스본으로 신경이 쏠려있던 포르투갈로써는 불의의 일격이었던 셈이다.

이들을 내려놓은 72기동함대와 12수송함대는 곧바로 철수했다. 이들도 조선으로 돌아가 물자수송에 전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르토에 상륙한 병력은 추가적인 보급 없이 작전을 전개해야 했다.

사실 포르토에 상륙한 부대는 대한제국 해병대에서도 특수한 이들이었다. 전원이 해병대 훈병원에서 기마전투 능력이 출중한 자들로만 선발해 구성한 110여단과 120여단, 그리고 시크교도들로만 구성된 199시크 수색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포르토를 노린 것도 포르투갈 근위기병대를 위한 목장이 이곳에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시크 수색단을 선봉에 세워 목장을 급습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노획한 말이 겨우 2백 마리 정도였다. 애초에 포르투갈이 기병대를 크게 키우지 않는 나라였다는 것을 미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

사전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말을 구해 기마대로 새롭게 구축된 110, 120여단이 특유의 빠른 기동으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수월한 기마 작전을 위해 이들은 특별히 기마총까지 보급되어 있었다. 그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작전이 처음부터 어긋난 것이다.

110여단은 후금과 북원, 할하 출신들로 이루어져있었고, 120여단은 준가르와 위구르, 그리고 카자흐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모조리 유목민족 출신들이다보니 호전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다 한발 들인 이들이 시크 수색단이었다. 호전적이기는 이들이 한수 위였다.

지휘관들도 모조리 해당 민족 출신들이다. 조선군 지휘관들을 이곳에 배치되지 않은 것은 그 종족 본연의 광기를 마음껏 펼쳐보라는 일종의 배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대로 한번 당해보라는 복수심이었지만······. 여하간 상황이 이렇다보니 작전 전환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말을 구해 기마대로 전환, 일대를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작전을 위해 약탈과 무자비한 살인 방화가 허가되어 있는 유일한 부대였다.

결국 두 여단장들과 시크 수색단 단장이 모여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말을 구한다.”

방법은 간단했다.

‘하던 대로’

원하는 것이 생기면 그것을 구할 때까지 인근 부락이나 부족을 약탈하던 그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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