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67화 (167/325)

제167화. 인질(人質)

끌고 나온 단장과 고위 군관들의 목에 일제히 칼을 가져다 댄 것만으로도 포르투갈 측의 뜻은 확고했다. 그것에 주춤거리는 동안 휘둘린 포르투갈 군인의 칼에 한 고위 군관의 목이 떨어졌다.

주먹을 꽉 움켜쥐는 당직 사령만큼이나 분노한 이세현과 병사들의 입술이 앙다물렷다.

그럼에도 조선군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포르투갈 군인들은 기다리지 않았다. 추가로 한명, 두 명, 세 명 때 목이 더 날아갔다

첫 번째에 희생된 이를 포함해 4명의 조선군 고위 군관이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목일 날아간 것이다.

“당직사령님······.”

조심스럽게 부르는 이세현의 음성이 떨려나왔다. 그냥 두면 저기 끌려나온 30명 가까운 고위 군관은 물론이고 단장까지 죽임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세현의 부름에 당직사령이 고개를 저었다.

“귀관의 마음은 안다. 하지만 우리가 항복하면 배를 빼앗기고······.”

말을 하다말고 눈을 크게 뜨는 당직사령의 모습에 황급히 시선을 돌린 이세현의 시야로 수백 명의 조선군 병사들과 선원들이 끌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목에도 고위 군관들처럼 칼이 놓였다.

항복하지 않으면 저들도 다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상륙한 병사들과 선원들은 저기 끌려나온 이들보다 더 많았다.

만에 하나 자신들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 그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은 자명해보였다. 자그마치 1천명이 넘는 이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것이었다.

당직사령이 갈등하는 가운데 벌써 추가로 셋의 목이 잘려나갔다. 그걸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당직사령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상황에서 한 수병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아! 후미의 조선 무역선들 중 하나에서 백기가 올라갔습니다.”

동료들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조선 무역선들 중 한 척이 백기를 올린 것이었다. 그것이 신호였던지 여기저기 다른 함선들에서도 백기가 올라왔다.

그 상황에 고개를 떨군 당직사령의 명령이 떨어졌다.

“백기······. 올려라.”

그 명령 끝에 당직사령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이세창은 보았다. 그 결정의 고통을 누구보다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던 이세장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것에 곁에 있던 다우란타 준사가 분노와 절망이 마구 뒤엉킨 표정으로 백기를 올리도록 지시했다. 갑판위의 병사들이 저마다 분루(忿淚)를 흘렸다.

조선군이 적에게 처음 항복하는 순간이었다.

*****

제211 조선 무역선단에게 벌어진 일을 가장 먼저 확인한 이들은 잉글랜드 남부의 무역항인 폴리머스(Plymouth)에 기항하고 있던 제223 조선 무역선단이었다.

리스본 항을 들렸다온 프랑스 상인에게서 해당 사실을 전해들은 통역군관이 황급하게 귀함하여 올린 긴급보고에 제223 조선 무역선단은 곧바로 비상상태로 돌입했다.

비상종을 쳐 상륙병력의 귀함을 서두른 것은 물론이고, 각함마다 경계병의 수를 평상시의 배로 늘렸다.

그 상태에서 기함으로 각 함의 함장들이 소집되었다.

긴급하게 열린 회의에서 분노한 다수의 함장들이 서둘러 리스본으로 향해 구출작전을 펼치자고 제안했다.

제211 조선 무역선단에 벌어진 일이 남의일 같지 않았기 때문에 함장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런 함장들에게 단장이 물었다.

“성공은 할 수 있겠소?”

“저들에 비해 우리의 화력이 월등합니다. 비겁하게 뒤통수를 맞지 않으면 충분히······.”

한 함장의 말을 손을 들어 막은 단장이 말했다.

“구출 작전은 화력의 우세로 가능한 일이 아니오. 녹슨 철검만 있어도 포로로 잡혀있는 우리 동료들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단장의 그 말에 구출작전을 주장했던 함장들의 입이 다물렸다. 그 속에서 기함의 함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며 단장님은 어찌 하고자 하십니까?”

