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75화 (175/325)

제175화. 개전(開戰)

광무항에는 광무항의 석탄 확보 계획 외에 마다가스카르와 서아프리카 지역에 별도의 보급기지를 건설하라는 명이 내려와 있었다.

조선 본국에서 지목한 지역은 마다가스카르의 북단에 위치한 디에고수아레스(현재의 안치라나나)와 졸로프 왕국(현재의 세네갈)이 자리한 지역의 다카르였다.

이렇다 할 지배세력이 없이 소수 부족만 기거하고 있던 디에고수아레스에 대한 접수는 수월했다. 인근에 거주하는 부족들은 조선군이 푼 곡식에 꽤나 만족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다카르에 대한 기지 건설도 초기에는 수월하게 진행되는 듯싶었다.

가능한 무력보다는 우선 다른 부족, 또는 국가와의 거래를 통해 원하는 바를 취하는 조선의 처리 방식에다 일찌감치 유럽의 교역상들과 거래로 이득을 취하는 방법을 깨달은 졸로프 왕국의 특성상 거래를 통해 쉽게 합의가 성사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협상이 중간에 틀어져 버렸다. 이미 졸로프 왕국과 상당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훼방을 놓은 것이다.

결국 시간에 쫓겼던 광무항 주둔군이 무력사용을 결정했다.

주둔함대가 동원되고 주둔군의 절반인 5개 대 5백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3척의 해모수급 전열함과 5척의 왕건급 호위함으로 구성된 212원정전대가 졸로프 왕국의 해상을 봉쇄했다.

초기에 10척으로 이루어진 포르투갈 함대의 저항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카르 앞바다에서 조선군과의 교전 끝에 수장되었다.

아직까지 폭발탄을 보유하지 못한 포르투갈 함대는 조선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자신들이 앞바다에서 포르투갈의 함대가 격침되는 것을 목격한 졸로프 왕국은 당황했다. 활과 선상전투를 장기로 삼는 자신들의 함대는 내보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결국 졸로프 왕국은 조선의 기지건설을 수용했다.

조차지역은 다카르로 해당 지역을 조선이 무한정 사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 조약도 맺었다. 그 대가로 조선은 바다의 봉쇄를 풀고, 졸로프 왕국을 무력으로 침공하지 않기로 약조하였다.

포르투갈 상관에 머무는 포르투갈 대사의 항의가 있었지만 포르투갈보다 조선이 더 두려웠던 졸로프 왕국의 국왕은 못들은 척 조약을 맺어버렸다.

조약이 마무리되자 함대의 수병들과 육군 병력을 동원해 다카르에 요새와 창고 건설이 시작되었다.

왕건급 호위함을 보내 건설 시작을 알려 석탄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광무항에 배치된 10척의 조선무역선이 다반에서 다카르까지 석탄을 수송하기 시작한 것이다.

졸로프 왕국과의 문제가 막 해결되던 시점은 이순신 함대가 사라왁에서 석탄을 채우고 막 출발하던 시기였다.

며칠간을 석탄 보급과 사라왁 문제로 일정이 지체되었지만 범선들로 구성된 2진은 여전히 포라중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거의 5일을 까먹은 이순신 함대는 곧바로 출항했다.

마드라스까지 7천6백리(약3천Km)가 넘는 거리를 이순신 함대는 7일 만에 주파했다. 항상 최고 속도를 낼 수 없는 범선들로써는 이룰 수 없는 기록이었다.

마드라스에서 석탄과 물자 보급을 마친 이순신 함대는 다시 곧바로 마다가스카르의 최북단 디에고수아레스에 건설된 조선군 보급기지를 향해 항진했다.

1만2천7백리(약5천Km)에 달하는 거리로 주몽급 순양함의 최대항속거리인 3천 해리(5천5백Km)에 가까운 장거리 항해였다.

12일에 걸쳐 이동한 함대가 디에고수아레스 기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인근 원주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 함대에 대한 보급이 이루어졌다.

갑작스런 전투 등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수병들의 상륙은 허락되지 않았다. 전투를 앞두고 풍토병을 앓을지 모른다는 우려에 기항지에 대한 상륙이 금지된 까닭이었다.

다시금 석탄과 물자의 보급만 이루어진 이순신 함대가 광무항을 향해 출항했다. 순항속도로 광무항에 도착한 이순신 함대는 보급을 수행항 후, 곧바로 다카르를 향해 출항했다.

