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마드리드 협상
소총의 휴대성을 높이기 위해 탄창을 장착하지 않았을 때의 무게를 5근(약3Kg)까지 줄이고, 총열의 길이도 1척5촌(약455mm)으로 줄인 신형 소총의 전체 길이는 3척1촌(약940mm)으로 크기는 현재 조선군이 사용 중인 기마총과 비슷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선택한 것은 전체적인 크기의 축소만이 아니었다. 구경까지 줄었다.
이전에 사용했던 가총과 나총, 그리고 기마총의 구경이 5분의 2촌(12.12mm)이었던 것에 반해 이번에 개발된 신형 소총의 경우 3분의 1촌, 그러니까 약10.1mm이었다.
이전에 비해 줄였다고는 해도 현대시대 K2 소총의 5.56mm탄이나 M16의 7.62mm탄보다 더 큰 탄이었다. 당연히 장탄 화약량도 더 많았다.
물론 가총이나 나총에 비하면 구경은 2할, 체적은 3할 가량 줄어들었으니 다총에 사용되는 금속탄피형 총탄에 장전되는 화약량도 3할 가량이 줄었다.
명과 후금은 물론이고, 말라카를 통해서도 초석을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염초밭을 동시에 운영할 정도로 화약의 소모량이 많았던 조선으로서는 그렇게 줄어드는 화약량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화약량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사거리가 그만큼 줄어들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형 소총인 다총의 경우 나총과 비교해서 사거리의 감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금속탄피형 총탄을 사용한 것에 따른 이점이었다.
탄피 속에서 화약이 폭발하면서 후방으로 누출되는 폭발 가스가 사라지고 온전히 탄을 전방으로 밀어내는 것에만 폭발력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신형 소총인 다총의 살상 보장 유효 사거리는 나총과 같은 4백보(약727M)로 나총과 다름이 없었다.
나총과 마찬가지로 군에 납품할 때 제공하는 제원에서 최대사거리는 기록하지 않았다. 시험사격 과정에서 바람에 따라 6백보를 넘어간 기록도 있었지만 이때 살상가능 여부는 때에 따라 달랐다.
따라서 어떤 기상여건에서도 살상이 가능한 거리는 나총과 마찬가지로 4백보였던 것을 취해 그것만 기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나총과 같은 구경의 금속탄피형 총탄을 사용할 경우 오히려 사거리가 늘어날 것이란 뜻이었다. 그럼에도 사거리의 증대가 아니라 구경의 축소를 선택했던 것은 실전에서의 명중률 때문이었다.
초기 가형 소총의 총병들이 최대사거리에서 전탄 명중이란 신기에 가까운 명중률을 보였던 것에 반해 병력이 확대된 이후 일반적인 소총병의 명중률이 그 정도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실전에서 나총이 보인 평균적인 명중률은 유효사거리인 4백보(약727M)에서 1할, 3백보(약545M)에서 2할, 2백보(약363M)에서 3할, 1백보(약181M)에서 5할 대에 불과였다.
사격장에서 정자세로 사격훈련시의 명중률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온 셈이다.
그 보고에 따라서 신형 소총인 다총은 살상 보장 유효사거리를 4백보에 맞춰서 개발했던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전장에서 충분히 운용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다만 명중률은 나총에 비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강선제조 기술이 발달한 덕이었다.
다총의 강선은 6조 우선으로 5촌(약151mm)을 전진할 때마다 1바퀴 회전한다. 이것은 다총이 사격될 때 총신 안에서 총탄이 3바퀴를 회전하고 발사됨을 뜻했다.
가총과 나총을 개발하면서 탄도안정 기술이 발전하면서 총신의 길이와 총탄의 특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 포탄 개발조에서 다총에 가장 안정적인 회전수를 찾아내 적용한 것이었다.
이로써 명중률이 나총에 비해 훨씬 좋아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저격병들은 나총보다는 가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거리가 길었고, 탄도 안정이 나총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격병들의 다총 사격 시험결과 탄도 안정성이 오히려 가총보다 뛰어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제로 4백보 거리에서 저격병들은 단 한 발도 명중을 벗어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일반소총병의 정자세 사격훈련 간 명중률은 4백보에서 5할에 달했고, 실전과 비슷한 형태의 훈련에선 4백보에서 3할에 가까운 명중률을 기록했다.
3백보에서는 그 명중률이 더 올라갔고, 2백보에서는 6할을 넘겼다. 다만 이것도 실전과 유사한 훈련이라고는 해도 훈련인 것을 감안하여 실제 전투 시에는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1백보 거리에서 8할 대가 넘는 명중률을 보였다는 점에서 실제 전투에서도 상당한 명중률 상승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신형 소총이 개발되었다고 리볼버 탄창이 완전히 사멸된 것은 아니었다.
광해의 조언과 소총 개발조의 경험과 노력, 거기다 조선 금속가공 기술의 발전이 더해져 6연발 리볼버 권총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보급상의 이유로 다총과 같은 총탄을 쓰면서도 이 권총의 최대사거리는 2백보, 유효사거리는 1백보였다.
하지만 권총의 특성에 따라 의미 있는 명중률을 기대하자면 30보(약54M) 안에는 들어와야 했다.
소총 개량조에서는 조선에서 만든 이 최초의 권총에 일권총이란 아주 기초적인 이름을 붙였다.
광해는 조선군의 기본 무장을 다총, 일권총, 수탄, 총검으로 규정하여 보급할 생각이었다. 그로인해 회수되는 나총을 해병대에서 훈련받게 될 제국군에 제공할 계획이었다.