“일단은 소식을 본국에 보내고자 하오. 외국과의 무력 충돌인바 폐하의 비답을 받아보아야 하지 않겠소.”

“그동안 저들은 어찌 하고요?”

“우리와 추가로 유럽으로 오는 조선 무역선단들을 규합해 위력시위를 해야겠지. 아예 리스본 앞바다를 봉쇄할 생각이다. 적어도 봉쇄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은 211 동료들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은 치지 못할 테니까.”

단장의 의견에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함장들이 늘어갔고, 이내 소식을 가지 호위함 2척이 급히 선단에서 이탈해 폴리머스를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제223 조선 무역선단도 지브롤터 해협으로 이동해서 아프리카 해안을 돌아 유럽으로 들어오는 조선 무역선단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2달간 3개의 조선 무역선단이 모이자 조선 무역선단들은 곧바로 리스본으로 향했다. 포르투갈의 리스본 항구를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추가로 도달할 조선 무역선단을 규합하기 위해 지브롤터 해협에 호위함 2척을 남겨놓았다.

*****

소식을 가진 제223 조선 무역선단 소속 왕건급 호위함 2척은 최대의 속도로 기항지들을 무시하고 최단시간 주파를 위해 조선으로 달렸다.

그로인해 희망봉과 말라카는 들렸지만 마드라스는 건너뛰었다. 이후에도 해남이나 대만, 유구에도 들리지 않은 호위함들은 곧바로 부산포로 들어왔다.

기항 교역 없이 최소한의 보급만 수행하며 항해로만 움직여도 3개월이 넘게 소요되는 거리를 호위함들은 2달 보름 만에 주파한 것이었다.

바람이 약한 날은 수병들이 모두 돌아가며 바람날개를 돌린 덕분에 이룩한 기록이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달려온 호위함들이 전한 장계가 야심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침전에 든 광해의 손에 들어갔다.

광해 5년, 서기 1607년 정초에 전해진 이 불의의 소식에 조선 군부가 달아올랐다.

곧바로 전 해군과 해병대에 태왕의 동원령이 떨어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광해는 조용히 외교부 장관을 침전으로 불렀다.

장계를 읽은 외교부장관마저 분노로 파르르 떠는 가운데 광해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부산포에 수용되어 있는 포르투갈 포로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이번에 희망봉에서 잡혀온 이들까지 해서 8백 명이 조금 넘사옵니다.”

“그들과 교환을 타진하라. 마카오를 통하지 말고 포르투갈로 직접 전하라. 그것 또한 관리를 보내지 말고 경이 직접 가라. 내 전권을 주겠다. 무엇을 양보하든, 무엇을 더 얹어주든 그들만 데려오면 된다. 그것이 경에게 내래는 태왕으로써의 어명이다.”

“하, 하오나 폐하!”

“다른 말은 하지 말라. 살아남아 포로로 잡힌 이들을 무사히 그들의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에 집중하라. 그것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참기 힘든 굴욕도, 막대한 손해도 감수한다. 잊지 말라. 경에게 내가 준 임무는 가능한 손해를 덜 보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주던 그들을 무사히 데려오는 것이라는 것을.”

단호한 광해의 명에 외교부 장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받잡나이다. 폐하.”

“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곧바로 떠나라.”

“예. 폐하.”

조심스럽게 물러나는 외교부 장관의 표정은 먼 길을 떠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안감보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외교부장관이 나가자 광해가 상선인 알지에게 명했다.

“내탕금을 담당하는 환관을 부르고, 거제로 사람을 보내 최대한 빨리 건선장을 소환하라. 건선장의 도착에 맞춰 장원주도 부르도록.”

“예. 폐하.”

알지마저 나간 침전엔 불길이 튀어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눈을 빛내는 광해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앉아 있었다.

*****

외교부 장관은 몇몇 수행원을 소집해 곧바로 부산포로 향했다. 자신의 사가엔 사람을 보내 통보만 했을 뿐 들리지도 못한 채 떠날 만큼 서두르고 있었다.