이시기 조선에서는 조선 내 근거리 화물수송에 사용되던 5백 척의 조선무역선들 중 2백 척이 동원되어 각종 보급품 20만 톤을 적재한 채 부산포를 떠났다.

이 보급품들 중에는 5만 톤의 석탄도 섞여 있었다.

제1보급함대라 명명된 이 함대의 호송을 위해 막 재건된 나고야와 남진의 함대가 동원되었다. 조선 해군 교육단에 의해 조선식으로 훈련된 이 두 함대는 왕건급 호위함의 후기형으로 설계된 왕무급 호위함 10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장 115척(약35M), 전폭 25척(약8M), 3개의 주돛에 선수돛을 장비한 왕무급 호위함은 왕건급과 마찬가지로 1개의 포갑판을 포함한 3층 구조의 배였다.

무장은 2문의 선수포와 2문의 선미포를 포함 34문의 이포와 상갑판에 설치된 4문의 구포를 갖추었다. 포탄은 폭발탄과 비격진천뢰가 보급되어 있었다.

제후국들의 함대가 대한제국 해군의 명칭을 달고 참여한 첫 번째 작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선은 같은 규모의 제2보급함대를 1달 후 출항 시킬 예정이었다. 그 함대는 동일본과 명의 함대가 호송할 계획이었다.

조선에서 제1보급함대가 출발하고 며칠 후 이순신 함대는 다카르에 도착했다.

다카르로 향하는 중간에 이순신 함대는 해상에서 석탄운반선들을 통해 한차례 자체 보급을 실시해야 했다. 광무항과 다카르 사이의 거리가 항속거리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에 있던 광해가 거리를 착각한 것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현대시대에 있던 시절 광해의 소망중 하나가 아프리카 여행이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수도 없이 보고 또 보던 아프리카였기에 대강의 거리를 자신 있게 가늠했던 것인데 기억의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을 바로잡았어야 할 해군의 참모들마저 놓쳤던 것은 이 계획이 태왕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감히 태왕의 계획을 검토할 간 큰 참모가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후일 참모진의 각성이 요구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현대의 가봉 지역 앞바다에 위치한 상투메 섬에 새로운 보급기지를 건설하게 되지만 그것은 몇 달 후의 일이었다.

여하간 그렇게 긴 항해를 통해 다카르에 도착해 보급을 끝낸 이순신 함대는 하루간의 함상 휴식을 취한 후 곧바로 포르투갈을 향해 출항했다.

작전 계획 상 다카르 선이라 명명된 이선을 넘으면 본격적인 조선의 포르투갈 원정 전쟁이 시작된다. 개전에 나서는 이순신 함대의 임무는 다카선 이북 지역에서 목격되는 모든 포르투갈 함대의 격침과 항구도시에 대한 무차별 포격이었다.

다카르 선을 넘어 항진하던 이순신 함대의 첫 번째 희생양은 포르투갈의 무역선단이었다. 6척의 대형 함선들로 구성된 이 무역선단은 다카르를 출발한 3시간 만에 이순신 함대에 포착되었다.

최대사거리인 4천보(약 7천2백M) 거리에서 포격을 가해 그 무역선단을 재물로 삼은 이순신 함대는 무섭도록 정밀한 포격과 부딪치는 순간 폭발하는 작렬탄의 효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북으로, 북으로 항진했다.

이순신함대가 6천9백리(약2천700Km)를 항진한 끝에 도달한 곳은 포르투갈의 남부 항구도시인 파로의 앞바다였다. 이곳에서 최초로 3척으로 이루어진 포르투갈 해군 함대와 조우했다.

돛도 없이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움직이는 조선의 순양함들을 처음 본 포르투갈 선원들은 악마의 배라면서 겁을 집어먹었다.

거기다 대각선에 위치한 상태에서 포격까지 날아오자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포탄이 날아올 수 없는 각도였기 때문이다.

뿐인가, 포격이 어찌나 정밀하던지 단 세 번의 포격 만에 전함 1척이 직격 당했다. 더구나 그렇게 포탄을 맞은 전장 35M에 달하는 갤리온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양측의 거리가 5천M(글쓴이 주: 이당시 유럽, 특히 포르투갈의 경우 길이의 단위를 무엇을 썼는지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독자분들의 이해가 쉬운 M-미터 단위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참고로 M는 1791년도에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사용된 단위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가 넘는 상태에서 받은 공격이었기에 완전히 두려움에 휩싸인 포르투갈 선원들이 배를 돌려 도주하려했다.