신형 무기 개발과정을 점검한 광해가 궐로 환궁했을 때는 어둠이 어둑어둑 사위에 내려앉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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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중순, 광해의 명령으로 현월열도에서 혹한적응 시험 중이었던 증기철선 시험선이 부산포로 돌아왔다. 해당 함선은 곧바로 거제로 옮겨져 정비에 들어갔다.
정비가 마무리 된 3월 초순부터 거제로 이동해온 이순신에게 인계된 시험선은 전술 및 작전운영 시험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대함 사격, 대지 포격, 충파, 고속 운항, 고속 기동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의 운항성과 문제점, 그리고 특성 등을 살피며 증기철선에 맞는 전술을 짜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현월열도에서도 겨울 간 멈춰졌던 정찰 및 점령이 다시 재개되었다. 광해는 징검다리 원정단에게 올해 안에 현월열도 및 육지의 거점 확보를 명령해 두었다.
그로인해 징검다리 원정단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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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외교부 장관이 탑승한 제21원덩함대 소속 제211원정전대가 리스본에 도착했다. 외교부 장관이 도착한 리스본 항구는 제223조선 무역선단을 필두로 한 6개의 조선 무역선단이 일대의 바다를 완벽하게 봉쇄한 상태였다.
봉쇄 조치를 실행 중인 조선 무역선단들의 단장들과 가벼운 회의를 진행한 외교부 장관은 곧바로 제211 원정전대 소속 왕건급 호위함으로 옮겨 타고 리스본 항구로 입항했다.
유럽남부의 최대의 무역항으로 항상 호황을 유지했던 리스본 항구는 조선 무역선단들의 봉쇄조치로 완전히 기능이 정지되어 있었다.
사전에 연락선을 통해 방문 사실을 알린 까닭인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한산한 항구에 입항한 외교부 장관을 마중 나온 것은 포르투갈의 고위 귀족이었다.
그는 조선의 외교부 장관이 직접 포르투갈까지 왔다는 것에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영접을 받으며 리스본 항구에 올라선 외교부 장관은 가장 먼저 포로들을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접을 맡았던 포르투갈의 고위귀족은 그 요청을 거절했다. 그 거부에 외교부 장관은 그들의 안전이 확인되어야만 무슨 협상이든 진행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포르투갈의 고위귀족은 왕궁으로 사람을 보냈고, 포로들의 접견이 허락되었다.
항구에서 마차로 30분이나 이동해서야 도착한 포로수용소는 죄인들을 가둬두던 감옥을 개조한 것으로 굉장히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포로들로 잡혀있는 조선군인들과 선원들의 모습은 처참 그 자체였다. 도대체 얼마나 제대로 먹이지 않은 것인지 뼈에 가죽을 입혀놓은 듯 보이는 포로들의 모습에 외교부 장관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외교부 장관의 요청에 의해 불려나온 단장은 그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렸다. 그런 그의 손을 잡으며 외교부 장관이 말했다.
“조금만 더 참게. 폐하께오서 내게 주신 명은 자네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라는 것이었으니, 절대로 나 혼자 조선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걸세. 내 약속함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단장을 위호한 외교부 장관이 곧바로 왕궁으로 안내되었다.
포르투갈의 왕궁으로 안내된 외교부 장관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귀족원 원장이었다. 포르투갈의 군왕이었던 펠리페 3세는 동군연합이었던 에스파냐의 왕궁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인해 귀족원장이 외교부 장관의 협상대상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조선의 외교부 장관이 물었다.
“저는 아국의 폐하께 전권을 위임받아 왔습니다. 귀족원장께서도 이 협상에 전권을 위임받으셨습니까?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든 그것이 이 협상의 최종안이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권리를 귀국의 국왕께 받으셨는지를 여쭙는 것입니다.”
조선 외교부 장관의 물음에 결국 포르투갈 귀족원장은 에스파냐 왕궁으로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며칠 후, 에스파냐 왕궁에서 온 답은 조선의 외교부 장관을 마드리드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에스파냐의 수도였던 마드리드는 전대 국왕인 펠리페2세가 왕실의 중심지였던 톨레도에서 이전해 지은 곳이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마차에 외교부 장관이 수행원들과 함께 몸을 실었다.
진동 방지장치가 달린 조선의 마차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포르투갈의 마차를 타고 온종일 달리는 여정은 고역 그 자체였다.
하지만 외교부 장관과 수행원들은 열악한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렇게 마차로 몇날 며칠을 달린 끝에 도착한 마드리드에서 외교부 장관은 드디어 펠리페 3세를 마주할 수 있었다.
훗날 마드리드 협상이라 기록되는 조선과 포르투갈 간의 포로 교환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의 외교부 장관이 에스파냐의 국왕께 인사드리옵니다.”
깊숙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는 조선의 외교부 장관의 인사를 수행한 역관의 통역으로 전달받은 펠리페 3세가 물었다.
“조선의 외교를 담당하는 최고 관리라고?”
“예. 그러합니다.”
“그런 사람이 이 먼 곳까지 직접 달려왔다는 소린가? 솔직히 믿기 어렵군.”
“아국의 폐하께오서 그만큼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주십시오.”
자신들의 비겁함이 연결된 일이 가장 먼저 거론되었기 때문일까, 펠리페 3세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조선은 선왕과의 우호에도 불구하고 말라카와 희망봉을 병합했다. 그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한다.”
“선왕이신 펠리페 2세 전하와 맺은 우호는 아국과 전쟁 중이었던 왜에 전선과 화포를 넘기면서 이미 무너졌던 것으로 아옵니다.”
“교역은 주권에 속한 권리다. 무엇을 팔든 결정은 에스파냐가 하는 것이지 조선이 개입할 것이 되지 못한다.”
펠리페 3세의 억지에 휘말려들 생각은 없었지만 이미 지나온 일에 발목을 잡혀서도 안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