부산포에 도착한 외교부 장관은 태왕의 파발을 받고 대기하던 제211원정전대와 함께 포르투갈을 향해 출항했다.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던 왕건급 호위함 2척도 자원하여 211원정전대와 합류했다.

그렇게 외교부 장관이 부산포를 떠나던 시간, 태왕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건선장 나대용과 장원주 이장손이 대전으로 들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광해가 말했다.

“소식은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설명 없이 물으리다. 지금부터 1년 후, 내가 몇 척의 증기철선을 가질 수 있겠소?”

“시험선이라면 30척 내외가 될 것으로 보이옵니다.”

나대용의 답에 광해가 다시 물었다.

“개량된 설계가 진행 중이라 들었소만.”

“마무리 단계이긴 하오나, 아직 혹한 적응시험에 나선 시험선이 돌아오지 않아 그 자료를 반영하지 못하였나이다.”

“그것을 빼고 지금의 설계로 진행한다면?”

“역시 30척 정도를······.”

“50척. 50척을 내 손에 쥐어주시오. 할 수 있겠소?”

광해의 물음에 나대용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무리하오면 가능은 하겠으나 척당 건조비용의 상승이 불가피 할 것이옵니다.”

“어제 내탕금을 관리하는 환관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소. 얼마가 되었든 제 내장을 팔아서라도 만들어 내겠다하더군. 하니 돈 걱정은 말고 무조건 1년 후 이날까지 신형 증기철선 50척을 내손에 쥐어주시오.”

“적도들에 대한 보복이라면 차라리 전열함들을 만드소서. 해모수급이라면 1년 안에 1백 척도 만들어 낼 수 있나이다. 더구나 증기철선의 건조비에 5분지 1이면 한척을 만들 수 있사옵니다.”

“며칠 전에 네덜란드 함선이 말레이 지역의 향신료 생산기지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는 말라카의 장계가 있었소. 한데 그 과정에서 아무래도 폭발탄의 사용된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 있더구려.”

“저, 정말이옵니까?”

놀라는 나대용에게 광해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추가 확인을 거쳐 다시 장계를 올리겠다고는 하였으나 말라카 주둔군이 장계에 올릴 정도라면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겠지.”

“하오시면 증기철선들을 만들라 명하신 것도······?”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다면 포르투갈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겠지. 더구나 그들은 우리의 함선들을 나포했으니 그 무기들이 다 어디로 갈 것 같나.”

광해의 답에 나대용이 고개를 조아렸다.

“저와 건선단지의 기술자들의 손이 터져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내년 이날, 폐하께 신형 증기철선 50척을 들어 바치겠나이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광해가 이장손을 바라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이장손이 고개를 조아렸다.

“장착되는 무장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나이다. 걱정 마소서. 폐하.”

“두 사람을 믿고 기다리겠소.”

“믿으소서. 폐하.”

답을 한 두 사람이 물러나자 광해가 이번엔 이순신을 불렀다.

잠시 후, 굳은 표정으로 들어선 불굴의 노장에게 광해가 말했다.

“짐이 원수에게 다시 바다로 나가 달라는 부탁을 해야 하겠소만.”

“명만 주소서. 그곳이 어디이든 소신은 폐하가 명하신 곳에서 조선의 검이 될 것이옵니다.”

“고맙소이다. 내년 이 맘 때 경이 짐작하는 곳을 칠 것이오.”

“함대를 준비하겠나이다.”

“지금까지의 함대와는 다른 것을 경에게 줄 것이오. 그것에 대비하시오.”

“증기철선이옵니까?”

“맞소. 현월열도에 나가있는 시험선을 최단 시간 안에 불러들이겠소. 그것을 가지고 운항, 전술, 포격 모두를 사전에 검토하여 준비하시오.”

“명을 받잡나이다. 폐하.”

깊게 부복하는 이순신을 바라보는 광해의 눈빛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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