하지만 연이어 쏟아진 포격에 직격당한 나머지 2척의 전함도 결국 격침되었다.

포르투갈 전함들을 격침시킨 이순신 함대는 곧바로 파로 항구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다. 항구의 접안시설을 포함한 항구 주변의 건물들이 완전 소거될 정도로 포격을 퍼부었다.

이후 서진한 이순신 함대는 알부페이라, 포르티망, 라고스 등 포르투갈 남부 해안 도시들을 모조리 포격하여 파괴했다.

특히 라고스에서는 10여척으로 이루어진 포르투갈의 함대와 교전을 벌여 모조리 격침시킨 후 지상 포격을 통해 아예 도시 전역을 마비시켜버렸다.

대량의 피난민들이 남쪽에서 발생했다.

해안에서 몇 Km안쪽 마을까지 포탄이 날아드는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까닭이었다.

더구나 공격 주체가 악마배였다. 돛도 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움직이는 조선의 순양함들은 이 당시 유럽으로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서쪽 끝인 호까곶을 돌며 곶 언덕에 지어진 사그레스 요새를 포격으로 완파한 이순신 함대가 해안을 따라 북진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포르투갈 측이 40척으로 이루어진 대규모함대를 출동시켰다.

이들은 리스본 남쪽 시네스 앞바다에서 이순신 함대와 조우했다. 소문대로 돛 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달려오는 배들을 발견한 포르투갈 선원들이 겁을 집어먹었다.

그런 선원들을 닦달해 전투준비를 갖추던 포르투갈 전함들에 포격이 날아들었다.

양측의 거리가 6천M가 넘는 거리였지만 포탄은 정확히 포르투갈 배들을 타격했다. 빗맞아 바다에 빠지는 포탄도 적지 않았지만 상당수의 포탄이 포르투갈의 배를 정확히 때렸다.

문제는 그렇게 포탄을 맞은 배들이 힘없이 부서져버렸다는 것이다. 어떤 배는 단 1발을 맞고 그대로 폭발해 버린 경우도 나왔다.

조선군이 이전에 사용했던 폭발탄과도 완전히 다른 작렬탄의 공격에 포르투갈 함대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버렸다.

지휘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선장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포에 물든 선원들은 머리를 처박고 신을 부를 뿐이었다.

순양함에 나부끼는 대형 삼태극 깃발을 가리키며 조선의 배일뿐이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공포에 휩싸인 선원들에겐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엉망이 되어버린 포르투갈 함대로 조선 순양함들의 포격이 날아들었다.

이날 40척의 포르투갈 전함들은 모조리 격침되었다. 전투 중간 백기를 걸어 항복을 청했지만 이순신은 공격을 강행 완전히 격멸해 버렸다.

이번 원정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적 조난 선원의 구조는 물론이고, 포로의 탑승도 태왕의 특명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증기철선들에 대한 기밀 유지를 위해서였다.

그래서인지 전투의지를 상실한 적을 살상하도록 명령한 이순신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포르투갈 함대를 격멸한 이순신 함대는 곧바로 항구도시인 시네스를 포격하여 잿더미로 만들고 그 자리에서 함대의 해상 보급을 실시했다.

이미 두 차례나 해상 보급을 실시해 본 경험을 가진 함대는 원활하게 보급을 마쳤다. 이후 곧바로 북상을 재개해 리스본으로 향했다.

남쪽에서 몰려들던 피난민들이 서쪽 해안지대로 확산되었다. 그런 피난민들로 인하여 포르투갈 전역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량의 병력이 리스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상대에 조선 해군을 상징하는 삼태극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는 정보보고에 따라 상륙을 대비한 것이다. 바다로 나아가라는 명령은 선원들이 따르지 않았다.

적이 조선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음에도 돛 없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움직인다는 말에 겁을 집어먹은 까닭이었다.

선원들이 완전히 겁을 집어먹은 것은 일부 사제들이 조선이 포르투갈을 공격하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고 그들의 힘을 빌렸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포르투갈 각지의 교회는 구원을 청하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헌금이 넘쳐났지만 정작 움직여야 할 선원들은 요지부동, 바다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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